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무대가 끝이 났다.
윤동과 은우의 개인기를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람들이 돌아갔다.
상당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가는 것도 일이었다.
“자자. 다들 질서 지켜서 나갑시다. 먼저 계단에 앉으신 분들부터 빠져나갈게요.”
우르르 일어서서 나가는데 여기가 정말 극장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름 질서를 지키며 나가서 딱히 큰 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대강당이었으면 좀 더 자리가 텅텅 비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잘했어요!”
선생님의 칭찬에 아이들의 어깨가 으쓱했다.
특히 윤동과 은우는 어깨가 하늘로 솟구쳐 있었고 콧대는 이미 천장에 닿아 있었다.
그만큼 무대가 주는 만족감이 죽였으니까.
“선생님! 또 춤추는 날 없어요?”
“윤동아. 미안해. 해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다음은…….”
“뭐 또 다음에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윤동이 입을 삐죽였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몸은 솔직해서 툴툴거리고 있다.
은우는 옆에서 씨익 웃으며 윤동의 팔뚝을 주먹으로 때렸다.
“나중에 우리 둘이 하면 되지. 어린이집에서 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이야.”
선생님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기요. 어린이집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너희 둘이서 어디서 하려고?
다른 아이들도 볼이 상기되어서 신나게 떠들었다.
황금 막내 시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아? 형아?”
“시혀기 형아는 저어기 무대 뒤에서 쓰레기 줍던데?”
승준의 손끝에 시하가 도도도 달려가 커튼을 걷었다.
시혁은 남은 뒷정리를 하며 국문과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하가 계단으로 내려와 형아에게 달려가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시하 와써.”
“오! 시하 왔어? 오늘 정말 잘했어. 그런데 시하야. 시하만 온 게 아니네?”
“아?”
시하가 뒤를 돌아보니 승준과 하나도 함께 있었다.
둘이서 싱글벙글 웃으며 함께 시혁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승준이 말했다.
“아하하! 나도 다리 하나 차지했다.”
“오빠는 저기 떨어져. 하나가 차지해.”
“싫은데~”
시하가 쌍둥이를 보고 눈을 껌뻑였다.
그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냐. 시하 꺼. 시하 꺼.”
“시하야. 다리는 형아 꺼인데?”
“형아 꺼. 시하 꺼. 시하 꺼. 형아 꺼.”
“벌써 그런 말을 알다니…….”
시혁은 감동한 듯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경트리오가 말했다.
“역시! 황금 막내! 아주 잘 아네. 하하하!”
“우리 동아리 멤버가 아이돌이 되었으니 난 이제 회장이 아니라 소속사 대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랄하고 있네.”
신경환의 신랄한 말에도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경준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잠깐!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미리 자리 잡아야지. 오늘 ‘샴블’ 온다고.”
여자 아이돌 샴블.
요새 떠오르고 있는 신인 아이돌이었다.
나오자마자 음방 1위를 따냈고, 노래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하나도 요새 눈여겨보고 있는 언니들이었다.
“하나도! 하나도! 갈래! 보고 시퍼!”
박경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으래?! 강인돌 홍일점 하나가 가자고 하면 가야지. 빨리 밥 먹고 오빠들이 자리 잡아줄게. 하! 하! 하!”
그때 시혁이 살짝 손을 들고 초를 친다.
“아. 우리는 이미 앞에서 자리 맡아져 있어.”
“야이! 배신자야!”
시혁은 살며시 눈을 돌리고 볼을 긁적였다.
어쩔 수가 있나.
강인대 홍보담당 홍광영이 잘 봤다고 인사 와서는 자리 잡아두었다고 언질까지 주었으니.
도저히 그 자리에서 안 간다고 할 수 없었다.
시하랑 쌍둥이들도 가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애들은 피곤하지 않다는 점.
미리 낮잠도 충분히 자고 나서 공연을 한 거였으니.
“그런데 하나야. 엄마는 어디 갔어?”
“응? 몰라.”
“승준아?”
“응? 저기 뒤에!”
승준 엄마가 쓴웃음을 지으며 커튼 뒤에서 나오셨다.
시혁은 생각했다.
‘엄마한테는 말하고 나한테 와야지.’라고.
***
축제의 꽃.
여러 행사와 먹거리 부스가 있지만 그래도 꽃이라고 하면 역시 무대 공연이다.
특히 연예인이 올 때면 다들 뭐에 홀린 듯이 엄청난 함성이 튀어나온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지 그 열기는 오늘 축제가 끝날 때까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와. 야외무대 좋아 보인다. 시하야. 저기 빈자리 있네. 우리 앉자.”
“아아.”
오른쪽 끝에 놓인 의자.
정말로 앞자리에 배치해 두고 어린이들을 위해 놓여 있다고 적혀 있었다.
미리 말해 둬서인지 손쉽게 앉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늘 아이돌 나온대. 아이돌. 시하도 관심 있어?”
“아? 아이돌?”
“응. 예쁜 누나들이 나와서 춤추는 거야.”
“리사. 개굴?”
“응? 아하하. 물론 둘도 예쁘지. 리사랑 개굴, 아니 수현이같이 예쁜 사람이 와서 춤춰.”
“재미써?”
“음. 그 사람들 좋아하면 재미있겠지? 아마? 그래도 노래도 좋아서 분명 재밌을 거야.”
“아아.”
아직 시하는 아이돌에 그렇게 관심이 없나 보다.
하긴 하나가 보고 싶다고 하길래 따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아이돌을 엄청 좋아하는 시기가 올까?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직 아이돌보다는 만화 캐릭터를 더 좋아할 때니까.
아니면 전대물의 레드나.
“시혀기 오빠!”
“응?”
“샴블 언제 나와?”
“어…. 일단 학생들 공연을 좀 한 다음에 한 8시 30분쯤에 온다는데?”
“8시 30분?”
“응. 2부에서 온대.”
“아하. 2부! 기대대! 하나도 아이돌 하고 시퍼.”
“하하하. 그래. 하나라면 엄청 인기 있는 아이돌이 될 거야.”
“나는 사커선수! 사커선수!”
“승준이라면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겠네.”
“시하! 형아! 대! 형아 대!”
“어…. 아마 시하는 좋은 형아가 되지 않을까?”
일단 어린이집에 동생부터 들어와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내가 되고 싶다니. 꽤 좋은 소리를 하는 구만. 흠흠.
“아~ 나도 시혀기 형아처럼 다 잘하고 싶다!”
“하나도 하나도.”
“시하도!”
“하하. 그럼 나는 황금 형아인가. 하하. 시하는 황금 막내니.”
시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을 파닥파닥거리며 나를 때렸다.
“형아. 항굼. 아냐. 항굼 아냐.”
“어? 형아는 황금 형아가 아니야?”
“아냐. 형아. 레드 형아야. 레드.”
역시 황금보다는 레드지.
빛나는 골드보다는 레드가 더 강해 보이기는 할 거다.
“시혀기 오빠. 누가 나와써!”
“응?”
무대 공연에 중요한 것은 연예인뿐만이 아니다.
그날 공연의 분위기를 띄우는 건 역시 진행자다.
이 공연의 긴장감을 늘였다 줄였다 하는 지휘자가 되어야 하기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인데? 홍광영 아니야?
“하하. 여러분 안녕하세요! 학생회 홍광~영이어라~ 홍광영입니다.”
“와아아아!”
“작년에 뽕삘로 무장하고 나왔는데 오늘은 진행자로 나왔습니다. 아, 여기서 의문이 살살 들 겁니다. 왜! 대체 왜! 전문 진행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나!”
나도 그게 의문이다.
대체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샴블이 너무 비싸서 돈 좀 아낀다고 제가 나왔습니다. 우리 등록금이 좀 더 비쌌으면 진행자도 같이 섭외했을 텐데…….”
“와하하.”
“농담이고요. 하하! 학교 축제의 주역은 누굽니까!”
“우리!”
“땡. 틀렸습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대답해 주세요. 벌써 상품 나갑니다. 상품.”
홍광영이 품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누가 봐도 문화상품권이었지만 다들 열심히 손을 들었다.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진행.
홍보뿐만 아니라 무대에도 소질이 있는 모습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와서 한 학생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무대에 있는 대형 스크린 덕분에 뒤에 앉아있는 사람도 다 볼 수 있었다.
“정답은?”
“이사장님?”
“에헤이~! 이거 내가 땡 하면 학교 짤리는 거 아니야?”
“아하하하!”
“뭐 틀렸습니다. 다음!”
홍광영이 여학생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강인 재단?”
“에헤이~ 이라믄 안 된다카이. 누구 매장시킬 일 있나! 다들 왜 이래! 정답 알잖아! 매년 우리를 부르는 말 있잖아. 이 사람들아!”
홍광영의 격한 반응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어린이집 애들도 뭔지 모르지만 홍광영의 반응이 웃긴지 배를 잡고 웃었다.
“광인!”
“네! 맞습니다. 여기 상품. 아이고. 시작부터 답 맞추게 하기 힘드네. 여러분! 모두 광인이 될 준비 되셨습니까!”
“네!!!”
“그럼 첫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국문과! 싱어송라이터이자 너튜버! 슈!!”
축제의 막이 열었다.
서수현이 소개에 부끄러운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며 나온다.
하나가 눈을 반짝였다.
“수혀니 언니다! 수혀니 언니!”
“오! 수혀니 누나다!”
“아아! 개굴!”
아이들이 신나게 손뼉을 쳤다.
음악이 흘러나온다.
서수현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깨끗한 목소리로 부르는 발라드.
그렇다고 축 처지는 슬픈 노래가 아니라 꽤 밝은 노래.
굉장히 쉽게 부르는 고음에 사람들이 감탄을 뱉었다.
“와. 음색 좋네?”
“너튜버에서 본 적 있는 듯.”
“난 처음 보는데. 유명한가?”
“우유 빛깔! 서수현!”
발라드에 이상한 응원이 섞여 있다.
하긴 너튜버라고 해도 전부 아는 건 아니다.
그저 관심 있는 사람만 알뿐.
“시하야. 수현이 노래 잘 부른다. 그치?”
“아아. 시하 아라. 개굴. 잘해.”
“하하.”
시하와 나는 이미 올라오는 영상을 봐서 서수현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벨과 함께한 방송에서 튼 노래 덕분에 서수현의 [슈] 채널은 떡상했다.
성장세를 볼 때 10만을 찍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댓글도 웃겼지.’
골 때리는 가사를 보고 들어왔는데 다른 자작곡은 왜 정상이냐는 반응.
그때부터 가끔 정신 나간 가사인 곡을 쓰는 것 갖지만 그냥 정상적인(?) 걸 불러도 꽤 인기가 많았다.
“형아. 시하도 노래.”
“응? 시하도 노래 부르고 싶어?”
“아아!”
“하하. 집에 가서 부르자.”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건 형아가 해 주기 힘들단다.
***
가끔 스케줄에 따라 연예인이 느리게 도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진행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홍광영이 물었다.
“지금 어디래? 오고 있대?”
“아. 그게. 10분은 걸릴 거 같다던데?”
“10분? 와. 겁나 오래 끌어야 하네. 샴블이 하고 나면 한 팀 있고 또…. 밴드가 있지?”
“어.”
“밴드는 세팅 때문에 무조건 마지막인데. 그렇다고 한 팀을 앞당길 수도 없고.”
“그렇지. 샴블 다음에 밴드로 마무리하면 분위기가 좀 그럴 수 있지. 세팅하느라 비어 있는 부분도 네가 채워야 하니까.”
“스읍. 뭐 어쩔 수 없지. 아껴뒀던 필살기를 쓰는 수밖에.”
“품에 있는 문상도 다 떨어졌지 않아?”
“밴드 세팅할 때 쓸 문상만 남았지. 뭐 문상이야 나중에 줘도 되는 것!”
“뭔 말이야?”
“아, 무대 끝났다. 회장. 나 올라간다?”
“어. 부탁해. 너의 말빨로 10분만 끌어줘!”
“오케이.”
홍광영이 무대에 올라섰다.
“네. 굉장히 열정적인 무대였습니다.”
뻔한 멘트를 한 번 던져 주었다.
이제 관객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으레 그렇듯이 고개를 끄덕일 뿐.
“제 말에 이제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아직 문상이 안 고프신가 봅니다.”
“와아아아악!”
“야이, 자낳괴들아!”
“와하하하하.”
“저희 광인대학교가. 아! 실수. 강인대학교가 문상에 미쳤지만 그래도. 그래도. 친절한 정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 동생들을 위해 문상을 주지 않겠습니까!”
“???”
다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모습.
“못 보신 사람도 있나 본대 오늘 어린이집에서 댄스 무대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 7명의 아이돌이 있었는데요. 우리 아이돌을 보기 전에 어린이집 아이돌부터 보지 않으실래요?”
“네에! 좋아요!”
“반응이 뜨겁네요.”
홍광영은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앞에 있는 애 중 한 명이라도 올라온다면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안 되면 하는 수 없는 거고.
“저도 보고 왔는데 7명 중에 황금 막내가 있다더라고요. 혹시 황금 막내분. 올라오실 수 있어요?”
카메라가 시하를 비춘다.
대형 스크린에 얼굴이 나오자 사람들이 귀엽다며 웅성거린다.
무대 아래 스텝이 시하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시하 노래해.”
“오! 황금 막내의 노래!”
“형아. 가치!”
“무려 옆에 있는 형아랑 같이하겠다는군요! 앞으로 모셔보겠습니다!”
시혁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무대 위로 올랐다.
그런데 뒤따라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나와 승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