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그런데 어쩐 일이야?”
내 말에 백동환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저런 얼굴을 할 정도의 말이었나?
“형님. 제가 뭐 일이 있어야 와야 하는 겁니까? 그냥 놀러 올 수도 있죠.”
“그건 그렇긴 한데. 너 요새 바쁜 거 아니었어?”
“요새 일도 다 마무리돼서 괜찮습니다. 아! 사실 제가 이번에 카메라를 샀습니다.”
“비싼 취미를 들였네.”
백동환이 자신의 카메라를 보여주었다.
렌즈가 끼워져 있어서 참으로 무거워 보였다.
아무래도 여기 온 이유는 이걸 자랑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요새 서울 풍경 찍는 게 취미입니다. 맑은 하늘을 볼 때면 꼭 찍고 싶더라고요. 그리고 한강 뷰가 크으.”
“그래. 열심히 버는데 취미 하나 생길 수 있지. 그런데 조심해야 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백동환이 사진기에 눈을 대며 물었다.
저 거구가 사진기를 드니 괜히 작아지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저게 작은 크기가 아닌데 말이다.
“누구 하나 조지려고 뒷조사하는 거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하. 무슨 말입니까. 누가 그런 오해를 한다고. 전혀 그런 오해 없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왜 나는 상당히 있을 법한 거 같지?
하여간 좋은 사진기를 보니 괜히 나도 사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시하를 찍을 일이 많긴 하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요즘 폰의 기능이 좋아서 굳이 살 필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기 사는 건 비싼 취미가 맞다.
원래도 비쌌지만, 지금은 더 비싼 느낌?
“아! 마침 잘됐다. 시하 여권 만들어야 하는데 사진 좀 찍어봐도 돼?”
“당연히 되죠. 근데 사진관에 안 가시고 여기서 찍게요?”
“응. 요즘 안 가고 그냥 찍어서 프로그램으로 만진 다음에 인화만 하러 가지 않아?”
“그렇죠. 전 형님이 그걸 알 줄 몰랐습니다.”
“왜? 난 뭔가 문명과 떨어져 있고 그래 보여?”
“그건 아닌데 뭔가 전문적인 지식만 알 듯한 느낌이 있긴 하죠.”
“나도 20대거든. 그렇게 떨어져 있는 사람 아니야.”
“하하. 그럼 제가 찍어드리겠습니다.”
“오! 정말?”
백동환이 씨익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어디 자랑할 게 더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제가 집에 사진인화기도 들여놓았거든요. 그걸로 깔끔하게 시하 얼굴 뽑아드리겠습니다.”
“어? 야, 너. 완전 본격적으로 즐길 생각인가 보네?”
“당연하죠.”
“근데 준비만 요란하고 정작 한 달도 안 돼서 창고로 가는 거 아니야?”
“형님. 그건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말입니다.”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 자기도 불안한 모양이다.
원래 취미라는 게 다 창고행으로 향하는 여정이 아니겠나.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백동! 카메라!”
“응? 아! 이건 갖고 노는 게 아니야. 비싼 돈 들여 산 거라고.”
“아냐. 시하 살살 해.”
“살살하다가 떨어뜨리면?”
“시하. 호오~ 해.”
“아니. 이건 호~ 해서 나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그렇게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호~ 해서 모든 병이 다 낫는다면 병원이 필요 없을 거다.
하여간 시하는 귀엽다.
“그럼 이제 사진을 찍어볼까? 시하야. 저기 서 봐.”
“아아.”
“아니. 현관에 말고 저기 벽지에 서 보라고. 흰색이어서 얼굴이 환하게 나오게. 옳지.”
시하가 벽에 얼굴을 딱 붙었다.
백동환은 그렇지. 그렇지. 하면서 사진을 찰칵 찍고 있다.
옆으로 고개가 돌아가서 측면에서 찍는데 이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이. 백동환. 여권 사진은 정면에서 나와야 한다고.
“시하야. 벽에 등을 딱 붙여서 사진 찍자. 얼굴 잘 나오게 말이야.”
“형아도.”
“형아는 나중에 같이 찍을게. 알았지?”
“아아.”
시하가 등을 벽에 딱 붙었다.
역시 내 말을 잘 듣는다. 딱 한 가지만 빼면 완벽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시하야. 브이는 내려야지.”
얼굴에 브이를 딱 붙이다가 슬쩍 아래로 내렸다.
차려자세를 시켰는데 브이는 포기할 수 없는지 빼꼼 나와 있다.
어차피 상체만 찍을 거기 때문에 브이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찍는다?”
“아아.”
그때 백동환이 의문을 뱉었다.
“형님. 그런데 사진 쓸려면 눈썹도 다 보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귀랑요.”
“아…. 그랬지.”
시하의 앞머리는 살짝 자라서 눈썹을 조금 덮는 상황.
내 손으로 앞머리를 자르면 되겠지만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어쩔 수 없이 고민하다가 앞머리를 까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 왁스와 스프레이를 들고 왔다.
“시하야. 잠시만. 화장실 좀.”
물 좀 뿌리고 드라이기로 뿌리를 바짝 말린다.
왁스를 백 원짜리 동전 크기만큼 손바닥에 짠다.
살살 비비며 손바닥의 열로 녹인다. 시하의 머리를 만졌다. 부드럽다. 아이들의 머리는 이토록 보들보들하다.
앞머리를 과감히 넘기고 윗머리에 볼륨을 주었다.
그걸로 부족하다는 걸 알아서 스프레이로 빠르게 고정했다.
“눈 꼬옥 감아.”
“아아.”
꼬옥.
스프레이를 분사한다. 촤악. 촤악.
투명한 방울이 머리를 굳히고 스프레이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른다.
“냄시.”
“하하하. 그래도 이상한 냄새는 아니지?”
“조은 냄시?”
“뭐 좋다고는 애매하긴 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이마 깐 머리.
역시 얼굴이 되는지 뭘 해도 귀엽다.
왜 잘생긴 게 아니냐고? 잘생기려면 일단 중학생 시절을 잘 넘겨야…….
아무튼, 굉장히 잘 어울린다.
“자. 이제 사진을 다시 찍자.”
“형아. 시하 얼굴. 얼굴.”
“아. 얼굴 보고 싶어? 잠시만.”
나는 시하를 안아서 거울을 보여주었다.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살짝살짝 건드린다. 콕콕. 찌르는 손가락이 조심스럽다.
마치 망치면 안 되는 것처럼.
“형아. 시하 변신.”
“하하하. 시하 변신했네. 대단해.”
“시하 머시써.”
“그래?”
웃긴 게 자기 얼굴을 보고 요리조리 돌린다.
이렇게 마음에 들 줄 몰랐는데.
아무래도 가끔 헤어를 꾸며줘야겠다.
벌써 이렇게 멋에 빠져들면 안 되는데 말이야.
“형아.”
“응. 내려줄게.”
“백동! 짜잔!!”
“와! 시하야. 정말 멋있다. 완전 연예인 해도 되겠는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도 외모면 아동 배우로 나서도 손색이 없지.
하지만 연예계는 안 된다. 그쪽으로 빠지면 나랑 놀 시간이 없으니까.
“시하는 표정 연기가 일품이긴 하지만 연예계는 힘들다고 하니 보내지는 않을 거야.”
“예? 형님. 제가 잘 못 들었는데요.”
“시하가 연기에 재능있다고. 얼굴의 작은 움직임에 희로애락이 다 표현돼. 엄청난 재능이지. 야.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이상하다. 굉장히 얼굴이 불경했는데.”
“시하가 종교입니까? 불경하게?”
“빨리 사진이나 찍자.”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결국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자신의 멋진 사진을 본 시하가 말했다.
“브이…….”
응. 그렇게 말해도 브이는 안 나와.
사진에 브이가 나오지 않은 게 머리보다 중요한 시하였다.
***
다음 날.
시혁은 여권을 신청했고 시하는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오늘은 조금 다른 시하의 머리 스타일에 관심을 보였다.
승준이 말했다.
“와. 시하야. 머리 멋있다.”
“아아. 승준.”
여행은 사람의 기분을 다르게 한다고 하지만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시하에게는 티가 났다.
“시하. 찰칵. 해써. 머리. 형아 해써.”
“와. 시혀기 형아 짱이다. 우리 아빠는 이렇게 못하는데. 전에 자 가지고 앞머리 잘라줬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도 할 말이 많은지 승준 옆에 딱 붙었다.
“아빠 못 잘라. 이상해. 이상해.”
앞머리에 민감한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
쌍둥이 둘이서 심각하게 설전을 펼쳤다.
“엄마가 해 주면 되는데 아빠가 했지. 엄청 이상했어.”
“마자! 안 예뻐서 울어써.”
“아아.”
어떤 사태가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시하는 두 아이의 말에 공감해 줬다.
둘이서 불만이 많았던 모양.
우는 대도 달래주지 않고 귀엽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둥.
달래도 예쁘다고 했다는 둥.
결국 미용실 갔는데 언니, 누나가 앞머리를 보고 곤란해해서 더 서럽게 울었다는 둥.
재잘재잘 말하는 하나의 말에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승준은 처음만 싫었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기했다.
다시는 아빠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런데 시하야.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멋있어?”
“아? 시하 여행. 형아 여행.”
“응? 와! 여행가? 어디? 어디 가는데?”
아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도 그럴 게 시혁 씨에게 이런 말을 듣지 못했으니까.
아마 경황이 없어서 못 했으리라.
“싱가포. 싱가포 가.”
“싱가포가 뭐지?”
“하나도 모르게써.”
선생님은 시하의 말을 알아들었다.
싱가포르! 설마 해외여행을 갈 줄이야.
정말로 갑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로는 부러웠다. 자신도 어디 새로운 데로 여행 가고 싶었으니까.
그때 종수가 나왔다.
“싱가포르겠지. 싱가포르. 맞지?”
“아아.”
“야. 종수. 싱가포르가 어딘데?”
승준의 말에 종수가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비행기 타고 저어~ 멀리 가는 곳이야. 엄청 덥다고.”
“오! 근데 왜 덥지? 여기는 그렇게 안 더운데?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진짜거든. 왜 덥냐면. 어. 어. 음.”
왜 더운지까지는 종수도 몰랐다.
그저 엄마랑 아빠랑 함께 여행 한 번 갔다 온 게 다였으니까.
선생님이 나섰다.
“그건 말이죠. 싱가포르에 해가 힘을 많이 줘서 그래요.”
“아? 힘 마니?”
“네. 나라마다 해가 힘을 많이 주는 곳이 달라요.”
“왜?”
“맨날 많이 힘주면 힘들잖아요. 여러분도 똥 쌀 때 힘주고 나면 힘들죠?”
“아아!”
“그거랑 같답니다.”
승준이 더럽다며 코를 붙잡았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 그렇게 말했다.
어찌 됐건 태양의 영향이 맞으니까.
나중에 아이들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겠지.
“해. 힘 마니. 힘 마니.”
시하는 나중에 형아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열심히 외우고 있다.
“해 똥. 해 똥.”
적도에 있는 부근에 섬들이 해의 똥을 많이 받는 거로 되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보고 정말 과학적으로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여러모로 교육은 어려운 법이다.
***
-나인하츠 전자 부회장실.
다니엘.
직급은 부회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회장이다.
나중에 나인하츠의 모든 주식을 물려받을 것이며 얼마 있으면 곧 회장으로 오르게 된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이건 거짓 없는 진실이며 누구도 회사 내에서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똑똑.
문을 열고 비서가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리를 펴며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가람 반도체 사장이 부회장님을 만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건 거절하라고 했잖아.”
“그게…. 이시혁 통역사와 함께 싱가포르로 오겠다고 합니다.”
서류를 보던 다니엘의 고개가 들렸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긴다.
“아, 그래? 가람 반도체에서 나랑 꼭 이야기하고 싶나 보군.”
“이미 맞고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어찌할까요?”
“호텔로 모셔. 우리가 미리 잡아둔 방 있잖나.”
“알겠습니다.”
세계 무역의 허브 지점인 싱가포르.
호텔에서 계약하는 건 언제나 일상인 일이었다.
특히 나인하츠는 매년 호텔 방 하나를 계속 빌리며 돈을 지급하고 있다.
그만큼 무역을 체결하고 해결할 게 많다는 말.
또 대접할 때도 많아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
“기대되네.”
“어떤 게 말입니까?”
“이시혁이 날 보면 뭐라고 할지가 말이야.”
“그냥 가람 반도체 사장의 말을 전해 주는 역할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도 또 모르지. 말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전해지는지에 따라 계약이 바뀌니 말이야. 어차피 가람 반도체는 나중에 만나려고 했는데 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이장혁과 다른 젊은이입니다.”
“하하. 나도 알아. 그래도 기대하는 건 내 마음이지 않나?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지. 그때 봤잖아.”
“그 부분만 가지고 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력이 흥미롭지 않나?”
“그건…….”
비서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가 진행하는 대로 하지. 바뀌는 건 없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비서가 나가고 다니엘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상하게도 패기 있던 이장혁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이장혁과 이시혁이 다른 사람인 줄 알면서 그의 아들이기에.
그의 유전자를 받았기에.
기대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우수한 유전자에서 우수한 자손이 나온다.
다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