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500)

181화

포스터가 완성된 후.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게시판에 붙이러 갔다.

이런 홍보 포스터는 아무렇게나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건물에 관리하는 학생회나 교직원에게 미리 말해 둬야 포스터를 치우지 않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이 미리 찾아가서 부탁했기 때문에 문제없다.

“먼저 후문에 붙일 사람!”

“저요! 저요!”

“하나요!”

“아아!”

다들 손을 번쩍 든다.

후문이라는 말을 잘 알지도 못할 게 분명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것은 알 수 있다.

정문과 후문.

모든 학생이 이 길을 통해서 들어온다.

포스터를 볼 수밖에 없으니 자리 선정이 좋다.

하지만 게시판에 관심이 없다면 잘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많이 지나간다고 해서 많이 보는 건 또 아니라는 소리.

“후후후. 어쩔 수 없군요.”

원장이 또 어떤 일을 꾸미나 싶어서 유다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 악당같이 생겼다.

“다들 알다시피 후문은 형, 누나들이 많이 지나가는 곳. 거기를 차지하는 게 손쉬울 수 없죠. 그렇다면 ‘승부’를 내는 수밖에!”

승부라는 말에 승준과 종수의 눈이 커졌다.

승부사의 기질이 둘 사이에 끌어 오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기왕 나온 거 아이들이 신나게 놀며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축제 준비 포스터를 붙이는 거 역시 쉽지 않은 경쟁으로 이루어내는 거니까!

“그럼 형, 누나들이 하는 게임을 한번 해볼까요? 이른바 눈치 게임! 순서대로 숫자를 말하면서 앉는 거예요. 물론 같은 숫자를 둘이 동시에 말하면 탈락!”

선생님의 설명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줄 알고 영상을 준비했다.

짧은 영상은 눈치 게임 하는 방법을 잘 보여 주었다.

아이들이 재밌겠다며 재잘거린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갑자기 시작되는 눈치 게임.

아이들 사이에 긴장감이 흐른다.

그 속에 시하만이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다.

‘형아는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

그때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먼저 하나! 하면서 앉았다.

그때 승준과 종수가 둘!을 외치면서 게임이 끝났다.

그렇게 남은 다섯 명.

아까와 같은 양상을 띠며 윤동과 은우가 탈락했다.

남은 사람은 이제 시하, 재휘, 하나.

“그럼 다시 시작!”

“하나!”

“둘!”

“아?”

시하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탈락했다.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시하야. 탈락이라도 셋을 외쳐야지.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어떡해.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하는 그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럼 재휘랑 하나는 가위바위보 해요.”

눈치 게임의 결말은 늘 가위바위보.

재휘는 묵. 하나는 보를 냈다.

“아싸! 이겼다! 하나가 이겼다!”

“하나. 잘해써~”

“고마어. 시하야.”

“역시 내 동생이야! 잘했어!”

“고마어. 오빠!”

종수가 분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그런 모습을 본 재휘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잘했어.”

“아, 아니야. 졌는데 뭘.”

“졌지만 잘 싸웠어.”

선생님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저기요. 애들아? 이거 팀 대결이 아니거든?

아무튼, 선생님으로서는 안심이 되었다.

후문에는 그나마 정상적인(?) 하나의 포스터가 붙게 되어서.

만약 윤동의 기괴한 키메라 인간이 붙여졌다면 조금 무서울지도 모른다.

“선생님. 하나 안 닿아~”

“아! 선생님이 올려줄게. 붙여보자.”

선생님이 하나를 들어서 게시판 가까이에 가게 했다.

깔끔히 붙여진 포스터.

다음은 인문대 쪽에 식당이다.

강의 시간이라서 학생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가 인기 코스다.

학식을 끊으려면 줄을 서게 되어 있다.

그리고 꼭 보는 것이 식단표 게시판.

오늘은 거기에 하나를 붙일 생각이었다.

“자! 여기는 어떤 밥이 있는지 확인하는 곳이에요. 여기에 붙이면 많은 학생이 보겠죠?”

“네!”

승준이 먼저 손을 들고 제안했다.

“선생님. 그럼 다시 한번 눈치 게임 해요. 이번에 잘할 수 있어요.”

“아아!”

시하가 옆에서 동조했다.

저기. 시하야. 넌 할 마음이 그렇게 없잖아?

또 넋 놓을 거 같지만 그래도 다시 하기로 했다.

하나가 말했다.

“헤헤. 난 구경해야지~”

눈치 게임은 구경도 꿀잼이었다.

윤동과 은우의 눈이 빛났다.

이 둘도 그렇게 의욕적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하나가 쉬는 것을 보며 할 마음이 무럭무럭 솟게 되었다.

“그럼 시작!”

이게 뭐라고 긴장감이 흐른다.

다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 임한다.

다들 입 모양과 몸의 움직임을 본다.

움찔.

다들 앉으려는 액션을 취하며 서로를 견제한다.

치열한 눈치 싸움.

그 속에서 한 마리의 나비처럼 여유로운 시하가 천천히 앉았다.

다들 알고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느리게 앉고 있었기 때문에!

꾸물꾸물.

“끙차. 하나.”

겨우 앉은 시하가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시하가 하나를 말하는 순간에 승준이 곧바로 외쳤다.

“둘!”

“둘!”

“야! 종수! 왜 따라 하냐고!”

“아니! 네가 따라 한 거지!”

“아, 진짜! 이번에 잘할 수 있었는데!”

“아놔. 시하. 그렇게 안 봤는데 눈치 게임 잘하네.”

갑자기 시하에게 불똥이 튀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시하는 그저 아무도 말하지 않길래 했을 뿐이다.

그 사정을 모르는 애들은 시하가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는 기술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럼 네 명 남았네. 시작!”

“하나!”

“하나!”

“아악!”

이번에 시하는 가만히 있어서 살았다.

그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했던 윤동도 함께 살았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나는 보를 낼 거야.”

“아?”

윤동은 먼저 심리 싸움을 걸었다.

시하가 이기려면 가위를 내야 한다.

그래. 시하는 가위를 낼 것이다. 아까 봤을 때부터 약간 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정직하게 가위를 내겠지.

시하는 사진 찍을 때 가위를 좋아한다.

그러니 나는 묵을 내자.

“아아. 시하. 묵. 묵.”

“묵을 낸다고?”

갑작스러운 묵 선언.

오히려 심리 싸움은 한 치의 앞을 모르게 되었다.

바위를 내면 지는데 바위를 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하는 묵을 내지 않겠지! 이건 거짓말이다. 남은 것은 가위와 보.

그렇다면 윤동이 내야 할 건 안전하게 가위다!

“간다. 가위바위보!”

“묵!”

“어억! 묵을 냈어!”

3살 이시하. 소신 있는 남자다.

심리 싸움의 승리는 이시하였다.

사실 시하는 그저 져주려고 묵을 낸다고 했을 뿐이지만 윤동은 심리 싸움에 말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착각이었지만.

“자. 시하가 이겼네?”

“아아.”

“그럼 여기에다가 붙일래?”

“아아!”

선생님이 시하를 들어서 포스터를 붙이게 했다.

예쁜 시하의 포스터가 정문에 걸리길 바랐지만 그건 선생님의 욕심이었다.

결국, 인문대 쪽 식당에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

“시하는 좋겠네. 이거면 형아가 잘 볼 수 있겠어.”

“아? 형아?”

“응. 형아가 이쪽 식당에서 밥 먹을걸?”

“아아! 형아!”

“그러니까 오늘 포스터 여기 붙인 건 비밀이다? 알았지?”

“아아! 비밀! 쉿!”

시하가 검지를 입에 붙였다.

선생님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시하는 오늘 비밀을 잘 지킬 수 있을까?

“자, 그럼 다들 다음으로 갈까요?”

그렇게 선생님은 애들과 게임을 하면서 대학교 길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대학교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아이들이 익숙한 공간을 찾아갈 수 있게.

다 계획된 교육이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따라 시하가 조용하다.

뒷좌석에 앉아서 재잘재잘 떠드는 게 일상인데 그러지 않으니.

매끄럽게 굴러가는 풍경에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다.

시하의 포스터는 완성됐을까?

색연필을 들고 다닌 지 3일.

이 정도면 완성되고도 남는다.

“시하야. 포스터 완성됐어?”

“시하. 다 그려써.”

“그래? 우와. 어딨어? 어린이집에는 없는 것 같은데?”

“비밀.”

“오…. 형아에게 비밀이야?”

“시하. 짜잔 해. 형아. 으악 해.”

“형아 놀라게 하고 싶은가 보네.”

“아아. 시하. 짜잔해.”

“그래. 그래. 시하가 짜잔 하는구나. 근데 힌트만 주면 안 돼? 어디에다 뒀어? 아니면 뭘 그렸어?”

“시하 춤. 그려써.”

“오!”

이거, 이거. 조금만 더 찔러보면 시하에게서 힌트를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형아가 어디 가서 보면 돼?”

“비밀!”

“그으래? 그럼 형아가 축제 때 뭐 하는 알려주려고 했는데 비밀로 해야겠다.”

“왜?”

“시하도 비밀이니까.”

“아냐. 시하 비밀. 금방 비밀. 형아. 비밀. 많이 비밀.”

시하어를 해석해 보자면 금방 밝혀질 비밀이라는 뜻이겠지.

내 비밀은 잘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라는 뜻이고.

“그러면 이렇게 하자. 시하야. 형아가 힌트 하나 줄게. 그럼 시하도 힌트 하나 주라.”

“아아.”

후후후. 걸려들었다.

어린아이의 힌트란 꽤 쉬운 편에 속하지 않겠냐고.

이리 꼬고 저리 꼬는 건 어른들이 내는 시험문제뿐이다.

시하라면 금방 다 들킬 거다.

“형아?”

“음. 형아의 힌트는 소떡소떡이야.”

“소떡소떡! 아아!”

“하하. 시하야. 전에 먹어봤었지?”

“시하 아라. 형아. 소떡소떡 해?”

“글쎄?”

“아냐. 형아. 소떡소떡. 아냐. 형아. 아야 안 해.”

아무래도 시하는 내가 소떡소떡이 되는 줄 아는 가보다.

아무리 그대로 꼬챙이에 찔리는 건 너무 잔인한 상상 아니야?

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니 진짜로 그런 상상을 하나 보다.

‘형아가 소떡소떡이 되어 버렸어….’라고.

“형아가 소떡소떡이 되는 게 아니라 소떡소떡을 파는 거야.”

“아아! 시하 아라. 아라. 형아. 파라.”

“응. 그래. 형아는 다 알려줬네?”

소떡소떡의 ‘소’가 소고기인 건 말하지 않았다.

나도 깜짝 서프라이즈가 있어야지.

후후후. 이렇게 다 알려줬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시하도 다 알려주겠지?

아직 형아에게 안 된다.

“시하도 다 알려줄 거지?”

“아아. 시하. 그림. 벽. 파박. 해써.”

“그, 그렇구나.”

“밥 머거. 거기 파박 해써.”

“으응?”

“페페. 해써. 페페.”

밥 먹는 페페를 그렸구나.

밥 먹으면서 춤을 추는 건가?

밥 먹는 게 신나는 거지. 그런 그림을 그렸나 보다.

그런데 포스터는 어디에 놓았다는 거지?

“음. 그렇구나. 또 다른 말은 없어?”

“시하. 다 말해써~”

“다 말했구나? 흠.”

어찌 된 게 어딨는지 더 모르겠다.

뭐, 금방 발견하게 되겠지.

포스터니까 대충 학교 안에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도 역시 포스터에 페페를 그렸구나.

페페 그려진 것만 찾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이런 게 있을 때마다 강인대학교 게시판에 주르륵 올라오게 되어 있다.

학생회들이 이런 걸 잘한다.

어떻게든 우리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고 다양한 재미가 있다는 걸 어필하는 거니까.

“형아가 꼭 볼게.”

“아아.”

그렇게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차에 내려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 앞에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딱 맞춰서 왔네요?”

“알리사? 여긴 어쩐 일이에요?”

“당연히 이걸 전해 주려고 왔죠. 바로 시하페페 와이패드 가방!”

“와! 그거 완성됐어요?”

“네. 그냥 캐릭터만 넣으면 되는 작업이니까요. 시하야 어때? 마음에 들어?”

“아아! 페페!”

시하가 패드 가방을 받아서 품에 꼬옥 안았다.

역시 페페는 시하에게 소중한 그림이다.

“제가 보내준 최신 그림이네요?”

“3개 정도 받았는데 저게 제일 잘 팔릴 것 같더라고요.”

“저 페페가요?”

하체는 한쪽 다리를 들고 있고 상체는 왈츠를 추는 자세다.

시하가 추는 웃긴 춤 모습을 한 페페.

실제로는 움직이는 이모티콘으로 만든 건데 그중 한 장면이 저 모습이다.

“위에 ‘신난당!’ 글자도 박았어요. 이거만 한 게 없을 거 같아서.”

“오오. 그렇네요. 그런데 많이 팔린다는 건 무슨 소리죠?”

“강인대학교 축제가 다가오잖아요. 거기서 한번 팔아보게요.”

“어? 이벤트로 하는 게 아니라요?”

“거기서 반응을 좀 보는 거죠. 개별 판매해도 문제없는지. 부모님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살지 확인해 보자는 차원에서요.”

“일이 너무 커지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미 학교에 캐릭터 사업과 콜라보로 해볼 거라고 계획서도 제출했거든요. 인기가 커지면 옷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고. 일단 잠옷 같은 거로? 미리미리 이렇게 캐릭터 선점하는 거예요. 저희가 알렸으니 독점 달라고.”

“하하. 그 공은 기억해 둘게요.”

뭐 어떻게든 팔리면 좋은 거 아니겠나.

이러면 축제가 상당히 재밌어질 것 같다.

“그럼. 저는 갈게요. 시하야. 바이바이.”

“아아. 리사. 고마어. 바이바이.”

“조심히 가요.”

그렇게 알리사가 떠나고 우리는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시하의 그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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