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유리벽 밖의 찐 더위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아스팔트 위로 검은 타르들이 신발에 붙기 전인 새벽.
마라토너들이 도로를 뛰고 있고 그에 발을 맞추듯이 열대새들이 울음소리로 싱가포르의 아침을 알린다.
그래. 싱가포르의 숨 쉬는 아침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울음소리 대신 하나의 노래로 나는 눈을 뜨고 있었으니.
[마리아가 말이야.]
고놈의 마리아인지, 말인지 이상한 노래가 내 눈을 두들긴다. 일어나라고.
어제 노래를 꺼놓는 걸 잊어먹고 켜놓고 잤다.
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아서 은은하게 들리… 기는 개뿔.
싱가포르의 멋진 아침을 느끼기보다는 반복되는 가사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일단 부스스 일어나며 노래를 껐다.
“코오-”
옆에서 시하의 숨소리가 들렸다.
신나게 놀았는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경.
밖을 나가기 좋은 날씨다. 이른 아침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여름이 찾아오겠지.
그래도 한국 여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 정도는 괜찮다.
“흠.”
오늘 일정은 신나게 논 다음에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돌아다니는 곳은 시하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나야 뭐 시하랑 함께라면 아무 데나 다 좋다.
“형아?”
“응. 깼어?”
시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머리 한쪽에 새집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게 참 귀여웠다.
“형아. 마리아. 열 번. 열 번.”
“오! 마리아가 열 번 나왔어?”
“아아.”
일어나자마자 정답을 맞히려고 하는 시하 어린이.
전혀 생각도 못 했다.
근데 진짜 정답은 뭐지? 정확히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시하야. 이제 씻고 아침 먹고 나서 식물 보러 갈 거야.”
“식물?”
“응. 초록초록한 나무 보러 가자. 엄청 커서 시하도 마음에 들걸?”
“엄청 커?”
“어. 엄청 커다란 거 보러 갈 거야.”
아이들이 엄청 큰 거 좋아하긴 하지.
우리가 처음 갈 곳은 바로 클라우드 포레스트와 플라워 돔이다.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고 인터넷에서 봤다.
심지어 호텔과 가깝기도 했고.
“거기에 바오밥 나무도 있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
“아? 왕자?”
“아. 이건 아직 안 읽었나?”
시하가 눈을 반짝였다.
침대에서 내려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형아. 책! 책!”
“아하하하. 책 읽어 달라고?”
“아아.”
“아니. 여행 와서 책 읽는 건 조큼.”
“아냐. 재미써.”
“그래. 바오밥 나무가 뭔지만 알기 위해 잠깐 읽어줄게.”
“아아.”
다행히 바오밥 나무는 초반에 나오니까.
시하를 안아 다시 침대에 들어갔다.
폰을 켜서 어린 왕자 그림을 펼쳤다. 요즘 아이들에게 맞게 구연동화로 잘 나온다.
“어린 왕자는 작은 별에 살았습니다. 거기서 바오밥 나무의 뿌리를 뽑는 일을 했어요.”
시하가 ‘왜?’라고 물어보았다.
“왜냐면 바로 다음 그림에 나와. 바오밥 나무가 이렇게 커서 매일 뽑아주지 않으면 별이 잡아먹히거든. 엄청 크지?”
“아아. 커!”
“하지만 레드 장미가 별에 생겨서 바오밥 나무들을 두들겨 팼어요. 응? 이거 이야기가 왜 이래? 이래서 블로거 같은 곳에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아아! 형아! 레드 장미!”
시하가 레드 장미에 꽂혔다.
원작과 다른 레드 장미의 등장에 당황스럽다.
아니. 장미가 나오긴 하는데 바오밥 나무들을 패지는 않거든?
이상한 블로거 들어갔다가 곤욕이었다.
이름이 강인한 블로그? 어디서 들어온 이름인데?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시하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음. 이거 말고 딴 거 읽을까?”
“아냐.”
“알겠어. 그렇게 둘이 살게 됐는데 언젠가 크게 한 번 다투었어. 어린 왕자는 화가 나서 여행을 떠났지. UFO 왕복 3박 4일 코스. 이거 왜 이래?”
“아아. 형아.”
“응. 알았어. 그렇게 어린 왕자는 별을 여행하면서 여러 장미를 보았어. 하지만 레드 장미보다는 특별하지 않았어. 이미 레드 장미는 어린 왕자의 친구였으니까.”
“친구!”
“그렇게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돌아왔어. 하지만 거기에는 레드 장미가 없었어. 편지 하나만 두고.”
“왜?”
“글쎄? 왜 그럴까? 다음을 읽어보자.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어. FA 시장이 열려서 다른 별로 감. 나중에 음성채팅 하자. 음성채팅 앱 [레드 페어링].”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밑에는 음성채팅 앱 다운로드 링크가 있었다.
잠깐만. 이거 다 광고를 위한 이야기였다고?
에이씨. 요즘 블로그도 이런 식으로 협찬받아?
“형아?”
“어? 응.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네. 아무튼, 바오밥 나무가 엄청 큰 건 알겠지?”
“아아! 레드 세다!”
“하하하. 레드는 역시 세지. 다쳐도 부활도 하고. 아무튼, 우리는 바오밥 나무를 보러 갈 거야. 거기 바오밥 나무가 있거든.”
“아? 아아!”
시하가 내 품에서 벗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도도도 달려가더니 의자에 있는 빨간 모자를 집었다.
“형아. 시하 레드.”
시하가 싱가포르 모자를 쏙 썼다.
아무래도 레드로 변신한 모양.
모자가 큰지 얼굴을 다 가리고 있다.
“시하. 세. 시하 밥 나무 이겨.”
“밥 나무가 아니라 바오밥이야.”
“아아. 밥 나무.”
“일단 모자 길이부터 줄이자. 대충 작게 하면 들어갈지도 몰라.”
오늘은 시하가 레드다.
***
백동환과 시하와 함께 호텔을 나왔다.
안과 다르게 찌는 더위에 시하가 놀라며 다시 들어갔다.
“시하야. 나와야 해.”
“아냐. 시하 이따가~”
“푸흡.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어서 와. 그럴 줄 알고 택시 불렀어.”
“아아.”
그제야 시하가 내게 다가왔다.
정말 더운지 호텔의 유리창을 보며 얍얍 손을 뻗었다.
마치 창을 깨서 시원한 공기가 자신에게 오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깨져도 시원하지 않아. 뭐, 처음에는 시원할지도 모르겠다.”
“안 시언해?”
“응. 안 시원해.”
“왜?”
“음. 여기가 너무 더워서 차가운 바람이 금방 따뜻하게 되거든.”
“시하. 레드야.”
“레드도 더운 건 못 참지.”
그 말에 시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의 레드가 그럴 리가 없어…. 라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달린 빨간 모자를 힐끗 보았다.
머리에 씌워 주려고 했는데 줄여도 시하 머리에는 컸다.
그래서 시하의 허리에 매달아 주었다.
한쪽 엉덩이에 들썩들썩 모자가 흔들린다.
“어? 택시 왔다. 가자.”
“아아.”
사실 30분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지만 너무 더워하는 시하를 위해 택시를 불렀다.
그래도 여긴 그나마 싸서 다행이다.
“형님. 타시죠.”
백동환이 뒷자리에 문을 열었다.
반팔 셔츠를 입어서인지 근육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고마워. 그러니까 진짜 경호원 같다.”
“하하하. 오늘은 제가 두 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그거참 고맙네.”
그렇게 택시를 타고 곧장 클라우드 포레스트에 도착했다.
우리는 내려서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인공폭포가 보였다.
초록색 식물들과 어우러진 멋진 폭포.
엄청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형아! 저거 모야?”
“폭포야. 폭포.”
“포포?”
“포포가 아니라 폭포. 물이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아아. 물 떨어져~”
시하가 신이 나는지 한참을 폭포를 보다가 움직였다.
나 역시도 폭포를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그렇게 기이하게 생긴 초록색 행렬들을 지나며 발견한 바오밥 나무.
“시하야. 저거 엄청 크지? 저게 바오밥 나무야.”
“아? 밥 나무! 시하 형아 지켜!”
시하가 엉덩이에 있는 빨간 모자를 꼭 잡았다.
나는 어떻게 지켜줄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시하야. 어떻게 지켜줄 건데?”
“시하 레드야. 싸어.”
“오! 시하 싸움 잘해?”
“아냐. 시하 모태.”
이런 건 또 솔직하다.
시하가 싸움을 못 하긴 하지. 어디 가서 싸워 보질 못했으니.
“그럼 어떻게 지켜줄 건데?”
“시하. 레드야. 시하 공격해. 해써. 백동 가서 싸어.”
“아. 동환아. 시하가 너보고 싸우라는데?”
“예?”
시하는 천재다.
지휘관이란 전장에서 앞장서지 않는 법이지.
근육 빵빵한 네가 대신 싸워라. 동환아.
백동환이 시하의 말에 맞춰 준다고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어때? 나 잘 싸우지?”
“백동. 밥 나무 커. 백동 져.”
“…….”
그렇지. 아무리 싸움이라도 체격에서 밀리면 불리하다.
저 바오밥 나무는 정말 커서 아무리 백동환이라도 지는 게 당연했다.
시하 천재인데? 벌써 피지컬에 대해서 아는 건가?
“형아. 도망. 시하랑.”
“하하. 동환아 우리 도망갈 시간 벌어.”
백동환이 서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시하야. 너무한 거 아니야?”
“개차나. 개차나.”
“내가 안 괜찮은데?”
우리는 그렇게 농담도 하며 나무들과 식물들을 관찰했다.
유리 돔으로 되어있는 이곳은 정말 쾌적했고 녹색 잎이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싱가포르 관광은 이 유리벽 안에서는 즐겁다.
물론 날씨에 익숙해진다면 밖도 나쁘지 않다.
뜨거운 오후를 피하고 밤이나 새벽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시하야. 이제 플라워 돔이래.”
“아아. 플라어? 모야?”
“꽃이라는 뜻이야. 저기 위에 유리벽이 둥글게 되어 있지? 마치 만화에 나오는 보호막처럼. 그게 돔이라는 거야.”
“아아. 돔.”
플라워 돔은 정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기자기한 구성부터 집들도 동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특히 풍차도 있었는데 사진을 부르게 생겼다.
그렇게 우리는 신나게 추억을 쌓았고 점심을 먹었다.
***
오후.
이번에도 시하를 위한 코스였다.
아트사이언스 뮤지엄.
다양한 테크놀로지 기법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한다.
디지털아트라는 예술이 눈을 즐겁게 했다.
미끄럼틀에 과일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이들이 내려와서 그림을 지나가면 톡톡 터졌다.
과즙미 팡팡! 이런 느낌일까?
“아아! 형아!”
시하가 굉장히 좋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굵은 빨대 크기의 유리가 하늘에서 땅까지 대롱대롱 달려 있다.
거기에 중간중간에 빛이 나니 마치 은하수를 걷는 것 같았다.
황홀한 불빛에 시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느새 끝이 다가오니 시무룩해졌다.
뒤를 돌아가려고 해서 내가 막았다.
“시하야. 저기 봐.”
신기한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
커다란 화면 앞에 책상이 있었는데 그 위에 패드들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거기에 뭔가를 그렸다.
“오. 시하야. 여기서 그린 그림이 저 커다란 화면에 들어가나 봐.”
“아?”
아이들의 여러 그림이 화면에 들어가 움직였다.
아무래도 여기서 그림을 그려서 파일을 보내면 화면에 띄워주는 모양.
이러면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지.
“시하도 해 볼래?”
“아아!”
시하가 자리에 앉았다.
역시 시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
“형님. 뭔가 조건이 영어로 있는데요? 이거 이벤트 같네요.”
“그러게. 이거 그림 보낼 때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하네. 한 아이당 하나의 그림이라.”
“추첨을 통해 패드를 준다고 하네요. 오! 오늘까지인데요? 나도 옆에서 그려서 참가해야겠습니다.”
“난 시하 그림을 보낼래.”
“형님이라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디 보자. 뭘 그리나?”
백동환이 시하 옆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린다.
시하 역시도 앉아서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랐는지 팬을 잡는다.
저렇게 각 잡고 안 그려도 될 텐데.
“아아. 형아. 밥 나무.”
“바오밥 나무 그릴 거야?”
“아아.”
시하의 손이 거침없이 나무를 그렸다.
그런데 SD 캐릭터로 그려졌다.
갈색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았고 그 끝은 잎이 듬성듬성 달려 있다.
굵은 허리를 자랑하고 손과 발을 그린다.
어떻게 보면 모 광고의 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 해써!”
“오! 어디 보자. 와. 진짜 잘 그렸네. 그런데 하나도 안 무섭고 귀여운데?”
“아? 아냐. 무셔.”
시하가 내 말에 수정 작업을 거쳤다.
어디서 배웠는지 바오밥 나무 캐릭터의 얼굴에는 십자 표시가 있었다.
왜 그 있잖은가. ‘빠직’ 화날 때 십자인 도로 만드는 거.
“푸흡. 화나면 무서운 거야?”
“아아. 무셔.”
하여간 정말 귀엽다.
“이거 패드 걸렸으면 좋겠다. 그치?”
“아아.”
“추첨에 당첨될 거야. 분명해.”
“아아! 패드!”
최신형 패드.
시하의 그림을 위해 꼭 당첨되었으면 한다.
그때였다.
툭. 누군가 내 어깨에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지나가다가 그럴 수 있죠.」
그렇게 지나쳐 가는데 그의 폰에 메모장이 띄워져 있는 게 보인다.
[패드 꼭 당첨***]
별 세 개까지 그린 걸 보니 저 사람도 꼭 당첨되고 싶나 보네.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메일을 적어 보냈다.
제발 당첨되어라. 나는 별 다섯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