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따다다다다.
세찬 비바람이 창을 두드린다.
콰광! 콰광!
마치 전쟁의 폭음 소리가 이럴까?
따발총 소리와 포탄 소리가 창을 통해서 들리는데 꽤 섬뜩하다.
이런 날씨 때문에 어린이집은 오늘 쉰다.
“아아! 형아!”
“응?”
시하가 어느새 펭귄 비옷을 입고 나왔다.
단추도 안 잠그고 나에게 보여주는데 밖에 나갈 태세였다.
어제 그렇게 태풍에 대해서 알려줬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하야. 지금 나가면 날아간다니까?”
“시하. 형아. 이써.”
“형아도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해를 했는지 시무룩한 채로 펭귄 비옷을 벗었다.
“페페.”
“페페는 나중에 태풍 지나가고 비가 올 때 또 입고 나가자. 알았지?”
“아아.”
다행히 시하는 말을 잘 들었다.
비옷은 벗은 뒤 자기 딴에 열심히 접는데 아주 엉성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옷장에 넣는다.
나는 다시 옷을 꺼내서 반듯하게 접어서 넣었다.
뭔가 스스로 하긴 하는데 어설픈 점이 참 귀엽다.
“시하야. 태풍도 오는데 뭐 하고 놀까?”
“아? 형아 가치. 가치. 노라.”
“응. 같이 놀 건데 뭐 하고?”
시하가 검지를 들고 머리에 콕 찍으며 고민을 했다.
저건 또 어디서 배운 건지.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태풍이 왔을 때 할 수 있는 놀이를 생각했다.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에 무언가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직 못 정했어?”
“아아.”
시하가 뭘 할지 모르는지 그냥 내 다리에 포옥 안기며 머리를 콩콩 박았다.
나는 다리를 덜덜 떨면서 폰의 진동 모드가 되었다.
덜덜덜.
“아아!”
시하는 그게 재밌는지 함께 덜덜덜 떨었다.
“그럼 우리 태풍이나 만들까?”
“아? 태풍?”
“응. 전에 형아가 태풍이 이렇게 원 모양으로 움직이는 바람이라고 했잖아.”
“아아.”
“그 태풍을 만들어보는 거야. 이 집에.”
시하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정확히는 태풍을 형아랑 같이 그려보는 거야.”
“아아!”
나는 방에 들어가 돌돌 말린 파란색 도화지를 꺼냈다.
어제 문방구에 들려서 산 것이다.
시하와 함께 여기다 태풍을 그릴 것이다.
“짜잔! 여기는 바다야. 기억나? 전에 바다에 갔잖아.”
“아아.”
“태풍은 바다에서 생기거든. 그래서 오늘은 이 하얀 물감으로 태풍을 그릴 거야. 왜 하얀색으로 만드는지 알아?”
“모야?”
“이 하얀색은 구름이거든. 시하는 바람이 안 보이지?”
“아냐. 시하. 바람 아라.”
“응. 알지만 눈에 안 보이잖아.”
“아냐.”
아무래도 착한 어린이 눈에는 바람이 보이나 보다.
그런 거로 하자.
“아무튼, 태풍이 바람으로 구름을 막 가지려고 해서 이렇게 하얀색으로 구름을 표시하는 거야. 그럼 바람이 동그랗게 움직이는 게 보이겠지?”
“동글?”
“응. 동글동글. 그럼 어디 한번 해 볼까?”
“아아.”
나는 물감을 작은 대야에 짜서 부으려고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비닐을 까는 걸 잊었다.
“잠시만. 준비 좀 할게.”
나는 황급히 비닐로 안전지대를 만들고 큰 붓을 갖고 왔다.
시하의 옷도 갈아입혔다.
안 버리고 놔둔 옷을 입혔는데 굳이 고집해서 멜빵바지를 입혔다.
예술은 원래 멜빵바지에 물감을 좀 묻혀야 하는 법이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아아!”
그렇게 우리는 페인트용 큰 붓을 들고 물감을 치덕치덕 바른 후에 도화지에 갖다 댔다.
“자. 태풍이 만들어진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하나를 그렸다.
내가 봐도 꽤 잘 그린 모양이다.
“아아!”
시하도 붓으로 그렸는데 꽤 느낌 있다.
살짝살짝 끊어서 붓으로 터치하는데 날카로운 느낌을 살렸다.
나보다 더 잘 그리는 것 같다.
역시 실력이 어디 안 가는구나.
뭐, 남들이 보면 그냥 소용돌이를 그린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어때? 태풍이 만들어졌지?”
“아아.”
“보통 이렇게 소용돌이 모양이야. 그런데 더 재밌는 태풍 모양을 만들어도 돼.”
말 그대로 상상에 한계는 없으니까.
나는 또 하나의 도화지를 꺼내서 시하가 자유롭게 그리도록 했다.
시하는 고민을 하다가 붓을 놓고 손에 치덕치덕 바른다.
나는 그럴 줄 알고 허허하며 웃었다.
이럴 거 같아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형아.”
“응. 보고 있어.”
“이케. 이케.”
“응. 잘한… 풋!”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하가 도화지가 있는 땅에 손을 짚고 엉덩이를 쏙 내민 채 돌고 있었으니까.
뒤뚱뒤뚱.
“아?”
바닥에 있는 도화지도 함께 돌기에 나는 손으로 잡아주었다.
“자. 이제 돌아도 돼.”
“아아!”
뒤뚱뒤뚱.
허리를 숙인 시하가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한다.
도화지 위에 하얀 손자국이 원을 그리며 팽이 모양처럼 빙글빙글 회전한다.
그렇게 동심원이 점점 커지며 태풍이 성장한다.
그러면서 내 손은 밟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게 귀여웠다.
푹.
“억!”
결국, 원이 커지며 엉덩이가 내 얼굴에 닿았다.
“아? 형아?”
“형아는 태풍의 피해를 받았어…. 역시 태풍은 위험해…….”
나는 그대로 태풍에 날아가 쓰러진 척을 했다.
“형아! 개차나?”
찰싹찰싹.
“으악!”
시하가 내 걱정하느라 얼굴을 하얀 손으로 두드렸다.
괜히 놀려 먹으려고 한 죗값인가 보다.
본의 아니게 화장을 하게 된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형아. 개차나?”
뭔가 시하의 목소리가 다른 의미로 들린다.
얼굴에 물감 묻은 거 괜찮냐고.
“형아. 안 괜찮은 거 같아…….”
“아? 배 아파?”
아니. 그게 왜 배 아픈 거로…….
“으악! 잠시만 시하야!”
하얀 손이 내 배를 향해 다가왔다.
이러다 내 옷에 물감이 다 묻겠다.
“형아. 이제 괜찮아. 괜찮아.”
“개차나?”
“응. 괜찮아…….”
안 괜찮다고 계속 말하면 보디페인팅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시하는 그제야 안심했는지 다시 자기 태풍을 만들러 돌아갔다.
아직 안 끝났니?
잡아줬다가 또 엉덩이를 얼굴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화지를 잡아주려고 하자 시하가 또 손에 물감을 치덕치덕 발랐다.
“형아.”
“그래. 또 잡아주면 되는 거지?”
“아아.”
그렇게 시하의 예술의 혼이 빛나고 있을 때.
쾅쾅쾅!
비바람이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쾅쾅쾅!
그래. 이렇게 주기적으로.
“형아. 문!”
“응. 태풍이 문을 두드리네. 열어주지 말자.”
“아냐. 문.”
“응?”
시하가 현관문을 가리켰다.
쾅쾅쾅.
알고 보니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맨발로 현관까지 가서 말했다.
“누구세요?”
“형님. 접니다.”
“아니. 동환아. 벨 놔두고 왜 문을 두들기는 거야.”
“오랜만에 두들기고 싶어서요.”
그때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악! 시하야. 발에 다 묻히고 오면 어떡해.”
“아?”
시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바지에 시하의 손자국도 찍혔다.
이거 지워지겠지? 물감이니까…….
“형아. 태풍.”
“응?”
“문 안 대.”
“문 열면 안 돼?”
“아아. 태풍 와.”
“아. 문 열면 태풍 들어온다고?”
“아아.”
아무래도 아까 태풍이 문을 두들긴다는 표현을 기억하나 보다.
기억력 좋네.
“하지만 밖에 백동환 형도 있는걸?”
“아냐. 백동, 태풍 가치 와. 문 안 대.”
“아. 그래? 동환아. 태풍이랑 같이 들어온다고 시하가 문 열어주지 말래.”
“아! 형님! 너무하십니다. 시하야. 살려줘! 태풍이 나 잡아가려고 해.”
그걸 또 시하에게 맞춰주는 백동환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야. 너 너무 근육근육해서 태풍이 못 잡아가. 그치 시하야?”
“아?”
시하가 백동환을 끌고 가는 태풍을 상상하는지 인정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끄덕끄덕.
“백동. 이겨.”
“동환이가 태풍을 이긴다고?”
“아아.”
아무래도 시하의 상상 속에는 백동환이 태풍을 이겼나 보다.
하긴 보이지 않는 태풍보다야 2미터 거구인 백동환이 훨씬 더 세 보이긴 하다.
“동환아. 그렇다는데?”
“아~ 형님~ 지금 밖에 난리입니다. 들여 보내주세요.”
“시하가 안 된대. 태풍하고 싸워서 이기면 열어줄게.”
“네. 알겠습니다. 네 이놈! 태풍! 덤벼라!”
저음의 목소리로 태풍과 실감 나게 싸우기 시작한다.
역시 성우라서 그런지 두 인물을 목소리가 확실히 구분된다.
“으악! 태풍 살려~ 너무 강해~”
“하하! 시하야. 태풍을 물리쳤어! 이제 열어줄래?”
“아아!”
그렇게 시하의 승인을 받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밖에서 열연을 펼친 백동환을 칭찬해 주고 싶다.
“고생했어.”
“후우. 이 집에 들어오기 왜 이렇게 힘든 겁니까?”
“아마 네가 이렇게 해서 앞으로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이것보다 더요? 안 됩니다…….”
“아아! 백동!”
“그래. 시하야. 안녕. 우와! 이게 뭡니까? 여기 집 안에 문 열어 놓으셨어요? 이미 태풍이 한바탕 지나갔는데요?”
“하하…….”
집 안 꼴이 말이 아니긴 하다.
그래도 뭐 시하가 즐거워하면 괜찮다.
어차피 치울 것도 별로 없다.
비닐을 바리바리 싸서 버리기만 하면 끝이니까.
여기까지 바닥에 찍힌 발자국은 닦아야 하겠지만.
“태풍을 만드는 중이었어. 저기 보이지? 시하가 그린 그림.”
“와! 안팎으로 태풍 풍년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서 들어와.”
그렇게 백동환을 안으로 들였다.
그래도 손님으로 왔는데 대접해줄 게 마땅치 않아 주스를 꺼내 주었다.
“자. 마셔. 시하야. 아~”
“아~”
시하는 손을 쓸 수 없으니 내가 빨대를 대령해 주스를 마시게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오는 사람입니까?”
“그건 아닌데…….”
“그냥 태풍도 오는데 혼자 있기 무서워서 왔습니다.”
“그 덩치에 무서운 것도 있어?”
“크흠. 사실 시하 지켜주러 온 겁니다.”
“그래. 잘 왔어.”
“그리고 때마침 재밌는 이벤트도 하더라고요. 태풍 이름 짓기. 인별에서 하는 이벤트인데 시하도 함께 참여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오! 그래?”
인별에 있는 이벤트는 5명을 선정해 우산을 주는 것이었다.
이름과 뜻을 같이 적어 올리면 됐다.
매번 이런 이벤트는 어디서 찾는지 모르겠다.
“재밌겠네. 시하야. 우리도 이름 지어서 올려볼까?”
“아?”
“태풍 이름 짓기야. 뭐로 할래?”
시하가 고민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바닥을 가리켰다.
“형아. 저거. 발.”
“응? 아! 저거 발자국?”
“아아! 발자.”
“밟으면 안 되고. 발자국이야. 오! 좋은 이름인데?”
“아아!”
백동환도 동의를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 폰으로 인별을 들어간 뒤에 이름과 뜻을 적어 남겼다.
[태풍 이름 : 발자국.]
[뜻 : 그냥 지나가기 아쉬워 흔적을 진하게 남긴다. 마치 발자국처럼.]
“다 됐다. 어때?”
“아주 좋습니다. 당첨될 거 같네요.”
“그런가? 그런데 참여율이 저조하네.”
“아무래도 3일 동안 하는 즉흥성 이벤트라서 그런가 봐요.”
“그런가? 그럼 우산 받을 수 있으려나?”
“아마 당첨 확률이 꽤 높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하가 나를 불렀다.
“형아!”
“응? 아! 아직 안 끝났어?”
“아아.”
“동환아. 너도 할래?”
“오! 저도 한 미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여기서 백동환이 특이한 태풍을 그렸다.
소용돌이 모양인 태풍에 근육근육한 팔을 그린 것이다.
지켜보니 조금 징그러웠다.
꼭 자기 닮은 것을 만든다고 하니 너무하다며 우는 척을 했다.
그리고 시하는 그 그림을 보고 ‘백동!’이라고 손으로 가리키며 확인 사살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
언제 태풍이 지나갔냐는 듯 맑은 햇빛이 땅을 비췄다.
푸른 하늘을 보자 날씨 좋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시하야. 어린이집에 가자.”
“아아.”
“날씨 좋다!”
“날시. 조타!”
그렇게 내 말을 따라 하는 시하와 함께 차를 세워둔 곳에 갔는데…….
“헐?! 저 벽돌 뭐야?!”
앞 유리창에 벽돌이 얹어져 있었고 살짝 깨져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시하 차…….”
시하는 충격을 받은 듯이 입을 벌렸다.
정말 태풍은 그냥 지나가기 아쉬워 진한 ‘발자국’을 남겼다.
본의 아니게 태풍의 무서운 점을 시하가 알게 되었다.
“레드…….”
레드는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