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500)

146화

9월.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으면서도 슬그머니 차가운 기운이 준동하는 달.

하지만 날씨와 별개로 다시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되는 달이다.

대학생들의 개강이 있으니까.

어느덧 1학기를 지나 2학기가 오면 익숙해지는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긴소매를 입는 사람도 틈틈이 보이는 계절이 오고 있다.

“형아!”

“시하야. 아직 펭귄 옷은 아니야. 더워.”

그렇다고 긴소매의 펭귄 옷을 입힐 수 없는 노릇.

아직 제대로 된 가을은 오지 않았다.

여전히 여름과 가을의 기 싸움이 벌어지는 달이었다.

“아냐. 페페!”

“시하야. 그거 알아? 언제나 주인공과 필살기는 마지막에 등장하거든.”

“아아.”

시하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금까지 본 만화들이 헛되지 않았다.

이렇게 단번에 이해하는 모습을 보라.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었다.

이게 아니지….

“페페 옷도 나중에 등장하는 거야. 그러니 아직은 안 돼요.”

“아아.”

시무룩.

이해는 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나도 펭귄 옷이 귀여워서 입히고 싶지만 아직은 입을 날씨가 아니었다.

그래도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아파서 한 발짝 물러선다.

“그럼 밤에 입을까? 잘 때 입으면 딱 맞겠는데!”

“아? 아아!”

시하가 다시 기운을 차렸다.

쥐고 있던 펭귄 옷을 번쩍 들며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이게 그렇게 좋을까?

하여간 더위는 가시고 있는데 시하의 펭귄 사랑은 가시지 않는다.

“그럼 이제 넣어두자.”

“아냐.”

시하가 옷을 자기 뒤로 숨긴다.

내가 살며시 웃으며 뒤로 돌아갔는데 도도도 달려서 피한다.

살며시 옷걸이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거기 걸어두자고?”

“아아.”

“이야. 이러면 안 까먹겠네.”

“아아.”

하는 수 없이 펭귄 옷을 받아서 벽에 붙여져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얼굴만 대롱대롱 달려서 펭귄 얼굴이 못생겨졌다.

하지만 시하는 만족하는지 벽에 손을 탁탁 친다.

“형아.”

“응. 다 걸었어. 이제 갈까? 형아가 오늘 개강이거든.”

“개강?”

“응. 어…. 학교 가는 날이야!”

“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한 게 항상 시하랑 학교는 가니까.

이거 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부터 형아도 선생님이랑 공부를 하는 날이야. 시하도 선생님이랑 공부를 하지?”

“아냐. 노라.”

“아. 그렇지. 형아도 선생님이랑 놀기 시작하는 날이야.”

“형아도? 시하도! 시하도! 가치!”

“미안하지만 시하는 재미없을 거야.”

무기로도 쓸 수 있는 전공 책을 들고 수업하거든.

아마 시하는 강의를 듣다가 의자에 축 늘어져 잠을 자지 않을까?

그건 그것대로 상상하니 귀엽다.

정말 한번 데리고 가 봐?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노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하러 가는 거야. 알지? 형아가 볼펜으로 종이에 막 쓰고 그러잖아.”

“아아.”

시하가 그건 재미없는지 고개를 휙 하고 돌리며 신발장에 턱하고 앉았다.

“형아!”

“응. 신발 신겨 줄게.”

“아아!”

내가 신발을 신겨 주고 문을 열었다.

“자. 오늘도 출발!”

“아아!”

***

시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는 오랜만에 강의실에 앉았다.

속으로 오늘은 출석만 하고 강의를 안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대학교에 낸 돈이 아까울까 그런 일은 일절 없다, 주장을 펼치시는 분들이다.

솔직히 맞는 말이긴 했다.

드르륵.

교수님인 줄 알고 쳐다봤는데 서수현이었다.

“오빠. 안녕하세요. 다들 안녕.”

역시 3학년 과대라서 그런지 여기저기 인사를 주고받는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자발적 아싸인 나와, 인싸의 삶은 다른가 보다.

“안녕. 오늘은 눈이 들어갔네?”

“네? 정말요?”

“어. 그 왜 있잖아. 검은 바지를 입으면 다리가 얇아 보이는 거. 눈에 다크서클이 진하니 움푹 들어가 보이네.”

“이 오빠 진짜! 지금 화장해서 다크서클 안보이거든요!”

“아! 스모키 화장인가 뭔가 그건가?”

“오빠도 해 드릴까요? 눈탱이 팬더로 만들 수 있는데.”

“사양할게. 난 펭귄이 좋거든.”

“전신이 푸르댕댕하게 하고 싶다고요?”

“이야. 요즘 가사 잘 써지나 봐? 쭉쭉 입에서 말이 잘 나오네.”

“저 옛날의 수현이 아니에요.”

서수현이 자기 머리를 한 번 넘겼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역시 인싸는 다르네.”

“뭐래. 오빠도 인싸면서.”

“나?”

“몰라요? 저기 애들 오빠한테 인사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내가 고개를 돌려 보자 다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뭐야. 나 낚인 거야?”

“누가 낚았다고 그래요. 진짠데. 오빠는 모르죠? 전에 건스 한 번 나왔을 때부터 장난 아니에요. 남자들에게.”

“아, 그래.”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냥 인지도가 조금 높아졌다고 생각하자.

“아마 어떻게 통역사로 일하는지도 궁금해할걸요. 그런 시기잖아요.”

“그렇긴 하지.”

3학년 2학기.

이제 진로를 정하고 하나에 몰두할 때다.

회사에 슬슬 원서 넣는 사람도 나오고, 아예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 특출난 사람이었다.

국문과 학생이 번역 일을 하는 것은 종종 볼 수 있겠지만 통역이라는 건 좀 다르니까.

애초에 대학원을 나와 일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 더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의 관심일 수도 있겠네.’

어떤 정보라도 알고 싶고, 또 사회 경험을 하는 선배님들의 말도 듣고 싶은 시기.

냉혹한 사회의 차가운 기운이 점점 들어오는 시기다.

마치 가을이 다가오는 이 9월처럼.

4학년이 되면 쌩쌩 부는 겨울과 같은 시기가 시작될 것이다.

“흠. 그건 그렇고 곡 작업은 잘돼 가?”

“일단 열심히 만들어보고 있어요. 가사도 붙여보고요.”

“잘됐으면 좋겠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강의 기대하고 있어요.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이번 강의는 [시조를 노래하다]라는 책으로 진행된다.

시에 관해서는 공부하면 좋을 듯하다.

대사의 함축과 비유, 그리고 은유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드르륵.

교수님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오늘 첫 강의이고 수강정정 기간이니 따로 출석은 부르지 않겠습니다. 오늘 강의를 듣고 바꾸고 싶은 사람은 바꿔도 됩니다.”

교수가 주의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꽉꽉 채워진 강의실 자리가 보였으니까.

“반 정도 현장 실습을 간 것으로 아는데 제 강의를 빼먹는 건 아까웠나 보군요. 하긴 제가 다른 교수님들보다 낫죠?”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것보다 아끼고 아끼다 4학년 때 전공 선택 하나를 뺄 생각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오늘은 간단히 수업하려고 합니다. 다들 탄식하지 마시죠. 강의 계획서에 전부 다 적혀 있지 않습니까. 뭐 안 보겠지만.”

교수가 먼저 책을 들고 소개를 했다.

자기가 쓴 책이라서 꼭 사서 들고 오라는 레퍼토리.

어쩜 저렇게 하나같이 자기 책을 홍보하는 걸 좋아할까?

책에 관해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여러분들은 제본을 뜨겠지만요. 하하!”

역시 교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고 계셨다.

“그럼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재미없는 얘기를 하면 아무도 관심 안 가지겠죠? 현대에 와서 시가 참 재미없어졌습니다. 저는 여기에 운율이 사라져서 그렇다고 보고 있죠.”

나는 운율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소설에는 일종에 통하는 플롯이 있는 것처럼 시 역시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사라진 운율이라는 것 말이다.

“시는 재미없으니 다른 예를 들어보죠. 다들 랩을 아실 겁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랩은 썩 좋거나 통하는 랩이 아니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요즘 들어 랩에 운율이 생겨났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어를 섞어 써서? 아닙니다. 라임이나 플로우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말 쉽게 설명해 준다.

고리타분하거나 어려운 언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좋아하는 장르를 콕 집어 말한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랩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노래와 시는 어떻게 보면 일맥상통한 부분이 많죠. 랩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전달력과 공감. 길이를 맞춘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시의 형식과 비슷하죠.”

교수님이 커험 하면서 목을 풀었다.

그리고 시작하는 비트 위의 선비.

“언제부터 내가 하는 충고.

내 말은 기피되어졌어.

뜨거운 라떼에 틀딱이 녹아버렸지.

언제부터 생긴 부정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 채.

오지랖 떨어. 개지ㄹ 떨어. 눈치가 보여.

널 위한 거라 말하지만.

귓등으로 듣지 않는 너를 봤어.

오로지 등 뒤에 달만이 내 벗이 되었지.”

짧고 간단하게 하는 랩.

나는 교수님의 딕션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들도 갑자기 랩을 하는 교수님을 보며 이게 무슨 일인지 하는 얼굴이 되었다.

교수님이 민망한지 칠판에 가사를 썼다.

“아무튼, 랩을 이렇게 끊는 것처럼 시의 행간을 띄우는 것조차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의 가사가 나와야 전의 행간의 글을 음미할 수 있죠.”

다음을 들어야 전의 가사를 음미한다라…….

아니, 시의 행간이었나?

교수님이 갑자기 랩을 하셔서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서수현도 정말 열심히 들으며 필기 중이다.

“여기 가사에 달을 넣었는데 시조에서 자주 나오죠. 대나무, 국화, 매화, 난초, 그리고 달. 정말 자주 쓰입니다.”

설마 여기서 자연스럽게 시조의 이야기로 넘어갈 줄이야.

이게 바로 교수님의 수업법인가.

머릿속에 아주 쏙쏙 들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수업을 하면서 시를 만들어보는 것도 과제로 낼 겁니다. 아시죠? 이것도 성적에 들어갑니다. 그렇다고 영어로 섞인 랩을 써오면 혼낼 겁니다.”

몇몇이 찔끔거렸다.

교수님을 보고 끌어 오르는 래퍼의 기질을 버릴 수 없었나 보다.

“흐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다들 흥분이 고조되어 눈이 초롱초롱하네요. 하하. 그럼 다음 시간에 봅시다.”

센스 있게 10분 일찍 끝내 줬다.

아무래도 다들 이번 주 정정 기간에 이 수업은 빼지 않을 듯싶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뭔가 배울 점이 있는 것 같다.

“오빠. 오빠. 가사 쓰는 데 엄청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음. 나도 그래.”

“오빠도 가사 써요?”

“아니. 대사. 대사를 써야 해서.”

“아, 맞다. 대사 쓴다고 했지.”

“응.”

아무래도 유익한 수업이 된 거 같다.

운율은 글의 율동.

뽀짝뽀짝 움직이는 시하가 괜히 생각이 난다.

***

-며칠 전.

시혁과 시하가 나란히 잠을 자고 있다.

언제나 시하가 올라탈 수 있게 시혁이 한쪽 팔을 벌리고 있었고, 시하는 올라타지 않고 시혁이 품에 딱 붙어 있다.

꼼지락거리며 시혁의 옆구리를 공략한다.

간질간질.

시혁이 움찔대며 몸을 들썩인다.

몸은 자면서도 간지럼을 느끼는지 손을 들어 옆구리를 긁는다.

“아?”

그 손길이 시하의 배에 닿아 눈이 떠졌다.

“형아?”

“음냐.”

눈을 벅벅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멍-.

앉아서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분홍색 빛무리만이 오롯이 피어올랐다.

빛무리는 시하의 시선을 이리저리 뺏더니 태블릿으로 쏙 들어간다.

화면에 글자가 뜬다.

[업데이트 중입니다. 1%… 2%… 3%…… 100%]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시하가 태블릿에 손을 갖다 댔다.

부드럽게 분홍색 기운이 손끝에 올라왔다가 몸을 감싼다.

포근하게. 그저 포근하게.

마치 누군가가 따뜻하게 안는 것처럼.

“아?”

시하는 점점 피곤이 몰려왔다.

따뜻함을 느끼며 형아의 옆구리에 쏙 들어갔다.

시혁이 그에 맞춰 몸을 틀면서 시하를 안았다.

포근하게. 그저 포근하게.

분홍색 빛무리와 함께.

“아아.”

시하가 살며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품에서 따뜻한 온기가 뽀짝뽀짝 움직인다.

마치 운율처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