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500)

178화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백동환과 헤어졌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5시였고 알리사에게 부탁도 있어서 연락을 해 보았다.

“어! 여보세요.”

「네. 시혁 씨.」

“혹시 저녁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어요. 지금 파랑몰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네요.」

“일요일인데 출근해서 일하는 거예요?”

「네. 평소에는 학교 끝나면 미리 포장도 하고 그러니까 과제랑 새 작업할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주말은 냅다 반납하고 있죠.」

“그러다 번아웃 오는 거 아니에요? 쉬엄쉬엄해요.”

알리사를 보면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다.

하긴 한창 바쁠 때였고 학업과 병행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도 학업, 일, 육아를 하니까.

하지만 학업 시간을 줄이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시하야 어린이집에 가니까.

알리사가 전화기 너머로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나, 이거 뭔지 알아요!」

“갑자기?!”

「사돈 남 말 하시고 있네!」

“하하하.”

「이때 쓰는 표현 맞죠?」

“네. 저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긴 하죠. 하하하. 그럼 제가 파랑몰 쪽으로 갈까요? 같이 저녁 먹어요.”

「그래요. 그럼. 시하 좋아하는 거로 먹죠.」

“알겠어요. 그럼 제가 근처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시하를 보았다.

어느새 펭귄 캐리어에 있는 짐을 이것저것 꺼내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

이걸 정리하려면 또 세월아 네월아 걸리겠지.

“시하야. 정리 중이야?”

“형아. 시하 정리. 장난감 해써.”

“응. 장난감 박스에 넣어둬야 해. 알지?”

“시하 아라.”

그래. 알겠지. 근데 왜 정리하기 전에 이렇게 다 꺼내놓을까?

캐리어에서 꺼내서 바로 장난감 상자에 넣으면 안 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시하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열심히 장난감을 꺼냈다.

“시하야. 정리는 나중에 하고 알리사랑 밥 먹자. 페페 가방도 부탁해야지.”

“아아! 리사!”

“그래. 팝업북도 어떻게 됐는지 물어볼 겸. 어때? 좋지?”

“아아.”

시하가 패드 가방과 하마 초콜릿을 하나 들고 현관으로 나갔다.

정리하는 것보다 페페가 더 중요한가 보다.

어질러진 바닥에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걸 치우겠지? 음. 나중의 나에게 맡기자.

시하도 열심히 도와줄 거다.

그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는 제쳐두기로 하자.

마음이 중요한 거지. 마음이!

“그럼 갈까?”

“아아. 시하 차!”

“하하. 시하 차 잘 있는지도 봐야지.”

밖으로 나가자 시하가 빨간 차를 향해 달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시하 차는 잘 주차되어 있었다.

“아아. 다녀. 와써. 잘 이써서?”

차 문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말하는 게 너무 귀엽다.

누가 보면 애완동물인 줄 알겠다.

“자. 시하 회장님. 뒷좌석에 타시죠.”

“아아.”

내가 문을 열자 뒤로 쏙 들어간다.

안전벨트를 메주고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출발했다.

“시하야. 뭐 먹고 싶어?”

“형아. 머 먹어?”

“형아가 물어봤잖아. 음. 고민되지?”

시하가 고민되는지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하긴 저녁 메뉴 고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한국에 오랜만에 왔으니 한식을 먹어야겠다. 역시 한국은 밥심이지.

“시하야. 고등어구이 어때?”

“아냐. 시하 고기 머거.”

“아. 그래? 그럼 고기 먹자.”

한국은 역시 고기지! 고기가 최고다.

시하는 벌써 그걸 알고 있나 보다.

“그럼 떡갈비 먹을까? 떡갈비?”

“떡?”

“아니. 떡이 아니라 갈비야.”

“떡국!”

“떡국의 떡이 맞아. 근데 떡국은 안 나와. 떡갈비 먹으러 가자.”

“아아.”

그렇게 우리는 알리사를 만나 떡갈비 집으로 향했다.

***

오랜만에 만난 알리사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일이 바쁘면 이렇게 될 수 있는가 보다.

“알리사.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요?”

“어제 작업하느라 밤을 새웠더니.”

“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자면 새벽에 일어날 테니 버텨야죠.”

“그건 그렇죠. 오늘 떡갈비 많이 먹어요. 볼이 쏙 들어가셨네.”

시하도 알리사가 걱정되는지 얼굴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리사. 개차나?”

“응. 괜찮아.”

“리사. 병언 가. 병언.”

“병원 갈 정도는 아닌데? 푹 자면 괜찮아질 거야.”

“리사. 점비야. 점비.”

“그, 그 정도의 얼굴이라고?!”

“아아. 점비. 대학언생이야. 점비.”

우리 시하 기억력도 좋구나?

너무 슬픈 이야기니 여기까지 하자.

밑반찬이 나오는 동안 알리사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알리사. 시하 팝업북은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건 사이트에 이벤트로 걸어뒀었죠. 미리 신청을 받았는데 벌써 선착순으로 끝났어요. 이미 다 없어요.”

“와. 그럼 그게 다 나간 거예요?”

“그렇다니까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바빴죠. 옷도 인기 있어서 주문도 많았고. 문제는…….”

“문제가 있어요?”

알리사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체 뭘까?

“또 팝업북으로 이벤트 안 하냐고 난리 났어요. 그런데 없는 걸 어떡하냐고요.”

“의외로 인기가 있었네요?”

“그러니까요. 그냥 이벤트 형식으로 한 것뿐인데 선착순에 못 든 사람들이 댓글로 난리 났다니까요.”

이건 좀 의외였다.

사실 그렇게 인기 있을 줄 몰랐으니까.

그래도 잘됐으면 됐지. 뭐.

“혹시 또 증쇄할 생각은 없죠?”

“증쇄할 생각은 없어요. 이거 파는 데도 힘들었는데 그걸 또 어떻게 해요.”

“2판 증쇄부터는 좀 더 싸지 않아요?”

“그건 그런데 굳이? 라는 생각이라. 막 천 명이 산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그래요.”

“그래도 다음에 버전2로 낼 수도 있는 거고.”

“그럴 때는 부디 저에게.”

“하하하. 알리사 영업사원 다 됐네요.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사실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데 부탁하기 좀 그랬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알리사가 괜찮다고 어서 재촉했다.

“음. 사실 와이패드 하고 가방을 받았거든요. 시하가 들고 다니는 가방 있죠?”

“네. 있네요. 품에 안고 있길래 뭔가 싶었는데 패드였나 보네요?”

“이 가방 말고 다른 가방을 사서 거기에 페페 캐릭터를 넣었으면 좋겠다고 싶어서요. 시하가 그걸 바라서.”

“와! 좋은 생각인데요? 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때마침 떡갈비가 나왔다.

나는 그걸 잘라서 시하의 입에 쏘옥 넣어주었다.

오물오물.

맛있는지 다리를 파닥거렸다.

“마시써.”

“엄청 맛있지? 이 집 맛있는 데래.”

“아아. 리사. 머거. 마시써.”

“응. 시하야. 먹을게.”

“아아. 이거. 이거 머거.”

시하가 하마 초콜릿을 알리사에게 스윽 밀었다.

“이거 뭐야?”

“리사 선물.”

내가 싱가포르에 간 기념품 선물이라고 말했다.

알리사가 고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잠시.

떡갈비를 먹으면서 알리사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가 떡갈비를 목 뒤로 넘겼을 때.

“아! 혹시 패드 가방 팔아 볼래요? 이벤트 2탄으로 만들어서.”

“네? 패드 가방이요?”

“네. 사실 태블릿PC를 요즘 엄마들이 많이 들고 다니거든요. 귀여운 가방도 많이 팔릴 거예요.”

“하하. 설마.”

“일단 이번에 한 것처럼 선착순 이벤트를 한 다음에 반응 보고 판매하는 방향으로. 어때요?”

“뭐, 괜찮은데요? 그런데 그럴 거면 굳이 시하 캐릭터로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시하 캐릭터로 해야지. K사에서 출시되는 이모티콘 전부 굿즈 사업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이미 거기랑 말이 끝났기도 하고.”

“아, 그래요?”

“네. 저기 시하야.”

알리사가 반짝이는 눈으로 시하를 보았다.

시하는 떡갈비에 정신 팔려서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아.”

“마음에 드는 페페 그림 그려서 나에게 보내줘. 알았지?”

“아아. 페페.”

“그거 보내주면 내가 가방에 새겨줄게.”

“페페. 고기 머거.”

어쩌면 고기 먹는 페페를 그릴지도 모르겠다.

뭔가 이야기하다 보니까 일이 커진 느낌이다.

이 느낌. 아주 익숙한데?

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되면 나도 좋지 뭐.

“시하페페 작가 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겠네요.”

“그럼요. 그런데 이모티콘은 또 안내요?”

“시하가 그림 다 그리면요. 이번에는 움직이는 임티로.”

“와! 움직이는 임티! 시하가 그런 것도 그릴 줄 알아요?”

“아, 네. 뭐.”

그때 시, 그림 발표 대회 이후로 움직이는 캐릭터를 누가 그렸는지 아는 사람은 몇 없긴 했다.

하긴 본 사람만 믿지,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거다.

“그러면 거기에 맞춰서 물량 준비하면 되겠네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데요? 출시가 언제 될지도 모르고.”

“저희도 물량이 언제 준비될지 몰라요. 수제 작업할 거라서.”

“가방을요?”

“그래야 원가가 싸죠. 어차피 한정판으로 제작할 거니까 문제없어요.”

“음. 옷 만드는 데 바쁜 거 아닌가?”

“옷이야 공장에서 만드는데요. 뭘. 저희야 바쁜 건 디자인뿐이니까.”

“직원 더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

입에 밥을 넣으며 물어보았다.

알리사가 눈을 피했다.

“일단 뽑긴 해야죠. 일이 요새 많아서.”

“그럴 줄 알았어요.”

초기 멤버들이 잘되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그때 가람 반도체 직원에게 문자가 왔다.

[계약서 특약에 적힌 금액인 5천만 원은 이달 25일에 함께 통장에 넣어드리겠습니다. 그 점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알리사.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실컷 먹어요. 오늘은 알리사 식성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떡갈비 4인분 시켰는데 너무 적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2인분을 처리해 놓고서는 모자라다니…….

“형아. 시하도!”

“응? 시하도 더 먹고 싶어?”

“아아. 마시써.”

역시 잘 먹는 사람이랑 같이 먹으면 잘 먹게 되나 보다.

“사이다도 각자 하나씩 시키죠.”

“와! 오늘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그만큼 돈 벌었어요.”

오늘은 떡갈비와 사이다 플렉스다.

우리는 오랜만에 전투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

다음 날.

시하는 펭귄 가방에 과자를 잔뜩 넣고 있었다.

어제 청소 전쟁을 치르고도 바닥에 과자가 널브러져 있다.

낑낑대며 하마 초콜릿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들어가지 않아서 나를 불렀다.

“형아~”

“응. 시하야. 왜? 안 들어가?”

“아아. 선물.”

“선물 안 들어가면 따로 봉투에 담자니까.”

“아냐. 짜잔. 해. 시하 짜잔. 해.”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는 건 좋은데 펭귄이 몸에 다 안 들어가니 어쩔 수 없잖아.”

시하가 그 말에 골똘히 생각하더니 과자 네 개를 넣고 지퍼를 닫았다.

그래도 네 개는 들어가서 다행이네.

“나머지는 봉투에 담자. 알았지?”

“아아.”

그렇게 종이봉투에 담고 우리는 집을 나섰다.

먼저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들릴 곳이 있었다.

바로 문도환에게.

“문도!”

시하가 도도도 달려가서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본 게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

문도환도 시하를 보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어. 그래. 어서 와. 시하야.”

“문도 선물!”

“응? 선물? 난 선물 준비 안 했는데?”

“아냐. 시하. 문도. 선물 져.”

“시하가 나한테?”

“아아.”

시하가 가방에서 하마 초콜릿을 꺼내서 주었다.

문도환이 감동한 표정으로 시하를 보았다.

“형. 싱가포르 갔다 와서 시하가 산 거야.”

“이야. 감동인데?”

“저거 시하가 번 돈으로 산 거니까 소중히 먹어.”

“진짜 그래야겠다. 시하야. 고마워.”

“아아. 고마어~”

“아니. 네가 왜 고마워라고 해?”

그러게 말이다. 이럴 때면 웃긴다니까.

문도환이 너무 궁금한지 초콜릿을 뜯었다.

“오. 맛있겠다.”

입에 쏙 넣는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무래도 시하에게 보여주는 표정이겠지.

“문도 마시써?”

“정말 맛있는데?”

그렇게 과장되게 표현되는 순간 안에 있는 직원들이 문도환의 초콜릿을 하나씩 뺏어갔다.

“잘 먹을게요!”

“도환 씨. 잘 먹을게.”

“어머. 시하가 정말 잘 골랐네.”

“이 초콜릿 정말 달아요.”

문도환이 황당해하며 직원들을 보았다.

“아니. 왜 가져가!”

그 말에 시하가 말했다.

“문도. 친구. 나너 머거야지!”

어린이집 선생님이 할 법한 말이었다.

거기서 배웠나?

문도환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형이 잘못했네.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지.”

아무튼, 문도. 아니 문도환이 잘못했다.

암! 그렇고말고.

문도환을 보니 이제야 정말 한국에 돌아온 실감이 났다.

“시하야. 어린이집 애들에게 초콜릿 주러 가야지.”

“아아.”

억울해하는 문도환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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