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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화 (174/500)

174화

다니엘이 차에 타려고 하자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뒷좌석에 앉자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옆에 앉은 비서가 웃고 있는 다니엘을 힐끗 보았다.

“계약도 결국 원하는 대로 됐습니다. 이 정도는 예상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음. 그렇지. 뭐 돈을 적게 받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건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가격을 후려칠 줄 몰랐네. 그래도 말이야 날 상대로 그렇게 대담한 모습을 보이는 청년은 오랜만이야. 기대 이상이지.”

“그렇게 후려친 게 이시혁입니까?”

“그래. 장혁이 아들. 역시 그때 제대로 붙잡았어야 했는데. 애를 저리 잘 키울 줄 누가 알았겠나.”

다니엘은 자신의 자식이 생각나는지 혀를 찼다.

치열한 싱가포르 교육 환경에서 살아남아서 꿀리지는 않지만 언제나 자신 앞에서 주눅 드는 아들이었다.

저런 대담한 심장을 가졌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엄마의 성격을 꼭 빼닮았다.

가끔 자신의 모습이 불쑥불쑥 나온다지만 아직 멀었다.

“쩝. 아쉽구만.”

“아드님 옆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옆에서 저런 놈이 중심을 잡아주면 얼마나 좋나. 근데 아직은 아니야.”

“아직 말입니까?”

“지금이라도 충분하지만, 나중에 더 뛰어나 질 게 분명하네. 신중히 접근해야지.”

“마음이 변하셨네요.”

비서의 미소에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이장혁의 빚을 갚은 거로 도와준 거라면 지금은 밑에 두고 싶은 욕심이 솟았다.

전에 봤을 때는 덜 여문 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자란 호랑이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거야 시간이 지나면 채워질 터.

“고놈 이야기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다 마지막에 기겁했단 말이야. 1위 기업과 협약이라니. 그 수를 생각 못 했어.”

“그건 좀 식은땀이 났겠습니다.”

“어린놈인 줄 알았다가 한 방 먹었지. 앞에 사장도 마지막 말에 상당히 당황한 눈치던걸? 표정 관리하는 게 딱 보였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할 만한 내용인 거야. 그거 보고 이건 안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가격이 후려쳐진 겁니까?”

“뭐 그래도 분기마다 50억이면 누구 애 이름은 아니니까. 그렇게 손해 본 건 아니야.”

다니엘이 코를 실룩였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싶지만 그래도 한 방 제대로 먹은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원하는 건 얻었으니 서로 주고받았다고 하지.”

“하하. 부회장님 이러시는 거 오랜만에 봅니다.”

“뭐, 살다 보면 젊은 놈의 패기에 당할 때가 있지 않겠나.”

“그냥 패기가 아니라 너무 쓸 만한 패를 꺼냈죠.”

“그래. 수 싸움에서 한 발 졌다. 됐지? 여기 있는 동안 불편함 없게 해줘. 만약 경찰에 연루될 일 있으면 뒤 좀 봐주고. 뭐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그런 사건이 터질까 싶지만.”

“알겠습니다.”

“나중에 배웅할 때 티를 좀 내주고. 이런 건 티를 내야 마음에 부담도 지는 거야.”

“하하. 은근히 내겠습니다.”

차가 도로를 달린다.

싱가포르 거리 전체에 꾸며놓은 전구가 반짝인다.

영롱한 주홍 불빛이 아련한 추억을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빛을 내는 건 현재.

과거의 이장혁은 추억이 되고 현재 빛나는 태양은 이시혁이 되었다.

다니엘은 창밖의 불빛을 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났다고.

***

-이시혁이 회의를 하던 그 시각.

시하와 백동환은 호텔 침대에서 나란히 누워있었다.

백동환은 시하랑 어떻게 놀아줄지 고민하고 있었고, 시하는 시하대로 형아가 언제 올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있다가 시하가 고개를 돌렸다.

“아?”

“응? 왜? 뭔가 있어? 혹시 잠은 안 와?”

“시하. 비행기 자써.”

“그래. 비행기에서 한숨 자서 눈이 말똥말똥하구나?”

“아아. 형아. 기다려.”

“올 때까지 엄청 오래 걸릴 건데?”

“아냐. 기다려.”

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동환의 배에 올라탔다.

형아랑 얼마나 다른지 궁금증이 솟았다.

백동환이 그런 시하를 보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백동!”

“어때? 엄청나지?”

“아냐. 딱딱. 딱딱. 별로야. 별로.”

“아…. 그래?”

승차감이 별로였는지 시하가 금세 내렸다.

침대의 푹신한 느낌.

발을 폭폭 구르면서 뛰었다.

“백동. 푹신푹신.”

“그러게 정말 좋네. 잠이 온다.”

“띠어. 띠어.”

“여기서 내가 뛰면 침대 망가질 거야. 분명해.”

“아냐. 개차나. 시하 바써.”

“응? 뭘 봤는데?”

“코끼리. 코끼리. 띠어. 띠어. 침대 개차나.”

“아. 광고 봤구나?”

아무래도 시하는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광고를 본 듯했다.

침대 위를 코끼리가 뛰는 걸 봤겠지.

솔직히 실제로 코끼리가 뛰면 무사할지 알 수 없다.

“그런 걸 과장 광고라고 하는 거야.”

“가장? 아아! 홍 가장 아찌!”

“어…. 과장이 그 과장이 아닌데?”

백동환은 홍진수 과장이 나와서 시하도 우리 출판사에…. 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갑자기 웬 헛생각이……. 훠이. 훠이.

너무 뜬금없는 생각에 자신이 피곤하다고 느꼈다.

비행기 타면서 한숨 잤어야 했는데 괜히 영화 시리즈를 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하랑 뭐 하고 놀아줄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하야. 어디 구경 나갈래?”

“아냐. 시하 형아 기다려.”

“그럼 여기서 뭐 하고 놀래?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다 해줄게. 아, 아니다.”

백동환은 졸음을 쫓기 위해 나가고 싶었다.

어디 멀리 가지 않더라도 이 호텔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그럼 형아 올 때 맞춰서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할까?”

“선물?”

“응. 형아 왔을 때 맛있는 과자랑 선물 있으면 재밌을 거야.”

“아아. 백동! 잘해써!”

“하하하.”

백동환은 시하의 반응에 기분이 좋았다.

뭔가 칭찬받는 게 웃기긴 하지만 이대로 나갈 빌미를 만든 게 주요했다.

“그럼 나가볼까?”

“아아.”

시하와 백동환은 방을 나섰다.

호텔 지하로 같이 내려가자 쇼핑센터가 나왔다.

사람들이 붐비길래 백동환은 시하를 품에 안았다.

손잡고 가기에는 놓칠 것 같았으니까.

“백동. 딱딱.”

“부드럽지 않아서 미안해. 아니, 근데 시혁이 형님도 나처럼 근육 있잖아.”

“아냐. 형아 달라. 백동 달라.”

“뭐가 다르지? 크기 때문인가?”

“백동 커. 사커공이야. 사커공.”

“그 정도 근육이면 사람이 아니지 않나?”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 백동환이 시하와 쇼핑센터를 걸었다.

보통 길을 걸으면 부딪칠까 봐 서로 피해 주는 게 된다.

하지만 백동환은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다.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미리미리 피하고 있었으니까.

‘음. 싱가포르 사람들이랑 관광객들은 다들 친절하네. 애가 있어서 비켜주고.’

혹여나 피해가 갈까 봐 비키는 거지만 백동환은 몰랐다.

소매치기들도 박동환만큼은 그냥 보내줬다.

잘못해서 잡혔다가는 저 주먹에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

“백동. 저거. 저거.”

“응? 뭐?”

시하가 가리킨 곳은 여러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다.

그중 시하가 눈을 빛낸 건 [해피 히포 초콜릿].

하마 모양의 초콜릿이 시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거?”

“아아. 이거 시하 꺼.”

“형아 꺼 사러 온 거 아니었나?”

“시하 꺼. 형아 조아해.”

“시하가 고른 거면 형아가 좋아한다고?”

“아아.”

시하가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시하가 뭘 하든 시혁이 좋아한다.

백동환이 그 말에 멍하니 생각했다.

‘사실 나도 시혁이 형님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네.’

막상 나오기는 했는데 형님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황.

그렇다고 뭐 싱가포르에 관련된 책을 사는 것도 조금 그렇다.

“음. 시하야. 형님이 뭘 제일 좋아해? 갖고 싶은 거 말이야.”

“형아.”

“응. 그래. 형아.”

“시하 제일 조아~”

“쩝. 괜히 물어봤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걸 대체 뭐 하러 물어봤나 싶었다.

잠깐. 시하를 제일 좋아한다고?

백동환의 눈에 좋은 게 보였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그 물건을 골랐다.

이거라면 형님도 만족하시겠지.

그렇게 시하를 데리고 쇼핑을 마쳤다.

***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시하가 ‘형아!’라고 부르면서 내 품에 안겼다.

아직 안 자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하긴 비행기에서 많이 잤을 텐데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

나는 이상하게 비행기에서 자도 또 잠이 오더라.

“형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펑!

어디서 구했는지 생일 폭죽이 터졌다.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백동환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냐는 얼굴에 백동환이 대답하는 대신 시하의 어깨를 콕콕 두드렸다.

“아아! 형아!”

시하가 어딘가 도도도 달려가더니 하마 초콜릿을 내밀었다.

“머거. 형아. 머거. 시하 사써.”

“시하가 샀어?”

“마시써.”

상자가 뜯겨 있는 걸 보니 벌써 맛본 모양.

고맙다. 맛보고 챙겨줘서. 맛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형님. 저도 준비했습니다.”

“이게 무슨 생일 파티야?”

“수고했어 파티라고 해두죠. 사실 시하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하길래 이런 핑계라도 준비해서 나갔습니다.”

“아…….”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 만하다.

하여간 형아를 이렇게 기다리지 않고 관광을 즐겨도 되는데.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시하를 보니 같이 오길 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뭘 준비했는데?”

“바로 이겁니다!”

봉투에서 꺼낸 것은 바로 빨간 모자였다.

모자 가운데는 싱가포르라고 적혀 있었고 하얀 달과 별이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싱가포르 국기였다.

정말 나 싱가포르 왔어! 하는 느낌의 모자.

“시하가 좋아하는 빨간 차와 태양에게서 형님의 얼굴을 지켜줄 핫아이템. 고민 끝에 골랐습니다.”

“어, 그래.”

“반응이 왜 그러세요. 안 좋으세요?”

빨간 모자를 보니 묘하게 군대 생각이 난다.

조교들이 빨간 모자를 쓰고 얼차려를 시켰지. 나는 모자를 받아들고 한번 써 보았다.

“여기서 훈련소를 재현해봐?”

“아악! 형님!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십니까.”

“다 나 까. 잘 쓰네. 어디 이러라고 사 온 거 아니야?”

“노린 거 아닙니다. 진짜 아니에요.”

“요? 요오오오?!”

“아. 왜 그러십니까. PTSD 올 것 같아.”

“같아? 말이 짧네?”

“아…. 제가 잘 못 골랐네요.”

시하가 내 옆에서 백동환의 말을 거들었다.

“백동. 잘멋. 해찌?”

“아니. 시하 너도 좋다고 이 모자 골랐잖아?!”

“아냐. 시하 아냐.”

“오호. 시하 핑계를 대시겠다?”

“아, 형님. 저 진짜 억울합니다!”

“큭큭. 알아. 장난 좀 쳐본 거야. 근데 이 초콜릿 진짜 맛있겠다.”

“그거 저도 먹어봤는데 맛있더라고요.”

“너도 먹었냐?”

나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초콜릿의 풍미가 입안에 가득 찼다.

하마처럼 생긴 게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무튼, 고마워. 생각해 보니 모자를 안 들고 왔네.”

“오! 역시!”

“근데 시하 모자도 안 들고 왔는데 내일 돼서 하나 사야겠다.”

“그거라면 내일 자고 일어나서 하나 사시죠. 지하에 상가가 있으니.”

“아니면 좀 구경하다가 사도 되고.”

“하긴 그러면 되죠. 하아암.”

“많이 피곤한가 보네.”

“아, 비행기에서 못 자서요.”

“나는 좀 잤는데도 피곤해.”

그 말을 들은 시하가 놀란 얼굴을 했다.

“형아 자? 시하 안 노라?”

“하하. 좀 놀다 잘까?”

“아아!”

백동환의 간절한 시선이 느껴진다. 제발 좀 자자고.

하지만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을 한 시하를 그냥 놔둘 수는 없지.

그리고 다 방법이 있다.

저렇게 눈이 초롱초롱해 보여도 침대에 머리를 대면 그냥 잠들 거다.

여행의 여독은 풀리지 않는 법이니까.

“일단 욕실에 물 받아서 장난감들이랑 목욕 놀이를 하는 거야.”

시하의 눈이 커졌다.

가방에 장난감들과 함께 욕실에서 목욕 놀이!

꿈과 같은 상황이다.

백동환이 역시 형님! 이라는 감탄 어린 얼굴을 한다.

봐라. 이렇게 하면 목욕하면서 시하의 체력을 앗아갈 수 있다.

따뜻한 물에 노곤노곤해지는 이시하.

“그리고 침대에서 눈을 감고 노래를 트는 거야. 일종의 퀴즈니까 집중해서 들어야 해. 알았지?”

“아아.”

후후후.

이걸로 잠들 수 있는 모든 요소가 성립되었다.

따뜻해진 몸에 이불을 덮으면 게임 끝이지.

“동환아. 너 오늘 수고했어. 씻고 먼저 자.”

“크으! 역시 형님이십니다. 놀이도 정말.”

쩝. 저렇게 감탄할 줄이야.

나도 이렇게 생각한 내가 대단했다.

“자. 시하야. 가자.”

“아아.”

우리는 그렇게 목욕을 했다.

한 가지 생각 못 한 게 있다면 장난감을 닦고 치우는 건 내 몫이었다.

제길. 치우는 걸 생각 못 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누워서 [마리아가 말이야] 노래를 들었다.

[마리아가 말이야. 말이야. 마리아. 마리아가 나왔대~ 그런데 말이야. 마리아가 이렇게 마리아 하고 불렀는데 말이야. 마리아. 마리아. 대체 마리아가 몇 명인지 세워봐?]

[끝난 줄 알았지? 저기 말을 발견한 마리아. 말이야. 마리아. 말이야. 마리아가 말이야. 이게 뭔 말이야.]

대체 마리아가 몇 명인지 맞추는 노래.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래를 틀어놓고 시하와 함께 눈을 감았다.

옆에서 코오- 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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