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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167/500)

167화

열기라는 건 굉장히 신기한 면이 있다.

축구로 뜨거운 에너지를 부딪치면 마치 적과 전쟁을 하듯 감정이 들끓는다.

하지만 경기가 끝나고 나면 소모된 에너지가 몸을 식히고 즐거운 감정이 남는다.

몸은 지치지만, 마음은 충만한 느낌.

그러면서 함께 싸웠던 팀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친해지게 된다.

내가 뛴 건 단 30분이었지만 이상하게 같은 소속이었단 이유로 말도 자주 걸어주었다.

“이야. 아까는 진짜 나이스 어시스트였어.”

“종종 나와서 뛰어보는 건 어때?”

“슛 잘하더라. 노련미가 있어서 좋던데?”

으레 할 수 있는 말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친근감이 담겼다.

무뚝뚝하게 수고했다고 말 한마디 안 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나.

이 정도면 꽤 호감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형아. 여기 모격?”

“응. 여기가 목욕탕이야. 사우나라고도 하지.”

“사우나? 아아! 싸어.”

“아니. 싸우는 곳이 아니야.”

옆에서 신발을 벗던 승준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 코끼리끼리 싸우는 곳이야. 시하야. 하하하!”

“아니. 코끼리끼리 싸우는 곳은 아니야.”

승준의 말에 주변 동호회 사람들이 자신감 있게 어깨를 펴고 있다.

뭐지? 다들 왜 그렇게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짓는 거지?

다들 몸이 좋나 보다.

“여기 번호표도 받았으니까 신발 넣자. 형아가 너희들 넣을 수 있게 아래에 있는 신발장을 달라고 했어.”

우리는 신발을 넣고 열쇠를 뽑았다.

덜컹덜컹.

잠겼는지 내가 확인을 하자 시하와 승준이 따라 했다.

덜컹덜컹.

“이제 이 키를 갖고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여기 숫자 적혀 있지?”

“아아.”

“그럼 읽어봐.”

우리가 받은 번호는 397, 398, 399였다.

시하는 숫자를 보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

“서이! 구! 칠!”

삼, 구, 칠도 아니고 서이, 구, 칠은 뭘까?

아무튼, 의미만 통하면 되지.

“그건 삼백구십칠이라고 말하는 거야. 아무튼, 이제 그 번호를 찾아서 이동해야 해.”

“아아!”

“내가 먼저 찾을래.”

“얘들아. 뛰지 마. 여기서 뛰는 건 아니에요. 걸어가자.”

막 뛰며 안으로 들어간 둘.

내 말에 살짝 멈추더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살금살금.

앞발을 들며 탐험하듯이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그렇게까지 걷지 않아도 되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들과 똑같이 했다.

살금살금.

그렇게 도착한 곳은 숫자의 향연이 펼쳐지는 옷장이었다.

열심히 숫자를 찾기 위해 시하와 승준이 두리번거렸다.

“와. 많다.”

“아아. 마나.”

“그래도 나만 믿어. 나 다른 곳에 가 봤어. 저기 위에 적힌 숫자들 보면 돼. 앞에 3이니까. 저기!”

“아아.”

승준이 목욕탕 경험자답게 앞장섰다.

나 역시도 시하와 목욕탕은 처음이었다.

“찾았다. 여기!”

“형아. 빨리!”

“응. 가고 있어. 잘 찾았네. 근데 시하는 손이 안 닿네?”

홀수 번호는 위쪽. 짝수번호는 아래쪽.

398번인 승준만이 옷장을 잘 열 수 있었다.

“시하야. 우리 같이 넣자.”

“고마어~”

“헤헤.”

뭐 위에 옷을 내가 넣어주는 것보다 아이들이 함께 넣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시하가 가진 397번 옷장에는 가방이나 넣어야겠다.

그렇게 우리는 옷을 다 벗고 손목에 키가 달린 팔찌를 찼다.

승준과 시하는 손목이 가늘어서 팔뚝까지 올렸다.

시하는 그게 마음에 드는지 탁탁 쳤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

“아아.”

“응.”

“우선 바닥에 물이 많으니까 뛰면 절대 안 돼. 넘어져서 아야 해. 알겠지?”

“아아.”

“응.”

정말 알아들은 걸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들어올 때 말을 잘 들었으니 뛰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잊어버리지 않게 계속 주의를 시켜야겠지만.

‘흥분을 시키지 않는 게 관건이지.’

너무 즐거우면 약속도 잊어버리게 되는 법.

열기를 다스리는 법을 아직 애들은 몰랐다.

“자. 들어가자. 고고.”

그렇게 시하가 처음 탕을 발견했다.

손을 살짝 대 보더니 ‘뜨거!’ 하며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살며시 멀어지며 탕을 노려보기 시작한다.

마치 적을 발견했다는 모습.

“형아. 띠개 대.”

“하하. 찌개 안 돼. 이렇게 몸을 살짝 적셔서 들어가는 거야.”

내가 몸을 푹 담그자 옆에 오상환이 왔다.

시하 옆에서 같이 떨어져 있는 승준에게 손짓한다.

“어이쿠. 시원하다. 승준아. 빨리 와. 시원해.”

“거짓말! 안 시원한 거 다 알거든!”

그러자 목욕탕에 있는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물 온도가 시원하다는 게 아니라 몸에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시원하다는 거였다.

‘나도 어릴 때 왜 욕탕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지.’

시하가 오상환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말 시원한가? 아까 ‘뜨거’는 거짓말이었나? 내가 잘 못 알았나?

그렇게 다시 한번 가까이 다가와서 손을 대본다.

“뜨거. 시언 아냐. 시언 아냐.”

“아하하. 시원하지는 않지.”

시하가 호다닥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저기에 있게 만들 수 없는 법.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가지를 잡고 시하에게 살짝살짝 물을 뿌려줬다.

욕탕 중 그나마 뜨겁지 않은 곳이었는데 시하에게는 뜨거운가 보다.

아니면 이런 데가 처음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때? 뜨거워?”

“아냐. 개차나.”

“그래. 이제 들어가 볼까?”

“아아.”

“발을 조금씩 넣는 거야. 알았지?”

“이케?”

“응. 잘한다.”

이게 뭐라고 사람들이 침을 삼키며 지켜보고 있다.

아니, 다들 아빠 미소 좀 거둬 주시고 다른 데 쳐다보면 안 되겠습니까?

괜히 민망해지네요.

“형아. 따따해.”

“응. 따뜻하지? 다 들어왔다.”

“아아.”

한 칸짜리 계단에 앉아서 반신욕이 된 모양새지만 전신을 담그려면 시하는 일어나 있어야 했다.

나는 바가지로 시하의 몸을 계속 적셔줬다.

어느새 승준도 시하 옆에 딱 붙어서 앉아 있었다.

“형아.”

“응. 좋지?”

“시언해~”

“푸흡.”

시하의 말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아이가 아저씨처럼 벌써 시원하다고 하니까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3살 이시하. 목욕탕의 시원함을 알게 되다.

하여간 배운 건 곧바로 써먹는단 말이야.

내가 동동 띄운 작은 바가지를 시하에게 주었다.

“이거 갖고 놀고 있어. 자, 승준이도.”

“형아. 떠!”

“그래.”

승준이 바가지를 뒤집어서 엎었다.

“시하야. 이게 바로 유에포 슛이야. 유에포.”

그냥 UFO 아닌가? 슛은 왜 붙이는 거야?

승준의 축구 사랑은 알아줘야 했다.

시하는 UFO가 뭐지? 하는 얼굴이었다.

“흠흠. 애들 돌보느라 고생이 많네.”

그때 옆으로 김 부장이 왔다.

아무래도 말을 걸어보고 싶었나 보다.

“별로 고생은 아니에요. 꽤 배우는 것도 많거든요. 힘도 나고. 고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애가 짐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크흠. 그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닌데…….”

“하하. 알아요. 그냥 다짐 같은 거? 뭐 그런 거죠.”

“그렇게 자꾸 세뇌할 수도 있지. 그런데 지금 어디 학과야? 몸 보니 체육 쪽인가?”

“네? 하하. 아니에요. 국문과입니다.”

“거짓말. 그런 몸과 축구 실력이 국문과일 리가 없어.”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인데 어떡하냐 그럼.

그래도 몸이라면 근육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예전에는 운동도 굉장히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다. 시간이.

“그럼 동생하고 둘이서만 사는 거야?”

“네.”

“와. 쉽지는 않겠어. 아! 혹시 이런 이야기 불편했다면 미안하네.”

“아니에요. 딱히 불편한 건 없죠. 사실이니까.”

솔직히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조심해 주는 게 더 불편했다.

우리는 그저 둘이 살게 되었을 뿐이고, 누구든 한 번 맞이하는 경험이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시기가 빨랐을 뿐.

시하가 너무 빨랐다는 것에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어쩌면 사실 지금 남탕이 아니라 엄마를 따라 여탕에 갔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나.

그런 생각을 하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그럼 지금 취업 준비가 한창이겠네. 어때? 우리 회사는?”

“네? 아. 좋죠. 반도체 회사. 근데 지금은 통번역일을 하고 있어서 회사 취업은 나중에 생각해 보려고요.”

“오? 정말? 굉장한데?”

“뭐, 원서를 지원해도 한 4학년 때? 그쯤에 넣겠네요.”

“통역 좀 하면 여기 지원해봐. 저기 오상환 교수 있지?”

김부장이 턱짓으로 오상환을 가리켰다.

승준과 시하를 위해 열심히 바가지로 UFO 놀이를 해 주고 있다.

UFO가 가끔 물속에 들어가는데, 공기로 인한 큰 물방울이 튀어나올 때면 애들이 까르륵 좋아한다.

저런 물방울이 한창 좋을 때긴 하지.

“필드에 대해서 빠삭해. 물론 최신 기술에 대해서는 조금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지만. 어느새 따라잡고 있거든. 저 양반 논문을 계속 보고 있으니 그렇겠지. 아마 바로 필드에 나와도 설계 가능할걸?”

“엄청나구나. 대단하다.”

“대단한 양반이었지. 아무튼, 대학원 생각 있으면 저 양반 밑으로 가. 설계 쪽으로 안 가더라도 그 정도 전문 지식이 있으면 통역 쪽으로도 메리트 있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지. 지금 대한민국이 반도체로 1등을 지키고 있어. 불과 몇 년 전까지 2등이었는데 말이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런 시대가 올 줄은 몰랐다.

스마트폰이 새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 있는 센서, 반도체 부품인 칩들 등등.

굉장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2등일 때는 괜찮아.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렇죠.”

“근데 1등일 때는 더는 따라잡을 기업이 없어지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아나?”

“지켜야죠. 그 자리.”

“맞아. 그렇게 지키려면 경영 방침과 영업 방침을 바꿀 수밖에 없어. 새로운 신입사원을 들일 수밖에 없지.”

“오!”

“다양한 인재를 영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현지 채용도 많이 하고.”

“그래서 통역사가 많이 필요할 거라는 말씀이세요?”

“언어는 메리트가 있어. 통역이 아니더라도 영업으로 뛸 수도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통역을 했지만, 어찌 보면 영업의 일종인 일도 했기 때문이다.

‘영업 비중이 더 높았을지도?’

아무튼, 이런 이야기도 들으니 축구 경기를 뛸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정말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냐는 건데.

애초에 국문과에서 전자과 대학원을 넣는 경우가 있나?

그때 오상환 교수가 말했다.

“면접이랑 시험만 잘 보면 들어올 수 있어. 시험만 잘 봐라. 면접은 좋게 봐줄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날 조금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승준이 말했다.

“아빠. 근데 시혀기 형아가 사커 더 잘하던 데.”

“뭐?! 아니야. 아빠가 공격수가 아니어서 그렇지. 어?! 시혁이 형이랑 상대팀이었으면 아빠가 이겼어!”

“정말?”

“그렇지. 정말이지.”

“그럼 아빠도 유에포 슛할 수 있어?”

“응? 어…. 아니. 유에포 슛은 할 수 없는데.”

전에도 느꼈지만, 오상환은 거짓말을 안 하는 타입인가 보다.

시하가 나를 봤다.

“형아. 유에포! 슛. 할 수 이써?”

“응. 유에포 슛 가능하지.”

승준이 맞장구쳤다.

“우와. 짱이다! 역시 시혀기 형아다!”

오상환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혹시 타짜 봤어?”

“네. 봤죠.”

“구라… 다… 걸리면… 손모… 날아간다… 으잉?!”

이상하다. 많이 생략됐는데 해석이 되네.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 날아간다라니…….

“커흐흠. 아, 오래 있었다. 시하야. 등 밀러 가자.”

일단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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