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물에 들어갔으니 이제부터 때를 밀 시간.
시하의 여린 살을 살살 밀어주었다.
혹시나 아플까 봐 몇 번이나 확인했다.
“시하야. 아파? 아프면 꼭 이야기해야 해. 알았지?”
“아파 아냐.”
“그래. 자~ 여기 때가 엄청 나오네. 어때? 대단하지?”
“형아. 마나!”
“때부자네.”
스윽스윽.
시원하게 시하의 몸을 밀며 때를 벗겼다.
살짝 빨개지는 느낌이 들 때면 그만 밀었다.
사실 다칠까 봐 열심히 못 밀겠다.
그냥 대충 시늉만 하는 거지.
그렇게 마지막으로 등을 밀어주자 시하가 입을 열었다.
“아아! 시언해~”
“하하하. 여기 간지러웠구나?”
“시언해~”
“그래. 시원하지? 자, 다 됐다. 헹구자.”
시하의 몸에 물을 뿌리자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아버지도 내가 어릴 때 먼저 때부터 밀어주고 목욕탕에서 놀게 한 게 생각이 난다.
언제나 아들 먼저. 아들이 심심하지 않게 하려고.
‘아버지 등을 밀어준 게 언제였지?’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이 추억이 다시는 재연될 수 없다.
그 사실에 가슴이 시큰거린다.
아직은 더 같이 때를 밀어주는 날이 올 줄 알았는데.
왜 맨날 바쁘다는 핑계로 같이 목욕을 가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
“형아. 시하도.”
“응?”
시하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뭘 줘야 하나 싶어 고민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하가 내 손을 탁 잡더니 초록색 때밀이를 벗겼다.
“시하가 해.”
“와. 시하가 때 밀어준다고?”
“아아.”
“그럼 여기 물을 적셔서 꼬옥 짠 다음에 형아 등을 밀어주는 거야. 쉽지?”
“아아.”
시하가 때밀이를 바가지에 있는 물에 적셔서 손으로 꼬옥 짰다.
또옥. 또옥.
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제대로 짠 건 아니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축축해 보이는 때밀이를 손에 끼고 ‘나 잘했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등 뒤로 돌아가 등에 손을 대는데 축축한 때밀이의 기운이 느껴졌다.
“형아. 시하 해.”
“응. 시작해.”
스으윽. 스으윽.
꼼지락거리며 등을 밀어준다.
시원하기보다는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간지럽다.
그래도 기특한 시하를 위해 좋아하는 척을 해줘야 한다.
“어이쿠! 시원하다!”
“형아. 시언해?”
“응. 엄청 시원하네. 앞으로 시하에게 등을 맡겨야겠는걸?”
“시하. 잘해?”
“엄청 잘해.”
시하가 신이 나는지 열심히 등을 밀었다.
그런데 시하야.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왜 같은 곳을 미니? 다른 곳도 밀어주라.
“이제 다른 부위도 밀어줘.”
“아아. 이케. 이케.”
“응. 응.”
다른 부위를 미는 건 좋다.
근데 또 거기만 민다.
3살 이시하. 한 곳만 파는 남자였다.
아니. 이게 이때 쓰는 표현이 맞나?
그렇게 나는 등의 일정 부분만 밀게 되었고, 나중에 몰래 오상환에게 등을 밀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
목욕이 끝난 뒤 밖으로 나왔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목욕의 장점은 시원함을 3번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탕에 몸을 담갔을 때. 때를 밀었을 때. 끝으로 밖으로 나왔을 때.
몸에 온기가 남아있는지 이상하게 바깥바람이 색다르게 느껴진다.
“시하야.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저기 저 아저씨가 맛난 거 사준대.”
“아찌?”
“응. 승준이도 맛난 거 먹으면 좋지?”
“난 다 잘 먹어. 시하랑 먹으면 더 맛있어.”
우리는 그렇게 저녁을 먹으러 갔다.
몸에 좋은 백숙집에 들렀는데 무슨 가격이 만 원이 넘었다.
아무래도 좋은 게 많이 들어있나 보다.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시하가 잘 먹을 수 있냐는 건데…….
김 부장이 말했다.
“일단 우리는 백숙을 하나씩 시키지. 다른 거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아.”
김 부장이 나를 보았다.
“여기 맛있어. 애들도 좋아하고. 근데 그쪽 테이블에는 백숙 다 시키지 말고 애들 좋아하는 거 시켜. 여기 갈비탕도 괜찮고 불고기 전골도 괜찮아. 오늘은 내가 쏜다.”
주변의 직원이 엄지를 세운다.
“이야! 멋있으십니다!”
“잘 먹겠습니다.”
“너희들 말고! 누가 너희들 사주겠대!”
나는 가격표를 봤다.
삼계탕 14,000원, 갈비탕 12,000원, 불고기 전골 34,000원.
오상환이 메뉴를 슥 보더니 앞에서 말했다.
“불고기 전골 하나랑 삼계탕 하나 시키지. 이러면 아이들도 다양하게 먹을 수 있겠지.”
“그럴까요?”
이렇게 비싸면 얻어먹기 참 그랬다.
친한 것도 아니고 오늘 처음 30분을 뛴 사이 아닌가.
하지만 김 부장이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에 나도 메뉴를 선택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음식이 나온 후.
배가 많이 고팠는지 다들 입도 뻥긋 안 하고 조용히 먹기만 했다.
“시하야. 이게 삼계탕이라는 거야. 고기가 야들야들해서 맛있어.”
시하는 입에 넣어주자 ‘마시써!’ 하며 눈을 빛냈다.
앞에 있던 승준은 배가 많이 고팠는지 거의 흡입하는 수준이었다.
친구가 잘 먹으니 시하 역시도 평소보다 더 잘 먹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때 하나둘 이야기가 시작됐고, 어느새 반주가 한 잔씩 돌자 회사 이야기도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신입 말이야. 똘똘하더라니까요.”
“아. 그렇지. 사장님이 왜 맨날 강인대 대학원생만 뽑냐고 뭐라고 하시더라.”
“아. 그건. 하하. EEPROM 설계 전문으로 하는 곳이 흔하지 않으니까요. DRAM, SRAM이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다른 대학원생 뽑았잖아.”
오상환은 그 이야기가 불편한지 앞에 있는 보리차를 쭉 들이켰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대화의 내용을 파악해 보니 사장이 다른 애로 뽑았다는 것 같다.
근데 왜 저렇게 불편해하는 느낌일까?
오상환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하하.”
“아! 사장님이 뽑지 말래서 안 뽑은 건 아닙니다. 아시죠?”
“네. 알죠. 하하. 이거 참. 민망하네요.”
김 부장이 눈을 찌푸리며 눈치를 줬다.
“다른 얘기를 하지. 다른 얘기. 하하. 공정한 경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강인대학교라서 떨어뜨린 건 아닌 것 같다.
눈치를 보아하니 그냥 그 사람이 잘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 상황이 좀 미안할 수도 있다.
교수님으로서도 제자가 떨어진 이야기가 불편할 거고.
“아빠?”
승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상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오상환이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숟가락 위에 고기를 올려줬다.
이제 불편한 분위기를 끝내기 위해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 했다.
내가 이런 건 또 싫어하거든.
근데 저 사람은 왜 이런 불편한 주제를 꺼낸 거야. 짜증 나게.
내가 먼저 입을 뗐다.
“근데 교수님은 참 대단한 거 같아요. 전에 취업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전자과의 취업률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취업 특강 준비를 도운 적 있는데 그때 인상 깊었습니다. 이해가 아주 잘되더라고요. 그 뒤로 반도체에 대해서 조금 찾아보기도 했어요.”
오상환이 교수는 모르는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강연 준비를 위해 강의실을 잡아주고, 출입자 명부를 세팅하는 일을 했으니까.
마주친 적이 없으니 나를 기억하지는 못할 거다.
강의는 반도체와 기업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지금은 다르지.’
반도체 관련 기사와 논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오상환이 강의했던 설계의 이해를 돕는다.
칩이라는 작은 컴퓨터의 세계.
요즘 시대와 굉장히 밀접하다. 이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스마트폰, 티비, 의료기기.
작은 전류 신호를 잡아내는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VPP 크로스 차지 펌프. 기존 저항값을 낮추면서도 전류의 세밀한 바운더리를 최대한 높이는 설계를 하셨더라고요. 이렇게 작은 설계로 전류를 남아돌게 하면 또 다른 기능에 쓸 게 많죠.”
김 부장이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꽤 많이 공부를 했나 봐?”
“네. 뭐 관심이 생겨서 잠깐? 사실 교수님에게도 많이 물어봤고요.”
오상환이 내게 언제? 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실제로 한쪽에서 전류를 아껴줄 수 있으면 디스플레이나 카메라 등에 전류를 좀 더 줄 수 있잖아요.”
“그렇지.”
“근데 NPN의 width(너비)와 length(길이)를 조절해 저항값을 만들고 그 설계를 만드는 게 대단하더라고요. 설계만으로 더 세밀하게 만들 수 있다니.”
“진짜 뭘 좀 아는데?”
김 부장이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게 내 전공이 국문과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 봐. 너 오상환 교수의 대학원생이지. VPP 크로스 차지 펌프는 오상환 교수의 오리지널 설계 이름이라고.”
“아하하. 그날 특강이 너무 재밌어서요. 강연이 참 멋지더라고요. 그게 기억에 남아있나 봅니다. 괜히 못 알아들으니까 자존심이 좀 상하는 느낌? 그래서 찾아가서 물어봤죠.”
나는 오상환을 계속 띄워줬다.
“이렇게 타과 학생도 잘 가르쳐주시니 반도체 설계를 위한 인재 육성에 잘 이뤄지는 거구나. 이런 분이 강인대 교수님으로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했죠.”
“캬아. 아니, 오상환 교수님. 어떻게 하면 국문과 학생도 이 정도로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오상환이 손사래를 쳤다.
“자기가 열심히 공부한 겁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이렇게 열정 있는 학생이 있어 교수로서 보람을 느낀다니까요.”
“정말 그렇겠습니다.”
오상환 교수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 모습은 어딘가 승준과 닮아 있었다.
승준은 아빠 기가 산 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옆에서 자기 어깨도 으쓱했다.
뭔가 자막을 넣으면 ‘뚜둔!’ 같은 게 박히지 않을까 싶다.
“형아.”
“응?”
“대다내~”
“뭘 알고 대다내~ 하고 있어?”
시하의 어깨가 으쓱하며 올라갔다.
세 남자의 어깨가 올라가는 걸 보니 나도 그렇게 되는 것 같다.
“형아. 따다다다. 해써.”
“푸하하. 그래. 그랬다.”
시하는 아마 알아듣지 못했겠지.
그래도 늘 봐왔던 느낌이나 분위기로 파악했을 거다.
이럴 때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자자. 다 먹었으면 커피나 한잔하지.”
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와 같은 어색한 분위기는 날아가고 없었다.
깔끔하게 커피 한잔하고 헤어지면 될 것 같았다.
뭐 나와 시하는 바나나우유를 마실 것 같지만.
***
-가람 반도체.
다시 평일이 시작됐고 김 부장은 아침 회의를 끝낸 뒤 자리에 앉았다.
잠시 이렇게 여유가 생기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시혁.
전에 통역사를 한다고 했었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인별을 한다고 했었나?’
이 나이에 딱히 열정적으로 인별을 하지 않았지만, 자식들이 하는 걸 보고 슬쩍 가입을 해뒀다.
바쁜 회사 생활 중에도 조금이라도 애들과 친해지기 위한 눈물 나는 노력.
하지만 대체 이 이상한 SNS를 무슨 재미로 하는지 모르겠다.
김 부장은 그런 감성이 없었다.
‘오. 경력이 화려한데?’
백숙집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친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다.
반도체에 대해 꽤 빠삭해서 같이 일하면 좋을 듯했다.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고 있으니 통번역이 필요한 일도 많았다.
비록 가람 반도체가 한국에 있는 1위 기업은 따라잡지 못했다고 하더라고도 어디 가서 무시를 받을 정도의 기업은 아니었다.
‘인맥도 상당한데?’
이 정도면 굳이 이런 반도체 분야 대기업 쪽으로 오지 않더라도 취업하는 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뭔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계속 인별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문자가 도착했다.
‘응? 사장님?’
가람 반도체 사장이 긴급회의를 열었다.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회의실로 갔다.
다들 심각한 표정이라 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김 부장. 여기 앉게.”
앉으면서도 자신이 혹시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닌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장이 입을 뗐다.
“지금 싱가포르 나인하츠 반도체에서 설계를 훔친 거 같은데 김 부장이 확인 좀 해줘. 이거 우리 쪽 설계 맞지?”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런 일 있을 때마다 골치 아프네. 만약 확인이 끝나면 법적 절차 밟고 곧장 소송 걸어. 쯧. 또 이거 오래 걸리겠네. 되도록 분쟁 없이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나. 저쪽에서 질질 끌면 2~3년 걸려 버리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김 부장이 이렇게 대답하며 살짝 설계를 확인해 봤는데 확실히 유사점이 보였다.
표정을 굳히며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그냥 법무팀에게 맡기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이 넘어가고, 시험당하고, 더 업그레이드된다.
그걸 넘어서고 앞서 나가려면 미친 듯이 설계를 하며 인력을 갈아 넣어야 한다.
얼마나 험난할지 뻔히 보이는 길.
어차피 겪었어야 하는 길.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료를 덮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좀 더 자세히 검토해야 했다.
“혹시 보안 쪽에 문제가 있었나 한번 확인해봐.”
사장의 지시를 하나하나 전부 들으며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나인하츠’라는 단어를 어디서 들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김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사장이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죄송합니다. 나인하츠에 대해서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뭔데?”
김 부장은 별거 아니라는 생각으로 이시혁이라는 통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가람 반도체 사장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