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7/500)

147화

-현재. 어린이집.

선생님은 오늘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이 환경에 한 줌의 교육이 놀이가 될 수 있다면.

좋은 아이디어로 최대한 색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익숙함 90%에 독특함 10%.

이 공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그림을 그리는 놀이를 한다고 해도 다양한 패턴의 퀘스트를 주는 것.

이게 바로 프로 어린이집 선생님이란 것이다.

“여러분! 오늘은 그림을 그릴 거예요!”

그림이라는 말에 시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휙 던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샘. 샘.”

“응. 시하야. 그림 그리는 거 좋지? 너 혼자라도 반응해 줘서 고마워.”

“하나도! 하나도!”

하나가 뒤늦게 달려왔다.

하지만 승준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시하의 뒤에 섰다.

시하와 하나가 가면 같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승준이었다.

종수도 승준과 같은 마음이었는지 투덜댔다.

“아. 그거 늘 하는 거잖아요. 재미없는데.”

곁에 있던 재휘가 중얼거린다.

“나는 연주에게 줄 옷 그리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재휘는 아직 연주를 못 잊고 있었다.

그래서 요즘 관심 있는 패션에 대한 옷을 그려서 선물하고 싶었다.

돈이 없는 재휘는 그렇게라도 선물하고 싶은 로맨티스트였다.

조금은 겁쟁이지만 말이다.

“후후후.”

선생님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모습에 애들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다 안다는 듯 명탐정 같은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재밌는 게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시, 그림 발표 대회에 나갈 걸 만들 거예요. 어린이집 시, 그림 발표 대회!”

아이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림은 알아도 시는 몰랐기 때문이다.

“시는 일종의 노래 같은 거예요. 선생님이 시가 뭔지 보여줄게요. 크흠.”

목을 가다듬고 고운 목소리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맞춰서.

“제목. 그림 작가. 유다희.”

[하얀 도화지에.

색연필로 슥삭슥삭.

상상력이란 머릿속이.

지우개로 슥삭슥삭.

지워져도 괜찮아요.

남아있는 그림이 있어요.

지워져도 괜찮아요.

남아있는 마음이 있어요.]

의외로 정상적인 내용에 원장이 화들짝 놀라며 유다희 선생님을 보았다.

원장이 속으로 ‘유태식이 돌아왔구나!’라고 소리쳤지만, 선생님은 그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유다희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자신의 시에 뿌듯해하며 아이들을 보았다.

“어때요? 이게 시라는 거예요. 그럼 이 시에 맞는 그림을 그려요. 이렇게 하얀 도화지에 색연필로 책을 그리고, 지우개도 그리고.”

선생님이 이미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었다.

검은 글씨로 시가 쓰여 있었고, 스케치북에 흰색 바탕 없이 전부 색칠되어 있었다.

“이렇게 그림에 시가 쓰여 있으면 정말 예쁘죠?”

“네!”

“다들 시를 짓거나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서 그림을 그려주세요.”

“네!”

“시를 전부 짓고 선생님에게 알려주면 그대로 글자로 써줄게요!”

아이들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각자의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었다.

선생님이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후.

배경이 전부 칠해져 있는 건 아이들이 좀 더 시간을 들이게 하기 위한 계획!

너무 빨리 끝나면 피곤한 법이다.

이걸로 오늘 하루는 충분히 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시 선택을 도와야 한다.

한마디로 읽어줘야 한다는 것.

하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목이야 언제나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선생님의 목은 그 어떤 성악가보다 더 단련되어 있었다.

“그럼 다들 시작해 볼까요?”

“네!”

의외로 시 창작에 불타는 아이들이 몇 있었다.

은근 예술가 기질을 가진 팀.

바로 시하 팀이다.

승준이 물었다.

“시하야. 시 만들 거야?”

“아아!”

“오! 선생님. 시하가 시를 만든데요!”

“그래~ 원장님. 도와주세요.”

시하 쪽에게는 원장이.

종수 쪽에게는 선생님이 갔다.

“그래. 시하야. 어떤 시를 만들 거니?”

“아아. 형아.”

“그래? 그럼 한번 말해봐. 원장쌤이 다 받아 적어 줄게.”

원장은 긴장했다.

시하의 말은 가히 센스가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

아니. 초월 번역이 필요했다.

“제목은 뭐니?”

“형아!”

“응. 시에 대해서 말해보렴.”

“아아!”

시하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시를 말했다.

“형아. 형아. 시하 형아. 고마어. 고마어. 시하 노라. 시하 코오 해. 배에 이써.”

시하가 시혁이 운전하는 모습을 따라 했고, 노트북을 치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배를 통통 두드리더니 가슴을 쫙 폈다.

가히 몸으로 시를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글로 받아 적었다.

[형아. 형아. 우리 형아.

고마워. 고마워.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고마워.

나랑 코오 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

옆에 있어 줘서.

운전하는 모습도.

노트북 치는 모습도.

언제나 멋진 모습도.

형아. 형아. 우리 형아.]

유려한 필체로 써 내려가는 초월 번역.

원장은 만족스러운지 땀을 닦았다.

아직도 더운가? 에어컨을 좀 더 틀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하에게 읽어주었다.

시하가 좋다고 손뼉을 쳤다.

“언장 샘! 하나도! 하나도!”

“그래. 하나야. 하나는 어떤 시를 적을래?”

“나리나리. 개나리!”

“그건 노래 아니니?”

“헤헤!”

하나가 들켰다는 듯이 혀를 쏙 내밀었다.

승준은 시를 짓는 것에는 관심 없는지 시를 골라 달라고 했다.

“나는 공 들어가 있는 거로요!”

물론 스포츠를 포기하지 못하는 승준이었다.

***

그렇게 시를 다 고르고.

드디어 그림 그리는 시간이 왔다.

시의 함축적이고 재밌는 표현은 아이들의 정서에 좋다.

물론 어려운 시가 아니라 아동들을 위한 동시로 선정됐다.

평소에 하던 놀이인 그림과 맞닿아 있으니 더더욱 좋다.

그리고 또 맞닿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친구다.

종수가 시하에게 다가갔다.

“시하야.”

“아?”

“시 정했어?”

“시 해써.”

“그럼 나랑 그림 대결하자! 이거 발표할 거래. 진 사람이 하루 동안 부하 되기!”

“아?”

시하는 딱히 대결에 관심이 없는지 눈을 슬쩍 피했다.

종수가 그걸 다른 의미로 오해했다.

“앗! 도망치는 거야?”

“아?”

“시가 별로여서 자신 없지! 난 엄청난 시를 골랐어!”

시하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눈꼬리가 1mm 올라간 것이다.

부리부리.

이렇게 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시가 별로라는 말은 형아가 별로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시하는 이 승부를 받아주기로 했다.

“조아.”

“오! 그렇게 나와야지.”

그때 옆에 있던 승준이 끼어들었다.

“그럼 나도 할래! 지는 사람이 1등 소원 다 들어줘야 해.”

“하나도! 하나도!”

뒤에 있던 재휘는 슬쩍 발을 뺐다.

“나는 안 할래.”

그걸 듣지 못한 종수가 말했다.

“재휘야. 너도 할 거지?”

“으응?”

“너도 잘 그리잖아. 이길 수 있어!”

“어. 으응. 할게.”

이렇게 대놓고 주목받으면 재휘의 허세가 발동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다섯의 대결이 성사됐다.

종수가 말했다.

“그럼 누가 이기는지 시작이다!”

다들 각자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들고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시하 역시도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림을 그렸다.

“아아. 형아!”

형아 펭귄. 시하 펭귄.

두 마리의 펭귄이 흰 스케치북에 조금씩 탄생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손에 분홍색 빛무리가 앉는다.

무리가 가지 않게 손에 힘을 빠지고 색연필이 쓱쓱 그어진다.

여러 번 그어진 선에 털선이 없다.

진한 색만이 그림을 강조하고 있다.

푸르게. 더 푸르게.

단조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 경험이 녹아있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아.”

진해지는 색감을 보며 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배경을 칠해야 할 때.

앞에 있는 작은 책상을 놔두고 바닥에 철퍼덕 누워서 다리를 흔든다.

콧노래를 부르며 엎드려서 열심히 칠했다.

여느 아이처럼 말이다.

***

나는 시하를 데리러 가기 위해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조용.

안은 이상하리만치 소음이 없다.

도대체 무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조용한 날은 드문 것 같다.

“저 선생님?”

“네, 네!”

신발장으로 후다닥 달려오는 유다희 선생님.

머리를 정리하며 나를 보았다.

“아! 오늘 애들이 열심히 색칠하고 있어서 그래요. 하하. 조용하죠? 애들이 오늘따라 집중력이 엄청나네요.”

“그러게요. 그림 그려도 시끌시끌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실 시, 그림 발표 대회를 준비하고 있거든요.”

“시, 그림 발표 대회요? 오! 저도 볼 수 있어요?”

“당연하죠. 그런데 오늘은 안 할 거예요. 저희 어린이집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네?”

“알림장에 적혀 있었는데 못 보셨어요?”

“아…….”

사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알림장은 대충 시하가 뭘 했는지만 봤다.

필요한 준비물 용품 목록에 뭔가 있는지만 확인했다.

어떤 행사나 수업을 하는지는 전적으로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맡기고 있다.

강의 계획서를 잘 안 보는 대학생 같은 거지.

“몰랐네요.”

“아하! 이번에 대회는 애들이 시와 친숙하게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건 알 것 같아요. 뭔가 좋은 교육이네요.”

“요즘 조기교육, 조기교육 하잖아요. 그렇다고 정말 조기교육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냥 손 놓을 수만은 없고.”

“그렇죠.”

“그러니 애들에게 잘 맞춰서 놀이로 교육하자는 거거든요.”

“놀이가 최고죠.”

“효과는 굉장히 좋아요. 공부가 아니라 그냥 노는 거니까. 꼭 기억할 필요는 없고요.”

“시 같은 거요?”

“네.”

옛날에는 암송도 많이 하고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천재들의 공부법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기억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요.”

선생님이 가슴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원래 문학이란 게 어디 머리로 기억하던가요. 가슴으로 기억하는 거지.”

“갑자기 문학도가 되셨네요.”

“제가 이래 봬도 동화 작가를 지망하고 있어요. 투잡으로.”

“알고 있어요. 곧 될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잔혹 동화 작가도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현실적인 게 너무 많이 등장해서.

꿈과 환상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은근히 현실도 들이미신다.

선생님이 기쁘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정말요?”

“네. 정말로요. 근데 발표는?”

“아! 내 정신 좀 봐. 발표는 다른 어린이집이랑 합동으로 해요. 합동이라고 해봤자 체육대회처럼 많이는 말고, 어린이집 하나지만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물론 있죠. 발표라는 게 새로운 사람 앞에서 하는 거잖아요. 못해도 되고. 떠듬떠듬 말해도 되지만. 이런 경험을 미리미리 하게 되면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게 별로 무섭지 않을 거예요.”

“애들이 무서워할까요?”

“음. 무서워하는 것보다 쑥스러워하는 게 많죠. 이런 것도 자연스러운 경험이니까 좋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건 나중에 초등학교에 가서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저도 꼭 참가하고 싶네요. 시하의 발표를 카메라에 담아야겠어요.”

“그래서 제가 피피티를 만들 생각이에요.”

“네? 너무 수고롭지 않아요?”

“그래도 강인대학교 옆에 있는데! 최신의 발표를 해야죠. 발표의 꽃은 피피티니까! 사실 그래 봤자 사진 달랑 하나 올리고 끝날 것 같기도 해요. 이번에 시와 함께 그림을 그린 거로요.”

벌써 피피티 발표라니…….

이시하. 3살에 발표하다.

너무 조기교육 아닌가?

나는 조금 고민이 됐다.

“형아?”

“응? 시하야.”

“아아! 형아!”

시하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내 품에 쏙 안겼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보여주었다.

“형아!”

“와! 잘 그렸는데. 시도 형아네?”

“아아! 시하 시!”

“시하가 지은 시라고?!”

“아아!”

나는 정말이냐는 듯이 선생님을 쳐다보았고,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를 읽어보니 말이 많이 늘었다.

이렇게 시를 만들 정도로 늘었다니…….

조금 감동이었다.

“시하야.”

“아?”

“시하 피피티는 형아가 만들어줄게.”

시하의 첫 피피티 발표 데뷔.

이 감동을 담아야겠다.

앞에 있던 선생님이 의문을 내뱉었다.

“한 페이지에서 두 페이지밖에 안 나와서 만들 게 별로 없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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