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
수많은 시나리오가 있지만, 게임은 궤를 좀 달리한다.
어떻게 보면 영화랑 비슷할 수 있지만 속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정말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여기에 간과한 게 있다는 소리다.
게임 시나리오의 스토리 흐름은 시스템이다.
감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아닌.
오로지 법칙이 있는 것처럼 딱딱 시스템으로 모든 진행이 흘러가는 것이다.
텍스트로만 전달하는 소설과는 다르다.
게임에서는 텍스트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 스토리를 맡긴 걸지도?’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정확히 소설 같은 이야기를 길게 쓴 적이 없다.
게임 시나리오는 시스템으로 흘러가고 플레이어는 경험을 원한다.
한마디로 재미는 캐릭터와 함께하는 경험이다.
그저 문자로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런 의미에서 시하의 움직임도 시스템처럼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퀘스트.
이모티콘을 그리라는 미션이 왔다.
플레이어 시하는 이모티콘을 그린다.
머릿속에 있는 그 형상을 그려내며 경험을 얻는다.
거기에 따른 보상(돈)이 들어온다.
‘이게 시스템이지.’
이처럼 간단한 시스템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경험을 줄 수 있어야 재미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텍스트적인 대사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넣으라는 소리.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캐릭터를 시하로 모티브를 잡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시하야말로 대사가 별로 없으니까.
‘혹시 이 세상은 게임 속 세상이고 시하는 게임 캐릭터가 아닐까?!’
그렇다면 꼭 플레이를 해 보고 싶다.
총알을 빚내서 현질을 할지도 모른다.
‘흠흠.’
헛생각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뭔지 모를 외계어로 이루어진 프로그램.
하지만 그 방식만 알면, 해석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머릿속에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 있어 동아리가 짠 프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하나의 알고리즘.
하나의 시스템.
오로지 명령어만이 전부인 세상.
그렇다 보니 게임 속 세상은 실제 세상처럼 치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 세계관에는 버그라는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알려주는 게 바로 플레이어의 경험.
이른바 베타테스터다.
그렇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로그래머들이 시스템을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게임이란 시스템의 집합체.
컴퓨터의 세상은 신기하다.
‘시스템의 이해가 부족했던 건가?’
나는 그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시나리오를 짜야 하냐는 것인데.
“형아!”
“응! 시하야.”
“모야?”
시하가 노트북의 프로그램을 가리켰다.
괴상한 문자의 나열이 신기한가 보다.
“이건 말이야. 퀘스트야!”
“캐스투?”
나는 시하가 이해하기 쉽게 머리를 굴려서 손쉬운 단어로 말해 주었다.
“응. 시하가 게임에서 어떤 심부름을 받고 수행해 나가는 거지.”
“아아.”
“그럼 시하 캐릭터. 오늘 형아가 임무를 주지.”
“임무?”
“그래! 오늘의 임무는 심부름이야!”
“아아!”
전에 어린이집에서 내 필통 심부름을 하긴 했지만, 정확히 물건을 사러 간 건 아니었다.
물건을 사러 가지 않는다면 심부름이 아니다.
돈을 주고 거스름돈도 잘 받아와야 진정한 심부름 아니겠나.
“시하야. 오늘 햄으로 맛있는 걸 만들 거야. 햄 알지?”
“아아!”
“자. 이걸로 햄을 사와야 해. 알았지?”
내가 만 원을 꺼내자 시하가 도도도 달려가더니 펭귄 가방을 가져왔다.
거기에 알뜰살뜰하게 만 원을 소중히 넣더니 가방을 멨다.
“정말 잘 사 올 수 있어? 저기 슈퍼에만 갔다 오면 돼.”
“아아!”
“그럼 형아가 문 열어놓고 있을 테니까 사러 갔다 와야 해.”
“아아.”
나는 문을 열어주고 시하를 떠나보냈다.
그러곤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모자와 마스크를 챙기고 뒤를 따랐다.
과연 시하가 퀘스트를 잘할 수 있을지 지켜볼 차례였다.
뚜벅뚜벅.
펭귄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나아간다.
딱딱한 아스팔트지만 말랑한 발걸음이 바닥을 통통 튀게 하는 느낌이다.
흔들리는 엉덩이는 중심을 잡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시 멈춰 선다.
멈춰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에.
“아아! 개미!”
그래. 개미가 일렬로 과자 부스러기를 들고 이동하고 있다.
시하는 발로 밟지 않도록 개미가 전부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마치 건널목을 건너라고 차들이 기다려주는 것 같다.
“아아.”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시하가 그대로 쪼그려 앉아 개미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개미의 줄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하는 모양.
아무튼, 시하는 귀엽다.
난 여기서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게임을 하면 필연적으로 이동이라는 걸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시하가 어떤 생물을 보는 것처럼 중간에 사냥터가 있거나 서브퀘스트가 존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플레이어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냥 이동만 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시하 덕분에 시나리오가 중간중간 어떤 식이로 뻗어 나가야 할지 이해가 된다.
이걸 게임이 아니라 시하를 보고 알게 되는 게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가따!”
개미가 다 지나갔는지 이제야 시하가 움직인다.
어느새 근처 슈퍼까지 도착.
안으로 들어가자 슈퍼마켓 아저씨가 시하를 반긴다.
“하하! 시하 아니냐? 형은 어디 갔어?”
“시하. 심부.”
“그래. 시하가 신부고 형아가 신랑이야? 하하하!”
“아?”
아저씨의 아재 개그는 시하에게 통하지 않았다.
원래 개그란 설명하면 실패하는 법.
아저씨는 시하가 신랑, 신부를 모른다는 걸 알았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크흠. 형이 없는 걸 보니 심부름을 왔구나?”
“아아!”
“그렇단 말이지. 그럼 심부름 파이팅이다.”
“아아!”
시하가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안을 누볐다.
그사이에 아저씨가 바깥을 힐끗 쳐다보았다.
딱.
눈이 마주치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흠흠.”
아저씨의 얼굴이 편안하게 변했다.
자기에게 맡기라는 듯 엄지를 번쩍 치켜들며 나에게 사인을 준다.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나는 몰래 시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햄. 햄. 햄?”
시하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햄을 찾는다.
그러다 햄을 발견했는지 팔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닿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저씨에게 돌아오는 게 보이자 나는 몸을 깊숙이 숨겼다.
“아찌!”
“응? 왜 그래? 못 찾았어?”
“아냐. 햄! 햄! 시하 아라.”
“오! 햄은 형아를 부르는 말이지. 푸하핫! 시혁 햄. 시혁 햄.”
“아?”
어이쿠야.
나는 손으로 눈을 감싸 쥐었다.
아재 개그는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시하를 보며 다시 한번 웃은 아저씨가 계산대를 나왔다.
“햄을 못 꺼내서 그러는 거지?”
“아아.”
“아저씨가 꺼내주마.”
“고마어!”
“그럴 때는 고맙습니다. 하는 거야.”
“고마어니다!”
“‘니다’만 붙이면 되는 게 아닌데? 고.맙.습.니.다.”
“고맙수!”
“푸하핫! 나보다 더 개그에 소질이 있는 거 아니냐?”
그럴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틈으로 눈가를 좁혔다.
진열대와 그 위의 물건들이 내 몸을 가려줘서 다행이었다.
근데 이쪽도 잘 안 보이는 게 문제였다.
“저 남자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사실 어린 동생이 심부름 중이거든요.”
아줌마 둘이 그러냐면서 호호 웃으며 지나갔다.
너무 수상해 보이긴 했다. 크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퀘스트는 시하에게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거니까.
‘주인공의 베리에이션인가?’
게임에서 주인공의 관계가 허술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조력자 관계, 우호 관계, 적대 관계 등을 여러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력자 관계겠지.
“시하야. 햄이 여러 가지 있는데 어떤 걸 줄까? 줄줄이 햄, 동그란 햄, 뭉텅이 햄이 있는데?”
“아?”
시하가 혼란이 오는지 고민에 빠졌다.
이게 바로 게임에서 말하는 분기점이자 선택지였다.
여러모로 오늘은 게임 같은 하루다.
과연 시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자. 어떤 걸 할까?”
시하가 양손 검지를 모두 들어 머리 양옆을 톡톡 두드렸다.
다 맛있어 보여서 고민되는 모양.
“아!”
“오! 그래. 결정했어?”
“아아! 이거!”
시하가 펭귄가방을 내려놓고 만 원을 꺼냈다.
“만 언치!”
“푸하핫! 여기가 시장인 줄 알아? 돈 되는 대로 해달라고?”
“아아.”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시장에서 장을 볼 때 내가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만 원에 저걸 다 사는데 최선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하여간 시하는 따라쟁이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다.
어쩌면 플레이어들은 예상치 못한 진행에 더욱 재밌어할지도 모른다.
자칫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는 반전을 잘 쓰면, 이야기가 더욱 재밌어지는 것처럼.
“그래. 만 원이면 이 세 종류 다 살 수 있지. 가자.”
“아아.”
아저씨가 세 종류 햄의 바코드를 띡띡 찍고 시하의 가방에 소중히 넣어주었다.
“자. 돈을 거슬러줄게.”
가격은 9650원.
거스름돈 350원.
시하의 손에 네 개의 동전이 떨어졌다.
“근데 시하야. 거스름돈 계산은 되니? 아니다. 3살이 무슨.”
“아냐. 시하 아라. 숫자!”
“오! 숫자 알아?”
“아아!”
시하가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서이, 너이. 마자.”
“응? 진짜 맞아?”
“아아. 시하. 너이. 아라.”
“다섯은 몰라?”
“다서?”
“아. 아니다. 자기 나이만 말할 수 있으면 되지.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 돼.”
암. 귀여우면 다 잘살 수 있다.
크흠. 시하는 다섯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5)는 알아도 다섯은 모르는 거다.
“자. 다 됐다! 거스름돈 잘 챙기고 이제 형아에게 가 봐.”
“아아! 아찌. 바이바이.”
“그래. 바이바이.”
시하가 그렇게 손을 흔들고 슈퍼를 나섰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잠깐. 이렇게 가면 집에 먼저 도착하는 건 시하였다.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먼저 가 있는 것도 시하의 안전 부분에서 곤란했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시하가 너무 귀여워 납치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시하가 집까지 도착하며 나를 불렀다.
“형아!”
신발도 휙휙 날려 벗으며 자신이 왔음을 큰소리로 알렸다.
“형아!”
도도도.
방문을 들어가더니 내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온다.
너무 빨리 돌아와서 내가 신발을 벗는 장면을 딱 들켰다.
“형아?”
“응. 시하야. 신발을 벗고 나서는 이렇게 가지런히 놓아야 하는 거야.”
정말 자연스러웠다.
시하의 신발을 정리하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신발장에 위치할 수 있었으니까.
“정리!”
“응. 심부름은 잘 갔다 왔어?”
“아아.”
시하가 부스럭부스럭 가방에서 햄을 꺼냈다.
역시 햄은 세 종류가 모두 있다.
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동전도 꺼냈다.
“와! 진짜 잘 사 왔네?”
“아아!”
“이제 시하에게 심부름 맡겨도 되겠다. 다 컸네!”
“아? 시하 키. 자가.”
시하가 내 키와 자기 키를 번갈아 보았다.
그 말이 아닌데.
아무튼, 시하는 귀엽다.
“하하. 그래. 잘됐네. 이야. 진짜 잘 샀다. 오늘 햄으로 배 터지겠는데?”
“햄. 마시써.”
“응. 햄 맛있지. 동그란 소시지도 사 왔네. 여기에 달걀 묻혀서 구워 먹으면 진짜 맛있는데.”
추억의 분홍 소시지.
도시락에 넣으면 딱이다.
“잘했어!”
나는 시하를 안으며 마구마구 칭찬해 줬다.
이제는 보상을 줄 차례.
“심부름 잘했으니까 시하에게 상을 줄게. 자. 여기 용돈이야. 아껴 써야 해?”
나는 거스름돈을 다시 시하에게 줬다.
동전이 좋은지 시하가 참 좋아했다.
“형아. 이거. 통장.”
“그래. 이거 통장에 꼭 넣어야지. 우리 시하 똑똑해.”
“아아!”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하야. 그럼 통장에 넣으러 은행에 갈까?”
“아아.”
아마 시하는 모르겠지.
자신의 통장에 얼마나 돈이 들어올지.
내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시나리오를 잘 쓸 수 있을 거 같아.’
플레이어의 재미는 경험이다.
텍스트의 비중을 줄이고, 제한된 연출로 그 캐릭터에 몰입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답은 나와 있다.
앞으로 기획이 좀 더 빠르게 진행될 것 같았다.
이게 다 시하 덕분이다.
혼자 끙끙 앓고 있었으면 미묘한 어긋남이 계속 이어졌을 거다.
“시하야. 고마워.”
“아아.”
“내일 통장 기대해.”
“아아.”
그렇게 나는 시하와 맛있는 햄을 먹고,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의 수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