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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192/500)

192화

축제가 끝난 주말.

나는 어젯밤의 피로가 남아있는 듯 겨우 눈을 떴다.

팔이 저리다. 살며시 옆으로 곁눈질하니 시하가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다.

베개는 어디로 갔는지 보니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왜 저기까지 간 걸까?

방에 CCTV라도 달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음.”

살며시 시하의 머리를 들어 나의 베개를 밀어 넣었다.

이제야 피가 통하는지 팔 저림이 더 커져서 한 조각 남은 잠까지 깨운다.

잠 깨는 데는 시하의 팔 배게!

이렇게 홍보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그런 헛생각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티셔츠가 들어 올려지며 배가 빼꼼 보인다.

이제는 점점 희미해지는 복근을 보며 운동을 너무 안 했음을 실감한다.

‘요즘 바쁘게 일하긴 했지.’

사실 없어지는 건 개의치 않지만 운동을 안 하고 있다는 건 신경 쓰였다.

현재 프리랜서 생활을 하는 중인데 자기관리가 엉망이면 언제 건강이 훅 나빠질지 모르는 거니까.

물론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것도 핑계 아닌 핑계였다.

시하가 깨기 전에 잠깐이라도 운동해야겠다.

살금살금 방을 나가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쭈욱. 쭈욱.

몸을 깨우기 위해 꼼꼼히 풀고 있는데 시하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형아 모해?”

“아. 형아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어.”

“시하도 가치.”

“오. 시하도 같이?”

끄덕끄덕.

그렇다면 시하에게 꼭 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이걸 위해 공부했다는 말씀.

“그럼 시하야. 이렇게 누워봐.”

“왜?”

“왜긴. 형아가 스트레칭 도와주려고 그러지.”

“아아!”

시하가 내 앞에서 누웠다.

나는 팔다리, 가슴 배를 열심히 주물러 주었다.

이렇게 하면 키가 큰다고 들었다.

“어때? 시원해?”

“시언해~”

“크흡. 그래? 이렇게 쭈쭈하면 키 크는 데 도움이 된대.”

“쭈쭈?”

“응. 쭈쭈.”

음. 인터넷에서 본 말인데 괜히 얼굴이 화끈해진다.

참 익숙하지 않은 단어다.

나는 야무지게 시하의 몸을 주물렀다.

이것만 해도 악력 운동이 되는 듯했다.

“자. 끝. 다음은.”

“아냐. 시하도. 시하도. 형아. 쭈쭈.”

“어어?”

“빨리. 빨리.”

“어. 그래.”

나는 시하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천장을 보고 누웠다.

이 나이에 쭈쭈라니. 형아는 더는 안 큰단 말이야.

물론 시하는 그런 거 상관없이 나를 따라서 해 주고 싶은가 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다리를 열심히 주무른다.

“형아. 시언해?”

“푸흡. 흠흠. 어이구~ 시원하다~”

“시언해?”

“응. 시원해. 시원해.”

내 말에 시하가 더 열심히 한다.

그런데 시하야. 사실 너무 간지러워.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쭈쭈.”

시하는 신나게 내 몸을 주물렀다.

꼼꼼하게는 하지 않고 다음 부위로 넘어가는 간격이 컸다.

상남자다운 거리 감각이구만.

“형아. 다 해써.”

“오! 그래? 형아 키가 조금 큰 것 같아. 시하 손은 마법 손이네.”

“시하 잘해?”

“잘해. 잘해. 이제 슈퍼맨 스트레칭을 해볼까?”

“슈퍼맨?”

“응. 자, 이렇게 엎드려서 팔하고 다리를 위로 올리는 거야. 옳지. 형아가 잡아줄게. 10초만 이렇게 있자.”

이렇게 하면 척추와 골반 부위의 성장점을 자극하고 허리의 힘도 길러준다고 한다.

“형아. 시하 나라.”

“시하야. 10초 세야지.”

“서이. 너이. 열!”

“시간 점프가 대단하네. 이거 딱 세 번만 하자.”

“시하 세 번 나라?”

“시하야. 세 번이라고 말할 수 있었어?!”

“왜?”

“아, 아니야.”

뭐지? 왠지 속은 기분이다.

언제부터 세 번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

이거 뭐 한국어랑 외국어랑 섞어 쓰는 그런 느낌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슈퍼맨을 마쳤다.

그 뒤로 나도 슈퍼맨을 해야 했다.

이거 은근 운동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시하랑 이렇게 같이 운동하면 될 것 같았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이제 스트레칭은 끝났고 같이 운동하면 될 것 같아.”

“아아! 운동! 형아 가치.”

“응. 형아랑 같이. 음…. 뭘 하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문에서 똑똑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침부터 누구지? 싶어서 문을 열었다.

“오. 백동… 이 아니라 동환아.”

“아아! 백동!”

시하가 자꾸 백동이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백동이 입에 붙었다.

분명 다른 사람도 그럴 거야.

동환이라고 하면 ‘걔가 누구지?’ 하겠지만 백동이라고 말하면 ‘아아! 걔구나!’ 할지도 모른다.

백동환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제 이름이 백동인지 동환인지 헷갈리거든요.”

“너는 헷갈리면 안 되지 않나? 근데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야?”

“뭔가 운동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서 두드려봤습니다.”

뭐지? 얘 신기 있나? 살짝 소름 돋는데?

2미터 넘는 근육질 무당이라. 너무 무섭잖아…….

귀신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귀신을 때려잡게 생겼는데?

“진짜로?”

“그건 아니고 아침 안 드셨으면 같이 먹고 운동하자고 해보려고 했죠.”

“오? 무슨 운동?”

“등산이요.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산에 가끔 가기도 하고 나물도 캐온다고. 오늘은 도라지를 캐려고 합니다. 여기 호미도 준비했고요.”

“이야. 재밌겠네. 시하도 좋아할 것 같아. 함께 운동도 되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역시 백동이네.”

“아아! 백동!”

시하가 내 옆에서 거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라지 모야?”

“어? 으음. 몸에 좋은 거 있어. 맛도 있고.”

“마시써?”

“응. 맛있는데 시하는 별로 맛없을지도 몰라. 형아가 한번 무쳐줄까?”

“무더?”

“묻으면 큰일 나지.”

앞에서 백동환이 말했다.

“아무튼, 가는 겁니다?”

“콜.”

이렇게 우리는 등산을 하게 되었다.

***

싱그러운 공기가 내 코로 들어온다.

해가 떠 있는데도 살짝 서늘함이 느껴져서 발을 열심히 놀리게 된다.

좀 더 몸에 열이 나오라고.

“근데 여기 등산길 맞아?”

“하하. 샛길입니다. 근데 다 등산로로 이어져요.”

“누가 발견한 길이야.”

“글쎄요? 저 같은 사람들이 지나가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데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다.

밟고 또 밟히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기를 하듯이 눈에 갈색 길이 훤히 보인다.

“시하야. 힘들면 형아에게 말해야 해. 알았지?”

“아냐. 시하 할 수 이써.”

나는 시하가 혹시나 넘어질까 봐 뒤에 섰다.

열심히 발을 놀리는 게 참으로 힘차다.

이대로 쭈욱 정상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시하에게는 많이 힘들겠지.

어차피 도라지 캐는 데 정상까지 갈 필요가 없긴 하다.

“그런데 시하야. 꼭 펭귄 가방은 가져와야 했어?”

“아아.”

산을 오르는 펭귄.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서 시하의 등에서 흔들거린다.

내가 물이랑 이런 걸 챙기면서 가방을 멘 게 원흉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쯤.

“형님. 여깁니다.”

“오! 근데 도라지 있는 곳을 알고 있는 거야?”

“아니요. 그냥 주위를 둘러보면 딱 보입니다.”

“진짜 엄청나네. 난 다 똑같이 보이는데.”

“하하. 형님도 익숙해지면 알게 될 겁니다. 보라색, 흰색 꽃이 보이면 더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건데.”

“아, 그래?”

“네. 자. 시하야. 여기를 호미로 파는 거야.”

시하가 나를 보았다.

나는 가방을 열어서 시하에게 작은 호미를 주었다.

“자. 여기 있어.”

“아아! 형아. 시하 캐. 도라지 캐.”

“그래. 우리 같이 캐볼까?”

“아아.”

“형님. 여기 많네요. 이걸 호미로 살살 캐면 됩니다.”

백동환이라면 어딜 가든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가르쳐준 곳을 열심히 팠다.

시하가 호미를 들고 조심히 흙을 살살 긁었다.

점점 형태가 드러나는 산도라지.

“형아? 도라지?”

“자. 잘 봐. 이렇게 긁어서 도라지를 캐는 거야. 자 나왔다.”

“아?”

시하가 도라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아. 나무야. 나무.”

“하하하.”

“아기 나무. 아기 나무.”

흙색으로 되어 있으니 실제로 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에서 캔 거는 잔뿌리도 많고 나이테도 보였다.

시하의 표현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형아. 넣어. 넣어.”

시하가 자신이 파낸 구멍을 가리켰다.

“왜?”

“아기 나무야. 여기 흑. 흑이야. 키 커야 해. 쭈쭈야. 쭈쭈.”

“아. 여기서 흙이 쭈쭈 해 줘야 해?”

“아아.”

하여간 생각하는 게 너무 귀엽다.

흙이 쭈쭈 해 줘서 나무가 자라는구나.

“아닌데. 형아가 가져갈 건데.”

“아냐. 나무 여기. 여기.”

“사실 이건 나무가 아니라 도라지야.”

“아?”

“시하가 나무로 착각하는데 도라지 맞아. 실제로 아기 나무는 이렇게 안 생겼어.”

“도라지?”

“응.”

근데 형아도 실제로 아기 나무를 본 적이 없네.

나뭇가지처럼 생기지 않았나?

“형님. 주변에 도라지 더 있습니다. 도라지가 하나만 달랑 있지는 않거든요. 모여 있습니다.”

“아. 그래? 열심히 캐야지. 시하야. 또 캐볼까?”

“아아!”

이제야 안심하고 시하가 다시 도라지를 캔다.

근데 이제 산에 있는 도라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도라지라는 건 이렇게 구분되는구나.

몰랐을 때는 그냥 풀때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도라지다.

그게 참으로 신기했다.

산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걸 주는구나.

운동도 시켜줘, 좋은 공기도 마시게 해줘, 먹을 것도 줘.

“시하야. 산 좋다. 그치?”

“아아. 산 조아. 재미써.”

시하가 땀을 닦았다. 얼굴에 흙이 다 묻었다.

언제 저렇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시하 얼굴에 흙 다 묻었네.”

“시하 흑 쭈쭈 해?”

“뭐? 하하. 그래. 시하 얼굴 쭈쭈 해 주네.”

오늘은 또 쭈쭈에 꽂혔구만. 종일 쭈쭈거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주변의 도라지를 캐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하네.

“시하야. 여기 검은 봉지에 넣자.”

“아아.”

도라지를 검은 봉지에 넣고 다시 산을 올랐다.

정상적인 등산로와 이어지는 길.

거기까지 도착하면서 나는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서 시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지팡이 삼으라고 말이다.

딱 보니까 누군가 쓰다가 버린 형태였다.

“와. 벌써 이만큼 왔네. 시하야. 좀 쉴까? 저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네.”

“힘드러. 시어.”

“그래.”

우리는 쪼르르 앉았다.

시하에게 물을 주자 꼴깍꼴깍 잘도 마셨다.

대충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시하야. 이제 좀 쉬다가 내려갈까?”

“아? 왜?”

“너무 많이 와서 이제 내려가면 좋을 것 같아.”

“아냐. 시하 위에. 위에.”

“끝까지 간다고?”

“아아.”

산은 왜 오르는가? 그곳에는 정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왜! 왜! 정상이 있냐고!

해발고도도 어린이용으로 낮춰 달라고!

나는 살며시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앞으로 올라갈 때 어떻게 될지 너무 뻔히 보여서.

어쩔 수 없지. 시하를 위해 무리를 좀 해볼까?

나는 물을 열심히 마시는 백동환을 보았다.

“어? 동환아.”

“넵?”

“잘 부탁한다.”

“예?”

네가 같이 있어 줘서 살았다.

내 말의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하하하! 반반씩 하자고. 반반씩.

***

결국 시하를 업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등이 축축할 텐데 시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형아, 개차나?’ 하고 걱정해 준다.

괜히 저 말에 감동이다.

시하가 걸을 수 있다고 하는데도 나는 업었다.

아니. 이건 다음 날을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근육통으로 고생하면 큰일 나잖아.

내일이 일요일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자. 정상에 도착했다.”

“아아! 형아. 정상!”

지금까지 운동 안 한 일수는 다 채운 것 같다.

하늘이 샛노랗게 보이는 건 착각이겠지?

그래도 고생 끝에 온 만큼 보람이 느껴진다.

시원한 바람이 불며 땀을 식힌다.

“형아!”

시하가 정상에서 본 풍경이 신기한지 나를 불렀다.

비행기 위에서 아주 작은 세상을 봤는데 여기서 보는 절경은 또 다른 감상을 일으키나 보다.

하긴 산만의 매력이 있지.

“나무 마나.”

“응. 그러네.”

이제는 가을이라고 잎이 붉고 노랗게 물들어 있다.

중간중간에 초록 잎이 있어서 더 다채로워 보인다.

나는 이렇게 엉망으로 색깔이 섞여 있는 게 좋다.

단색으로 되어 있는 것보다 더 재밌지 않은가.

“형아. 색 마나.”

“그치? 형은 이 풍경이 좋아. 마치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장난친 것 같잖아.”

“아냐.”

“응? 아니야?”

“아아.”

“그럼 뭔데?”

나는 시하의 대답이 궁금했다.

시하가 노란색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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