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500)

139화

영감.

일상 속에서 무언가 인생의 힌트가 될 수 있다.

수많은 발견과 창작이 그런 우연과 필연이 겹쳐져 만들어진다.

신기하게도 공부를 하는 것조차 또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란 책에 수학적 재미가 숨어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재미난 점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떤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까?

어디서 영감을 얻을까?

그거야말로 당연하게도 경험이었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아아.”

시하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 안에 감정 표현이 다양하다.

사실 무뚝뚝하지 않다.

근래에 와서는 더더욱 활발해진 느낌이 들었다.

‘시하는 주인공이지.’

그래서 시하를 주인공으로 잡았다.

따뜻하고 여러 감정이 넘쳐나지만, 겉으로는 잘 모르는.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아는.

그런 주인공.

그렇다고 마냥 어리지 않게 나의 성향과 시하의 성향을 섞었다.

그리고 힌트가 된 것이 문도환이다.

아픈 짝사랑을 노래했지만 어디 사랑이 남녀 간의 사랑뿐이겠는가.

한순간에 멀쩡해 보였던 인간도 때로는 미칠 때가 있는 법이고, 사실 또 다른 일면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악역을 문도환으로 정했다.

하면 안 되지만 해버린 그 사랑을.

“음. 괜찮겠네.”

나는 노트북을 노려보며 손을 움직였다.

번역할 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벽돌을 쌓아나갔다.

“모야?”

시하가 방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시하야. 안 자고 있었어?”

“아냐. 자. 형아. 쉬.”

“아. 쉬 누고 자려고?”

“아아.”

“그래. 화장실 가자. 화장실.”

문도환과 노래방을 마지막으로 헤어지고 시하를 재웠다.

그런데 이렇게 금방 눈을 뜰 줄 몰랐다.

옆에서 열심히 재웠는데…….

“형아. 모야?”

“응? 아. 형아가 뭐 좀 일할 게 있어서.”

“시하랑. 가치.”

“시하랑 같이 일할까?”

“아냐. 자. 가치.”

“아…. 같이 자자고?”

“아아.”

“그래. 그러자.”

나는 노트북도 덮지 않고 시하랑 방에 누웠다.

얇은 이불을 덮어주고 배를 토닥였다.

“자자.”

“아아.”

나도 이렇게 누워 있으니 잠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어두운 장막 속에서 유영할 수 없었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있었다.

“코오.”

시하의 자는 모습을 보고 다시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는다.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힘든 일인 걸 알고 있음에도 막상 시행하는 순간 몸의 피로가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힘차게 키보드에 손을 뻗는다.

이 손길이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하며.

오늘도 달린다.

두다다다. 두다다. 두다.

느려지는 손길을 붙잡으며.

[Missed each]

제목을 적었다.

***

날이 밝았다.

여전히 분주하지만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며 시하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런 뒤 곧장 게임 개발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어제 적은 시나리오 공유와 방향성을 정하기 위해서.

제발 긍정적인 반응이 오기를.

그렇게 빌며 문을 열었다.

달칵.

동아리방은 완전히 정리되어 다시 어질러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녕.”

“어. 그래.”

먼저 반겨준 건 안경호였다.

“시나리오는 좀 생각해 봤어?”

“어. 최대한 의견들을 반영해서 만들어봤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아직 안 들어봤잖아?”

“안 들어봐도 알지.”

안경호가 의자에 바짝 당겨 앉았다.

뒤이어 신경환이 안경호의 머리를 책으로 내리쳤다.

탁!

“아! 왜!”

“호들갑 떨지 말고 네 자리 가서 앉아.”

“여기에 자기 자리가 어딨어?”

“그런 건 없는데 네 전용석은 있지. 저 칠판 가까이 있는 쪽으로 앉아.”

“쳇. 그건 이제 경환이 네가 하면 되지.”

“안 가?”

“간다. 가.”

안경호가 투덜대며 칠판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한 명이 더 보이지 않았다.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신경환이 말했다.

“경준이는 좀 있다 올 거야. 콜라 사러 갔거든.”

“아…….”

벌컥.

부르기 무섭게 박경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폰을 꺼내며 시계를 보더니 땀을 닦았다.

“아. 덥다. 안 늦었지? 방금 정각 됐다.”

털썩 앉으며 티셔츠로 부채질한다.

아직도 더운 날씨이기는 하다.

빨리 시간이 지나서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시혁아. 안녕.”

“어. 그래.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 솔직히 시나리오를 들고 오기는 했는데 긴장이 돼서.”

“그래. 그럼 시작하자.”

나는 준비한 A4 용지를 꺼내서 세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먼저 주인공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 짧게 이야기가 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다섯 명의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서로가 어릴 때 뛰어놀던 추억을 상기하며 커갔던 현재.

각자의 가문 중 무력으로 강한 주인공의 가문.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 불사를 바라는 왕이 ‘성석’을 구해오게 하는 거지. 이른바 성석전쟁이야.”

“성석?”

“응. 그냥 이름을 붙인 거야. 아무튼, 이 성석을 구하기 위한 주인공은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서.”

“왕이 명령해서 말이지?”

“강압적 명령이지. 친구들의 목숨줄을 쥐여 잡고.”

“오. 흥미진진한데?”

“그렇게 성석을 구해오면 왕에게 바치는 거야. 친구 넷을 풀어 달라고.”

스르륵.

안경호가 흥미 있게 들으며 A4를 넘겼다.

“그런데 왕이 주인공을 죽이네?”

“애초에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거든. 하지만 주인공도 생각이 있어서 성석의 다 주진 않았지. 반만 준 거야.”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는구나? 성석으로 살아서.”

“맞아. 왕은 결국 반쪽짜리 불사자에 불과하지. 약점이 있는.”

“근데 주인공은 반쪽의 성석으로 되살아나는 거야?”

“그래. 바로 살아나는 게 아니라 장례식이 끝나고 난 다음에야 살아나게 되지. 모든 걸 잃고.”

“그때부터 시작되는 복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기점.

분기점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을 해 봤다.

“분기점을 만들기 상당히 어렵더라. 그래서 다섯으로 쪼갰어.”

“응? 다섯?”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기점을 만들기 힘들다면 차라리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만들자고.

“왕이 친구들을 죽였지만, 친구들도 다들 살아있는 거로.”

“어떻게?”

“불사가 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었던 거지.”

“오?”

“각자가 불완전한 불사가 되는 거야. 또 다른 성석이 있었다는 거로.”

“그럼 성석 별로 효과가 달라야 하겠는데?”

“응. 그래서 각자의 이야기를 생각해 봤지.”

성석은 총 다섯.

주인공이 가진 재생을 비롯한 부활, 죽음, 불노, 빙의.

안경호가 물었다.

“부활은 대충 살아나는 것 같고 불노는 안 늙는다는 거 같네. 나머지 두 개는 뭐야?”

“죽음은 이미 죽어있어서 죽지 않는 거야. 뱀파이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아하…. 빙의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 몸에 빙의하는 거야. 혼은 죽지 않으니까.”

“귀신 같은 거네.”

“그렇다고 완전히 죽지 않는 거는 아니지. 말 그대로 불완전한 성석이니…. 약점은 있고…….”

“설마 다섯 개 다 모아야 완전한 불사자가 되는 거?”

“뭐 일단 그렇게 시나리오를 짜긴 했는데…. 어때?”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스케일이 상당히 크긴 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분기점이고 본편의 루트는 주인공 중심으로 이야기가 흐를 것이다.

침묵이 이어진다.

먼저 입을 연 건 안경호였다.

“괜찮은데? 너는?”

“나도 괜찮아. 스케일이 커서 그렇지. 만들면 재미는 있겠다. 뱀파이어나 귀신은 또 익숙한 소재기도 하니까.”

“아니. 다른 것도 무난하게 익숙한 거 아니야? 그걸 한데 묶은 것뿐이고. 이거 진짜 잘 적어야겠는데?”

셋 다 긍정적인 반응.

나름대로 대사도 적어놓았는데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데 이미 셋이서 논의를 거치고 있다.

캐릭터 디자인과 음악, 그리고 앞으로 프로그래밍해야 할 것들.

“그런데 논의한 것들 다 만들 수 있는 거야?”

내 말에 안경호가 안경을 치켜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다는 못 만들겠지. 대충 빙산의 일각만 보여주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

“아…. 빙산의 일각?”

“어. 대략 초반 서사 부분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그 뒤는 또 다르게 만들려고 해.”

“어떻게?”

“시뮬레이션으로? 그러면 그 뒤의 스토리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러면 좀 더 빨리 되겠네?”

“그렇지. 그런데 스케일만 보면 무슨 미드로 나와도 될 것 같은 느낌이네.”

“그 정도는 아니다. 시나리오가 아니라 아직 거의 콘티 수준인데 뭐.”

“아니야. 여기 인물들 성격들도 적혀 있고 상상이 되네. 근데 주인공 이름이 시하야?”

“…그건 가명이야…….”

“어쩐지 다들 한국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악역인 왕 이름도 도환이고. 어디 보자 친구들 이름도 무슨 한국이네.”

박경준이 옆에서 승준, 하나, 종수, 연주라고 말하며 킬킬 웃었다.

나는 머리를 긁었다.

이름을 일일이 생각하기에 귀찮아서.

그리고 캐릭터 성격을 넣는데 은근히 이입이 잘되어서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뿐이다.

“이름이야 나중에 정하자.”

아마 한동안은 이 이름이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

죽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면 피닉스를 빼놓을 수 없다.

죽어도 다시 살아는 피닉스.

이 여름에 늘 등장하는 태풍 역시도 피닉스 같다.

집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번 태풍은 매미와 비교해…….]

고놈의 태풍 이름 매미는 매번 뉴스에 소환되고.

“시하야. 매미 알아? 매미?”

“아아. 매미! 맴맴. 고추 먹고 맴맴.”

“어…. 그렇지. 고추 먹고 맴맴 하는 게 매미지.”

내가 질문을 잘못했다.

태풍이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태풍 알아? 태풍?”

“모야?”

“태풍은 말이지…….”

나는 이불을 가져와 시하의 목에 매주었다.

그리고 번쩍 들어서 휙휙 돌았다.

“시하를 이렇게 들어서 날려버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동그랗게 원을 그리는 바람이야.”

“아아!”

태풍이 뭔지는 관심 없고 시하는 열심히 날아다니는 게 즐거운가 보다.

하지만 태풍을 무서운 점을 알게 해줘야겠다.

그래야 함부로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안 할 것이다.

물론 시하 혼자 집에 나가지 못하지만.

“태풍이 이렇게 날아가게 했다가 떨어지게 만들어요!”

나는 시하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있는 쿠션으로 착지시켰다.

살포시.

“이렇게 크게 떨어지면 아파요? 안 아파요?”

“안 아파.”

“어…….”

그렇지. 내가 안 아프게 놓았지.

태풍의 무서운 점을 어필하기 힘들다.

하지만 요즘은 디지털 세상.

태풍의 무서움을 영상으로 보여줘야겠다.

“자. 잘 봐. 이게 태풍의 무서운 점이야.”

태풍이 간판도 날리고, 소도 날리고, 닭도 날리고, 벽돌도 날리고.

다양한 것들이 날아가며 부딪쳐 큰 손해를 끼쳤다.

차도 망가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

“어때? 무섭지?”

“형아….”

“그러니 밖에 나가면 안 돼요.”

“아냐.”

“엥?”

이게 안 통한다고?

“형아. 시하 차. 지베.”

“어? 차가 걱정돼?”

“아아. 차 아파. 아야 해.”

전혀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다.

그래. 차는 소중하지.

하지만 차를 들여보낼 정도로 집이 크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한담?

“시하 차는 아주 튼튼해서 안 다쳐. 절대 안 다쳐.”

“왜?”

“빨간색이니까. 알지? 전대물에서 레드가 맨날 주인공이잖아. 레드는 강해.”

“아아. 레드!”

“그렇지. 내일 태풍이 와도 차는 걱정하지 말고. 시하가 나가지 않는 게 중요해요. 알았지?”

“아아. 시하 아야 안 해.”

“응. 시하 아야 안 해.”

시하가 내 바지를 탁탁 잡아당겼다.

“시하. 형아 이써. 아야 안 해.”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형아가 지켜줄 테니 당연히 아야 안 하지.

“형아가 태풍에서 지켜줄게. 안심해.”

“아아. 형아. 레드.”

“그래. 형아레드다.”

그렇게 다음 날 태풍이 왔다.

비바람과 함께…….

레드는 부서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