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노란 벌이 날아와 꽃 위에 앉는다.
서로의 암묵적인 합의하에 꽃은 꿀을 내어주고, 벌은 열매를 맺게 해준다.
흔들리는 꽃잎에 상처 하나 없고, 떠나가는 임은 다음을 기약한다.
또 좋은 거래를 하자고.
떠나가는 임이 아쉬워 꽃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한 해가 지난 뒤에야 마주하게 된다.
매년 오는 꽃과 벌들의 장이 열리는 시기.
그 시기가 어린이집에도 살며시 닿는다.
“야. 시하야.”
종수가 쇼핑백을 흔든다.
검은 봉지가 아닌 것은 어머니의 손길이 닿아서였다.
시하가 부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아? 는 무슨 아야. 자! 약속대로 과자 들고 왔어. 이번에는 내가 졌어. 1대1이네.”
종수는 자기 마음대로 발표 때를 기준으로 삼았다.
시하를 이겼던 위대한 첫날이니까.
“아아. 고마어.”
“이 과자 중에서 골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여러 개 가져왔어.”
“시하. 이거. 고마어~”
시하가 고른 것은 [마앗동산]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과자가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손끝에 머물고 있던 분홍색 빛무리가 살짝 약해졌다.
마치 삐지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시하는 그러한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승준이 너도 골라. 하나도.”
“아싸! 나도 이겼다! 오! 으음? 아니, 난 됐어!”
“왜?”
“아. 내가 좋아하는 거 없어서.”
승준이 히죽 웃었다.
종수가 그 모습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이기고 말리라.
절대 지는 일이 없으리라.
시하가 이기는 건 조금 분할뿐이지만 승준에게 지는 건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나는. 하나는. 이거! 빼빼로!”
다행히 하나가 좋아하는 빼빼로가 있었다.
다 나눠주고도 쇼핑백에 과자가 남았다.
이건 종수가 친구들에게 나눠줄 것이었다.
“자. 얘들아. 이거 가져. 재휘도 하나 골라.”
“응. 고마워.”
그렇게 사이좋게 과자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원장 선생님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팔을 잡아당겼다.
원장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장 선생님. 지금이 기회예요.”
“뭘?”
“이렇게 과자를 나누고 있을 때! 매년 하는 행사 이야기를 꺼내는 거죠!”
“아! 그거?”
“네! 아이들도 좋아할걸요?”
“대부분 좋아했지. 사실 오늘 알림장에 적어 보내려고 했어. 아이들에게 잘 말해줘.”
“걱정하지 마세요!”
유다희 선생님이 눈을 찡긋거렸다.
원장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눈을 돌렸다.
“아잉. 왜 그러세요!”
“저리 가! 훠이. 훠이.”
파리를 내쫓듯 손을 흔든다.
유다희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난 왜?!”
“원장 선생님도 도와주셔야죠. 제가 괜히 옆에 왔겠어요?”
“어휴. 그래. 해라. 해.”
그렇게 선생님 눈치를 보고 과자를 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시하는 이미 승준에게 뜯어 달라고 해서 두 손에 과자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자! 다들 동작 그만! 벌써 과자를 먹으면 안 되죠!”
“안 먹었어요!”
“그래. 종수는 안 먹었지. 거기 시하야. 과자를 내려놓을래?”
“아아. 이베?”
“아니. 입에 내려놓으면 안 돼.”
“아냐. 두 개. 이거. 이거. 끝!”
대충 두 개만 먹겠다는 표현.
시하가 살며시 [마앗동산]으로 브이 자를 만들자 선생님은 거기에 그냥 넘어갈 뻔했다.
너무 귀여웠으니까.
“아니야. 나중에 먹자.”
“아아.”
시하는 아쉽다는 듯 과자를 봉지 안에 넣었다.
이제야 아이들은 진정이 됐는지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크흠. 여러분 지금 종수가 과자를 나눠줬죠?”
“네!”
“그런데 과자가 얼마 하는지 아나요?”
“할아버지!”
“으응?”
시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할부지. 할부지!”
다들 뜻이 통했는지 할아버지를 외쳤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 사태.
선생님이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천 원짜리에 퇴계 이황 선생님이 그려져 있는 걸 기억해냈다.
얘들아. 할아버지를 내고 과자 산다고 하면 큰일 나…….
“여러분. 천 원이라고 해야 해요. 할아버지랑 과자랑 교환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할부지 내.”
“어. 할아버지가 그려져 있긴 하지. 맞는 말이긴 한데…….”
선생님이 원장을 쳐다보았다.
원장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곤혹스럽긴 마찬가지.
“크흠. 천 원에는 아주아주 위대한 사람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할아버지 낸다고 표현하는 건 안 돼요. 돈을 낸다고 해야지. 알겠죠?”
“네!”
어떻게든 잘 넘기고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갔다.
“자! 그럼 천 원을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원장님과 선생님이 보여줄게요.”
선생님이 폰을 꺼내서 열심히 그걸 만들어내는 척을 한다.
“지잉! 철커덕. 철커덕. 와. 다 만들었다. 이제 이 폰을 팔아주세요.”
선생님은 원장에게 폰을 넘겼다.
“자! 싸요, 싸! 어이쿠. 거기 잘생긴 청년. 이것 좀 봐요. 요새 젊은 애들이 좋아한다니까. 어, 어! 거기 예쁜 아가씨! 요즘 잘나가는 기종이에요.”
실제로 폰을 팔 때 저러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장에 있는 인물로 빙의했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사는 사람으로 왔다.
머리를 귀밑으로 넘기며 말했다.
“이거 얼마예요?”
“이거? 천 원이에요.”
“정말요? 와! 진짜 싸다.”
“그쵸? 신형인데 천 원이면 공짜지.”
“그러게요. 그런데 요금제는 엄청 비싼 거로 해야 공시지원금 많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천 원일 거 같은데…….”
원장이 눈을 찌푸리며 선생님의 팔뚝을 쳤다.
찰싹.
“아야.”
원장의 나지막한 목소리.
“애들이 그걸 어찌 알아요. 똑바로 안 해요?”
“나름 현실적인 부분도 애들이 알아야…….”
“똑바로 해. 응?”
“넹.”
그렇게 무사히 선생님은 폰을 구매했다.
콩트라도 보는 듯 의외로 애들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흠흠. 자. 이렇게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으로 우리 엄마, 아빠는 돈을 벌어요. 잘 알겠죠?”
“네!”
“그럼 우리도 돈을 벌어볼까요?”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필요 없는 물건이나 장난감이 있을 거예요. 그런 물건들을 가져와서 팔 거에요.”
아이들은 그런 물건이 있나 싶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갖고 놀지 않는 장난감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옷가지 같은 것들도.
“집에 가서 엄마, 아빠, 형아에게 말해 보세요. 아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1년에 한 번만 여기 대학교에서 하는 거니 모두 즐겁게 돈을 벌어 봅시다!”
아이들이 재밌겠다는 듯 웅성거렸다.
승준이 웃으며 시하에게 말했다.
“시하야. 나 집에 바람 빠진 공이 있어. 그거 팔 거야.”
“아아.”
그걸 들은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승준아. 그거는 그냥 버리는 쓰레기야.
“시하는? 뭐 가져올 거야?”
“아?”
시하는 필요 없는 물건이 있는지 고민했지만, 막상 생각나지 않았다.
모두 다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
옆에 있던 하나가 불쑥 외쳤다.
“시하야. 시혀기 오빠 가져와! 하나가 살게!”
시하가 놀라서 큰소리를 외쳤다!
“아냐!!”
“칫! 시혀기 오빠가 우리 집에서 살면 조켔는데!”
“아냐! 아냐! 형아. 시하랑 가치!”
선생님이 하나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시혁이 오빠는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오늘 할아버지부터 시혁이까지.
팔면 안 되는 물건이 계속 팔리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눈을 비볐다.
뭐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피곤하지?
***
시하를 집에 데려온 뒤 나는 종량제봉투를 꽉 묶었다.
종량제봉투가 차면 바로 버리는 습관은 아버지와 살 때부터 든 것이었다.
필요 없는 건 그때그때 버려야 나중에 한 번에 치우는 사태가 오지 않는다.
사실 날 잡고 한 번에 치우는 게 더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둘씩 쌓이다 보면 게을러지기 마련.
그리고 시간 소모도 꽤 크다.
그때그때 버리는 게 귀찮음이 덜했다.
“형아~”
“응? 잠시만. 쓰레기 좀 버리고 올게.”
“시하도~”
“시하는 집에 있어.”
“아냐. 시하 가치!”
“알았어.”
누구 말이라고 거절할까.
나는 시하에게 작은 박스를 들게 했다.
오늘은 박스를 버리는 날이기 때문.
자기도 일을 맡았다는 게 기쁜지 박스를 들고 문 앞을 콩콩거린다.
박스가 살며시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아하하. 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는 없어.”
“형아! 빨리!”
“간다. 가!”
시하는 전용 슬리퍼를 신었다.
이렇게 집 앞에 갈 때는 저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도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었다.
이제 밖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일교차가 점점 심해져 계절이 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시원하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쓰레기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야. 손 씻어야지.”
“시하. 아라.”
시하가 화장실로 쏙 들어가 손을 씻는다.
자신의 키만 한 곳에서 씻는데 발이 다 젖는다.
저러면 발까지 씻는 거 아니야?
하긴 밖에 나갔다 왔으면 손발을 씻는 건 기본이지!
시하는 벌써 그런 걸 아는구나.
비록 발은 비누칠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이라도 뿌리는 게 어딘가!
그것만으로 세균의 70%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시하야. 발에도 비누칠하자.”
“아? 형아. 자바!”
“응. 잡아줄게.”
시하가 다리를 휙 하고 들어 발을 하나하나씩 비누칠했다.
슥삭슥삭.
발바닥 한 번, 발등 한 번, 발가락 한 번.
두 번은 안 묻히는 게 상남자답다.
이게 아니지.
“시하야. 꼼꼼하게 거품 내자.”
“아아.”
결국, 나는 손을 씻으면서 시하의 발을 씻겨주는 모양새.
이제 물을 틀고 시하가 손발을 헹궜다.
내가 수건을 바치자 손을 푹 찍고는 밖으로 나와 발닦개에다가 발바닥만 슥 닦고 끝낸다.
그리고 도도도 달려가 방으로 쏙 들어간다.
“시하야. 아직 다 안 닦았어!”
“아냐. 시하 해써!”
“하긴 했는데…….”
나는 난처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대충 발등을 닦아주자 시하가 알림장을 내밀었다.
“형아. 시하 일해.”
“응? 일한다고?”
“아아. 파라.”
“파라? 어디 보자.”
알림장을 펼치자 어린이집 교육 일정이 나왔다.
강인대학교에서 하는 중고장터.
매년 한 번씩 하는 주말 행사였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호숫가에서 좌판을 벌여 물건을 파는 것이다.
이 행사에는 당연히 어린이집도 참여한다.
“어…. 필요 없는 물건이 없는데?”
웬만한 건 이사할 때 다 버렸고, 이 집에 오면서 시하에게 안 맞는 옷도 버렸다.
그나마 연식 있는 물건이 있다면 아버지의 노트북과 외장 하드.
새어머니의 액정타블렛과 태블릿 PC.
이건 모두 쓰고 있으니 당연히 팔 수 없다.
그리고 추억이 든 물건이라 팔 생각도 없었고.
“음. 시하야. 팔 게 없네? 하지만 걱정 마. 팔 게 없으면 형아가 만들면 되니까!”
“아? 모야?”
“뭘 팔 거냐고?”
“아아.”
“음.”
생각해 보자. 뭘 팔면 좋을지?
분명 적당한 게 있을 거야.
시하의 기대 어린 눈빛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실망감이 쌓이겠지?
히어로 같은 형아로서 그건 용납하지 못한다.
그때였다.
알림장에 적혀 있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시하야. 오늘 어린이집에서 배운 거 있지? 만들어서 파는 거.”
“아아.”
“그럼 우리 시하가 팝업북을 만들어서 팔아볼까?”
“아? 아아!”
“그치. 진짜 재밌겠지? 시하가 가질 거 하나 남기고 더 많이 만들어서 팔자.”
“서이? 너이? 시하. 파라.”
“그래. 바로 그거야. 시하도 이제 거의 다 그렸지? 형아는 이야기 다 만들었어.”
“아냐. 조굼!”
“아. 조금 남았어?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그려. 그때까지 형아가 책 만들 곳을 알아볼게.”
“아아!”
내가 생각해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였다.
시하의 팝업북을 팔려면 열심히 뛰어 다녀야지.
뭔가 함께 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