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500)

144화

다음 날.

우리는 오랜만에 은행에 들렀다.

시하의 통장에 얼마가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

딱히 번호표를 뽑지 않아도 ATM기로 통장 정리를 할 수 있다.

참 편한 세상인 것 같다.

“시하야. 여기에 통장을 넣으면 동글동글 동그라미가 찍히는 거 알지?”

“아아.”

시하가 통장을 품에 꼬옥 안았다.

아무래도 얼마나 동그라미가 생겼는지 궁금한 모양.

얼마나 큰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숫자 모양이 변했다는 건 알 수 있겠지.

“그럼 여기에 넣어보자.”

나는 시하를 들어서 통장을 넣게 했다.

스르륵.

통장이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나는 통장 정리를 클릭했다.

스윽. 스윽. 스윽.

통장에 돈이 인쇄되는 소리.

순식간에 통장이 나왔고, 나는 그걸 빼서 시하에게 보여주었다.

“짜잔! 어때! 엄청나지?!”

시하가 얼른 고개를 숙여 통장을 빤히 보았다.

아무래도 엄청난 돈에 놀란 게 아닌가 싶다.

하긴 그렇게 꽤 큰 액수니 놀랄 만하다.

K 회사에서 프로모션도 들어갔으니 굉장히 돈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안 팔리는 이모티콘은 안 팔리기 마련.

하지만 내 영업력이 통한 걸까.

페페티콘은 굉장히 많이 팔렸다.

그렇게 시하의 통장에 꽂힌 돈만 무려 900만 원이었다!

원래 시하 통장에 있던 돈을 합치면 천만 원이라는 거금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천만 원이면 시하가 좋아하는 동글이가 7개!

이제 곧 매출이 푹, 하고 땅까지 떨어지겠지만 반짝 번 것치고는 그래도 선방했다.

‘아무래도 게임회사에 임티가 다 돌려진 게 큰 거 같아.’

시하의 수익에 크나큰 이바지를 한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정도 수익은 얻기 힘들었겠지.

회사 전체에 돌린 거니.

“시하야. 어때? 돈 엄청 많지?”

“아? 아냐.”

“응?”

“동글이. 하나.”

“???”

확인해 보니 10원 단위까지 돈이 들어있어서 0이 하나밖에 없었다.

0이 많아야 돈이 많은 줄 아는 이시하.

너무 귀엽다.

그런 의미로 0을 만들어주면 되겠니?

아무래도 0을 만들어주기 위해 출금해야 하나 싶은 생각을 할 때쯤.

“형아.”

“응? 아! 사실 여기 찍힌 돈은 말이야. 이 부분이 길면 길수록 돈이 많은 거야.”

“아? 요기?”

“응. 전보다 한 칸 더 길지? 그럼 돈이 많아졌다는 거거든.”

“아아! 마나!”

“응. 전보다 많아져서 시하가 부자가 됐네?”

시하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이렇게 가르쳐주면 나중에 더 길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억인데?

‘뭐. 시하라면 억 정도는 금방 모을 수 있겠지. 천재니까!’

어쩌면 유명한 임티 작가로 먼저 성공해서 연봉이 억 소리 날지도?

우리 시하는 형아보다 잘 버는구나…….

잠깐 좋은 꿈을 꿨다.

“다음 달에도 돈이 들어올 거야. 아마 이것보다 적을 테지만 실망하지 말아줘.”

“아아!”

사실 실망은 안 할 것이다.

아직 돈에 대해서 잘 모르고, 들어오는 돈을 보고 얼마나 팔렸는지도 모르니까.

‘다음에 임티가 통과하면 회사에 영업을 한 번 더 뛰어야 하나?’

이래서 이달의 영업왕들은 인센티브가 엄청나나 보다.

“형아. 시하. 부자야?”

“응. 부자야.”

시하가 통장을 턱 하고 덮더니 내 손바닥에 올린다.

“?”

“형아. 장난감. 사!”

“뭐? 이걸로 형아 장난감 사라고? 시하 돈으로?”

“아아.”

“아하하.”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지만 거절하도록 하자.

언젠가 시하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돈으로 모아두고 싶다.

최대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하가 다 클 때까지 그저 내가 번 돈을 쓰며 자랐으면 좋겠다.

이 돈이야말로 정말로 시하가 간절히 원하는 걸 이루게 할 자본금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알기에는 너무 어리겠지?

“형아가 갖고 싶은 장난감 있었는데 그거 하나만 살게. 나머지 돈은 시하가 맛있는 거 사 먹을 수 있도록 아끼자. 알았지?”

“아아.”

끄덕끄덕.

시하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 품에 안겨 왔다.

가슴에 콩콩 머리를 박으며.

“형아!”

“그렇게 좋아? 형아한테 뭔가 해줘서?”

“아아!”

“형아도 좋아~”

그런데 시하야.

장난감 산다는 거 거짓말이야.

이런 자그마한 거짓말을 용서해 주겠니?

나는 기특한 시하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

시하는 형아의 거친 손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이 간질거려 시하의 머리를 긁은 것은 아마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냥 좋아서.”

“시하도. 형아. 조아.”

“형아도!”

***

-동아리방.

간질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꺼냈다.

“오늘 시나리오를 대폭 수정했어요.”

그만큼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빽빽하게 뭔가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보다가 그곳을 지우개로 슥슥 지웠다.

그렇게 지울수록 상념이 지워졌고, 빽빽한 벽돌 같았던 검은 글자들 사이로 하얀 길이 새겨졌다.

답답했던 벽에 도로가 생기니 정체되었던 교통체증도 없어진다.

나는 탕 하며 칠판을 쳤다.

“오늘 제대로 된 시나리오를 보죠. 서사 부분을 게임 형식의 시나리오로 바꿨습니다.”

안경호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 만에?”

“네. 이틀 만에.”

신경환은 어디 한번 지켜보자는 듯이 팔짱을 꼈고, 박경준은 히죽 웃으며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기획 회의 시작하죠. 먼저 여기를 보시죠.”

나는 보드마카로 글자를 적었다.

[조작법]

“어떤 게임이든 도입을 조작하는 법으로 시작하죠. 하지만 정말 조작법을 모를까봐 소개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이거야말로 게임에서의 서사.”

나는 우리가 구상했던 서사 부분을 적었다.

“먼저 주인공과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5초 정도 그림으로나마 보여줍니다. 딱 5초가 좋습니다. 기다림이 너무 길면 지루함으로 바뀌고 결국 제3자 입장이 되니까요.”

그다음은 플레이 방법이다.

초반 서사부터 플레이어를 주인공에 몰입하게 한다.

조작법을 익히게 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간단한 대결로 조작법을 익히게 하는 겁니다. 성석을 구해오는 것으로 퀘스트 패턴, 왕과의 결투로 컨트롤의 패턴을 보여주는 거죠.”

안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알 수 있겠구나? 적이니까.”

“네. 여기서 명확한 적이 왕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려주게 되는 거죠. 그렇게 결국 주인공은 왕에게 지고 게임은 시작하게 됩니다. 그 중간에 나오는 대사는 바로 이거.”

왕에게 배신을 당한 주인공.

끝까지 저항하지만 성석의 반쪽을 먹은 왕을 당해낼 수 없다.

친구를 모두 잃은 상실감과 함께 부활하며 짧은 대사를 내뱉는다.

“왕이 되어야겠다.”

찬탈의 꿈과 친구들의 복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는 짧은 대사 속에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서사가 여기까지 이어지면 플레이어가 강하게 몰입하게 될 겁니다. 주변 분위기나 이에 따른 간단한 소품은 원화가에 넘기겠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 따로 적어뒀어요.”

다들 완전히 달라진 시나리오에 감탄하고 있었다.

게임 전용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됐기 때문.

그렇지 않다면 이런 감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박경준이 눈을 반짝였다.

“여기 옷 디자인도 필요한 부분만 했네?”

“네. 왕의 옷은 다른 건 몰라도 발목 부근에 꼭 십자 표시를 넣어주셨으면 해서요.”

“신마저 아래를 두려는 오만함의 표시라는 건가? 괜찮네. 연출.”

“네. 이런 암시를 잠깐 상상만 했는데 별로였을까요?”

“아니. 좋아. 정말 마음에 들어. 딱 필요한 것만 표시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정확하게 적었어.”

프로그램과 원화를 모두 맡고 있는 박경준이었다.

성격 때문인지 그는 이런 조금 자유롭고 낙관적인 역할에 잘 어울린다.

빈 곳을 상상력으로 잘 채워줬으면 좋겠다.

“사실 부족한 부분도 많아요. 캐릭터에 더 많이 집중했거든요. 예를 들면 공격 모션과 판정 박스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판정 박스란 캐릭터가 데미지를 입는 부분을 말한다.

가상의 사각형을 두고 그 안에 공격 모션이 들어가면 데미지가 들어가는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이걸 파악하면서 게임을 하면 ‘컨트롤 플레이’가 되는 거다.

“이 부분은 기획하면서 짜 맞추면 될 거 같은데. 제 역할은 아니죠.”

나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느새 칠판에는 퀘스트들이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못다 한 과거 이야기는 서브 퀘스트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여기 보시면 다른 친구 캐릭터가 노예상인을 치는 것이 있죠.”

여기에 짧은 대사만 들어가면 된다.

[스승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겠지.]라고.

이 대사만으로도 플레이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노예가 있는 세계관을 ‘경험’하게 된다.

이게 바로 퀘스트식 시나리오다.

“이상으로 수정된 서사였습니다. 나머지는 1막 부분도 이대로 하면 될까요?”

침묵이 이어졌다.

뭐지? 뭔가 잘못했나?

짝짝짝.

안경호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와! 나는 이틀 만에 이 정도까지 이해할 줄 몰랐어.”

“하하…….”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신경환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손을 들었다.

천장 조명에 안경알이 비친다.

그에 따라 눈도 서늘하게 더 빛나는 것 같다.

“뭔가 별로인 점이라도?”

“있지.”

“아…….”

“갑자기 왜 존댓말로 바뀐 거야?”

“네? 아! 응…. 그러네. 근데 설명하기에 존댓말이 편해서. 분위기 잡기도 그렇고.”

“암튼 반말로 진행해줘. 우리 다 친구 먹었으니까.”

“아…. 그거 말하려고 손든 거야?”

“응. 그뿐이야. 난 오히려 감탄하고 있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박경준이 크게 웃었다.

“하하! 우리는 감각으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건 너만 그런 거거든. 반쯤 이론과 반쯤 감각이라고 해 줄래? 너 빼고.”

“아, 왜 그래!”

신경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앞으로의 기획도 이렇게 진행하면 될 거 같아. 나머지 자세한 부분은 같이 기획을 하며 만들면 되는 거니까. 스토리랑 캐릭터는 게임에 맞게 이제 확실히 잡은 거 같아.”

아무튼, 이 중 제일 깐깐한 사람에게 통과됐으면 된 거지.

앞으로 이대로 작업하면 될 거 같았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응? 누가 나 대신 말했나?

알고 보니 안경호가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외친 거였다.

“이제 술술 잘 만들어지겠네. 캐릭터도 괜찮고, 스토리도 좋고. 용두사미, 용두사미 하지만. 사실 용의 머리라도 만들어야 하거든. 시작이 중요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은 많이 부딪치고 완성도를 높이는 게 좋다.

개연성이 부서졌는데도 캐릭터성을 유지해서 인기가 많은 게임도 있다.

“이제 문제는 하나네.”

나뿐만 아니라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경호를 보았다.

안경호가 슬금슬금 눈을 피했다.

“뭐가 문젠데?”

“아니. 크흠. 사실 날랐어.”

“뭐가 날랐어? 프로그램을 날렸다는 소리는 아니겠고.”

“하하…. 작곡. 작곡해 주려던 놈이 튀었어. 자기 유학 갈 거래.”

신경환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갑자기?”

“아. 갑자기는 무슨. 원래 계획에 있었는데 막상 가서 살아보니까 지 생각과 다르다고 다른 놈 알아보라잖아. 어차피 아직 시간 많을 거라면서.”

“어이없는 놈이네.”

“걔가 좀 그래. 하하. 그건 차차 찾아보자.”

“우리도 프로그램 만들고 기획하고 바쁜데 누굴 알아봐?”

“부탁할 사람 없을까?”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아는 사람 있는데…….”

안경호가 눈을 반짝였다.

“진짜?!”

“어…. 퀄리티는 보장 못 해.”

어쩌면 괴작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작이 탄생하거나.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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