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팝업북 제작 회사에 갔다 온 뒤로 시하가 평소보다 열성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이들은 집중력이 크지 않다고 하지만 그건 시하에게 비켜 나가는 말인가 보다.
어쩌면 그림 그리는 게 일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저렇게 열성적으로 작업하고 있으니.
“자. 이제 끝.”
“아? 아냐!”
“너무 오래 그리고 있으면 몸에 안 좋아요. 자주자주 움직여야지.”
“아아.”
“그리고 형아랑 책 팔 곳을 돌아다녀야지.”
그 말에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내가 한 말에 그냥 고개만 끄덕인 것일까?
“왜? 시하. 대하겨 가. 파라.”
“응. 물론 거기도 팔 건데 아무래도 500개가 다 팔릴 것 같지 않거든. 시하는 500개가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지?”
“아냐. 시하. 아라.”
“오. 알아?”
시하가 내 품에서 작은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었다.
엄지와 검지가 붙은 모습이 마치 돈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오백언. 하나.”
“아하하. 그건 5백 원이고. 5백 개는 달라. 보자.”
나는 집에 있는 책을 뽑았다.
열권을 만든 다음에 50배의 크기로 허공에 네모를 그렸다.
“이~만큼~ 커!”
“아? 마나!”
“어. 엄청 많은 거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 많은 수였다.
개인이 팔기에는 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 시하야. 가자.”
“아아.”
시하는 그림을 저장했다.
배경의 마무리 색칠만 남은 그림.
나는 완성된 몇몇 그림을 가지고 밖으로 나섰다.
잠깐 집에 와서 쉬었지만 이제는 나가야 했다.
“오랜만에 KI 미디어로 갈 거야.”
“아아! 홍 아찌!”
“응. 홍진수 아저씨를 만나러 갈 거야. 여기 답장도 왔어. 보이지?”
사실 바로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별거 아니다.
홍진수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아무 연락도 없이 가는 건 예의가 아니기에 톡을 보냈다.
-이시혁 : 안녕하세요. 오늘 잠깐 뵀으면 하는데 시간 되시면 답 주세요. [오전 10:24]
-홍진수 : 아니! 아니! 내가 일하느라 이걸 못 봤다니!!! ㅠㅠ 죄송합니다. 연락이 늦었습니다. ㅠㅠ 제가 대역죄인입니다. [오후 2:34]
갑자기 대화가 확 올라와서 놀랐다.
뭘 이런 거로 대역죄인까지.
하여간 과장이 심했다.
‘그래서 홍진수 과장인가?’
이런 헛생각을 하며 시하를 위해 톡을 읽어주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앞으로 재깍재깍 바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따로 시혁 씨 폰 번호만 있는 폰으로 하나 장만해서!! 전체 알람을 끄니 몰랐습니다! 이제 전용 폰으로…….
그런 건 필요 없다.
내가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니 [심쿵]이라는 이모티콘을 보내 왔다.
“시하야. 그래서 바로 오면 된다고 왔네. 여기 심쿵 이모티콘 보이지?”
“아아! 심쿵! 모야?”
“응? 어…. 너무 귀여운 걸 볼 때 심쿵했다고 해.”
“형아. 기여버? 홍 아찌?”
“하하. 그냥 형아를 좋게 보는 거야. 설마 귀여워하겠어?”
“아아.”
“자. 차 타러 가자. 고! 고!”
“아아! 고! 고!”
그렇게 우리는 차를 타고 KI 미디어로 향했다.
***
-KI 미디어.
띠끄띠끄.
홍진수 과장이 응접실의 상을 닦고 있다.
유리에서 반질반질 빛이 난다.
우웅. 우웅.
청소기의 자그마한 소음이 방을 채운다.
동시에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다.
그런 유난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미친.”
KI 대표가 어이없어하며 홍진수 과장을 바라보았다.
“나 올 때나 그렇게 청소 좀 해줘. 누가 보면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도 오는 줄 알겠다.”
“아. 대표님. 진짜 이러깁니까? 오늘 시하가 온다고요. 애한테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데. 괜히 기관지 안 좋아지면 어떡해요.”
“이걸로 안 좋아질 정도면 벌써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크흠. 시혁 씨도 온다고 하니까요. 오늘은 또 어떤 일을 들고 올까?”
“시혁 씨가 무슨 우리 회사 영업사원이야?”
“뭐, 거의 한 식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습니까.”
“음.”
솔직히 저리 말하니 할 얘기가 없었다.
대표가 생각하기에도 올해 시혁이 해 준 게 많았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좋은 번역을 해 줄 것이다.
시혁이 해준 무협 소설에 대한 번역의 호평이 눈에 선하다.
언제나 이런 호평을 듣는 번역가는 찾기 힘들다.
중국 플랫폼과의 계약도 잘되게 했지.
심지어 스티브 백의 자서전도 은근히 잘 팔리는 중이다.
디자인으로 나아가려는 학생들이 많다는 점.
이런 책이 드물다는 점.
두 가지의 이유로 좋다는 평이 많다.
이런 사실로 비춰볼 때 이시혁은 KI미디어의 복덩이가 맞았다.
“자서전을 꽤 잘 쓰긴 했더라. 인기가 좋아.”
“그쵸? 제가 봐도 잘 쓰긴 했더라고요. 눈에 확 들어오지 않습니까. 인터뷰를 듣고 문장과 배열에 맞게 쓴 건데. 캬아. 소질 있어요.”
“그야 번역을 하면서 윤문도 같이하니.”
“그러니까요. 제가 이렇게 청소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홍진수가 가슴을 펴며 청소기를 윙윙 돌렸다.
대표는 또 한 번 그 모습을 어이없어하며 바라보았다.
네가 왜 자랑스러워해? 네 자식이야?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래서 언제 온다고?”
“바로 오라고 했죠. 대충 5분 있다가 도착하겠네요.”
홍진수가 청소기를 끄며 정리했다.
대표가 그런 홍진수 뒤를 보며 말했다.
“오늘 바쁘지 않아?”
“바빠도 시간 내야죠. 으하하. 근데 대표님. 왜 이렇게 여유로우세요? 아직 할 일이 태산일 텐데?”
“하! 나도 일하러 간다! 가! 참나. 지는 여유롭게 청소나 하고.”
“어허. 이것도 업무 중 하나입니다.”
“저, 저 주둥이만 살아있지.”
“실적도 살아있습니다만?”
대표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표실로 들어가려는데 직원들이 목을 빼고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모니터로 시선을 주며 일하기 시작한다.
“다들 괜히 무슨 말 하는지 궁금해하고 말이야. 하여간 호기심이 많아. 호기심이.”
“그게 우리 출판사의 장점 아닙니까.”
“네가 제일 문제야. 이거 뭐 장단점이 극과 극이야.”
“그래도 계륵이 아닌 게 어디에요.”
“아니라서 문제지.”
“에이. 초창기 멤버이자 형, 동생 하는 사이인데. 계륵 되면 버리시려고요?”
“끄응. 말이나 못 하면.”
대표가 졌다는 듯이 물러갔다.
때마침 그 순간 시혁과 시하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 시혁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하하.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얼굴 좀 자주 비춰주세요. 재택근무도 좋지만 여기 회사도 자주 나오시고.”
“네? 저 여기 직원 아닌데요?”
“하하. 말이 그렇단 겁니다. 말이. 어쩌면 될지도 모르고.”
“네?”
“하하. 말이 그렇단 거죠.”
시혁이 미심쩍은 얼굴을 하자 홍진수가 허허 웃었다.
시하가 시혁의 다리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홍 아찌.”
“어. 시하야. 안녕. 오랜만이야. 아저씨가 시하 먹으라고 코코아 가루도 준비했어. 오늘 이거 타 먹자.”
“코코아?”
“그래. 시하 코코아 좋아하지?”
“모야?”
“응? 아! 초코 우유 같은 거야.”
“아아! 초코!”
시하가 좋다고 팔을 벌렸다.
이전까지 이 공간은 웃긴 분위기였지만 시하 덕분에 훈훈하고 귀여운 공간이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시하를 보는 직원들의 입가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다들 아빠, 엄마 미소를 지은 것.
시혁은 그런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시혁 씨. 이제 들어가죠.”
“아, 네. 그럼.”
“근데 오늘은 어떤 계약을 하러 온 건가요?”
“아, 그게. 오늘은 시하가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요?”
“네?”
홍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하를 보았다.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형제 둘이서 직원이 되는 건가? 시하는 마스코트 담당?”
“네? 뭐라고요?”
“아닙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셋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던 직원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궁금해!!’
직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을 남긴 채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
따뜻한 코코아가 시하 앞으로 나왔다.
얼음 세 개가 동동 띄워져 있다.
빨리 식혀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홍진수의 작은 배려.
나는 여기에 감사를 느꼈다.
“감사합니다.”
“시혁 씨도 코코아죠?”
“네. 시하랑 같은 거 하려고요. 저랑 같은 걸 무지 좋아하니까.”
“하하. 역시.”
“저도 얼음 넣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는 길지 않나 보네요.”
오늘은 여유롭게 머그잔이 식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눌 만큼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피차 일하는 시간이고, 바쁠 시간이니 용건만 빨리 끝내는 게 낫다.
코코아가 나오고 서로 한 모금을 먹은 뒤에야 말을 꺼냈다.
“이번에 시하랑 함께 팝업북을 500개가량 제작하려고요.”
“네? 팝업북을 시하랑 같이 말입니까?”
“네. 시하가 그린 그림으로 만들 거거든요. 이번 강인대학교에서 장이 열리는데 이걸 팔 생각이에요.”
“500개나 안 팔릴 텐데요?”
“당연하죠. 설마 500개를 전부 팔 생각이면 제가 여기 왔겠어요?”
“하하. 그렇죠. 아! 설마 출판사를 통해서 판매할 생각입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고요. 그냥 거래처에 있는 작은 서점들 있죠? 대형 서점 말고요.”
“아! 있죠. KI 미디어에서도 자그맣게 책을 내는 곳은 전부 거기다 납품합니다. 거래처랑 꽤 신뢰를 쌓았으니 신간을 팔기에 정말 좋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인의 신간은 대형 서점에 유통되면 보통 눈에 띄기 힘들다.
기성들이 많고, 아무래도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들이 더 눈이 가니까.
“저희는 최대한 질 좋은 신작을 출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니 작은 서점에서도 좋아하죠. 좋은 작가 발견했다고요.”
“그러니까요. 온라인 서점과 다르게 책도 미리 사두잖아요.”
온라인 서점은 주문 후 책을 발주하지만 이런 서점에서는 사장이 먼저 책을 구매한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면 서점의 손해.
그런 까닭에 사장의 안목의 중요했다.
또한 서점 쪽에서 손님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책을 추천해 주기도 한다.
작은 서점만의 장점이었다.
“그런 곳 딱 열 군데만 소개해 주세요. 제가 뛰어서 10개 정도 팔아볼게요.”
“열 군데라…. 그러면 나머지 400개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온라인 서점에서 팔아야죠.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KI 미디어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런 호의는 원치 않는다.
나를 좋게 생각하는 만큼 신뢰를 돌려주고 싶다.
일방적인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한번 팔아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시하랑 같이 파는 건데 너무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
아예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고, 소개해 주는 정도의 도움이라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상이 되면 신뢰라는 저울추가 비스듬히 내려앉을 것이다.
물론 홍진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시혁 씨.”
“네.”
“일단 열 곳 정도는 소개해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게 인기가 좋고 잘 팔린다면 저희 쪽이랑 계약하시죠. 저희 쪽이 팔아주겠습니다.”
“네?! 그…. 팝업북이 그렇게 잘 팔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공룡도 아니고 그냥 시하가 좋아하는 건데.”
“다 방법이 있습니다. 하하! 어떻게든 팔면 되니까요.”
“흠. 알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재고가 남을 것 같지만요. 잘 팔리면 증쇄도 생각하고 KI 미디어에 팔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가 또 신인 작가를 발굴했군요. 하하!”
“네? 하하. 그런가요?”
홍진수 과장의 생각은 잘 모르겠다.
아니.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나 KI 미디어는 미래지향적이니까.
그렇다고 너무 먼 미래가 아닌 한 발짝 앞을 생각한다.
작가라는 게 언제 대박을 터뜨릴지 모르는 직업이니까.
물론 안 터질 수도 있다.
‘뭐 그건 기업에서 판단할 안목인 거지.’
근데 조금 황당한 점 하나.
“책 디자인을 안 보고 결정해도 돼요?”
“네? 아! 맞다! 보고 결정해야죠! 작은 서점에 못난 걸 소개해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 여기 있어요. 잠자리가 축구하는 내용이에요. 글은 제가 썼고. 그림은 시하가 그렸어요. 일단 디자인부터 보시죠.”
“크흐. 시혁 씨의 글과 시하의 그림이라니.”
나는 시하가 그린 그림을 폰으로 보여주었다.
홍진수가 기대 어린 눈으로 화면을 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홍진수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저어…….”
“네.”
“잠자리요?”
“네. 잠자리요.”
“하하! 그렇죠. 잠자리의 특징이 잘 살아있네요! 암! 시하야. 정말 잘 그렸는데!”
“아아!”
시하가 코코아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이거 보십시오! 잠자리의 특징이 정말 잘 살아있지 않습니까!”
폰으로 그림을 보여주는데 나도 잘 알고 있다.
끄덕끄덕.
그 그림에는 두 쌍의 잠자리 날개를 단 펭귄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튼, 잠자리야. 응. 그렇고말고.’
글 쓸 때 사용하려고 이름도 정했다.
페페잠자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