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먼저 반응한 것은 시하였다.
“문도!”
시하가 문도환에게 도도도 달려갔다.
쓸쓸한 미소를 머금는 문도환 앞에 멈췄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도?”
“응. 안녕. 시하야.”
“모야?”
“하하. 자! 나에게 안겨.”
“아아.”
문도환의 목소리에 힘이 없음을 눈치챘는지 시하가 품으로 들어가 토닥토닥을 해 주었다.
나도 조금 의문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단시간에 변할 수 있을까?
분명 그저께만 해도 괜찮았던 걸 떠올려봤을 때 문도환에게 무슨 힘든 일이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혹시 집안에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 걱정을 하며 나도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형. 나 기다렸어요?”
“응.”
“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일은 무슨.”
“무슨 일 있는 거 맞네. 얼굴이 반쪽이 됐어요.”
“그건 오버다. 그 정도는 아니야.”
“무슨 일 있는 건 맞고요?”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집 앞에 찾아오니까…….”
문도환이 머쓱하며 시하를 더욱 끌어안았다.
마치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다 큰 남자가 곰 인형을 끌어안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그렇긴 하지만.
“일단 집으로 들어가요.”
“아니야. 사실 너 기다린 건 아니고 그냥 발길 가는 대로 움직이니까 여기더라고.”
“밥 안 먹었죠?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어디 갈까요?”
“그럼…. 10만 원짜리 뷔페…….”
“고놈의 10만 원짜리 뷔페. 갑시다, 가. 어차피 형에게 사주려고 했어요.”
“그치? 나 그 정도 얻어먹을 정도는 되지?”
“하여간.”
생각지도 못하게 외식을 하게 생겼다.
사실 문도환에게 이 정도 대접은 해 주고 싶었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얼마나 맛있으면 10만 원이나 하는 뷔페인가 싶어서.
“10만 원짜리 뷔페 어딨어요?”
“나만 따라와.”
“운전은 내가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 지….”
나는 피식 웃었다.
문도환이 모른 척하며 시하를 안고 그대로 차에 탔다.
운전석에 안전벨트를 매고 그대로 출발했다.
“시하야. 뷔페 갈 거야. 뷔페.”
“아? 페페?”
“아니. 페페를 먹으면 큰일 나지.”
“페페. 머거? 아냐!”
“그래. 페페는 먹는 거 아니지. 뷔페라고 맛있는 음식이 많이 있는 곳이야. 음식이 엄청 많다니까.”
“아아.”
정말로 알아들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뷔페가 있는 곳까지 운전을 했다.
어느새 우리는 고급스러운 식당에 도착해 있었다.
가격은 정확히 14만 원이었는데 그 값어치를 하듯이 테이블과 식탁보가 고급스러웠다.
자리마다 와인잔이 뒤집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아니면 물을 따라 마시거나.
“여기 왜 이렇게 비싸요?”
“그러게. 14만 원이면 국밥이 20그릇이겠다…….”
“국밥 좋아했어요? 비유가 왜 국밥이야.”
“국밥은 사랑이지. 그래… 사랑…….”
그런 사람이 14만 원치 뷔페를 가자고 하다니.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으로 여기를 오는 걸 거다.
두 번은 못 올 거 같았다.
사치도 적당히 해야지.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시하도 앉기 편한 의자를 가져다줬는데 과연 14만 원짜리 뷔페였다!
이런 서비스도 하는구나.
문도환이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데는 본전 찾을 생각 안 하는 거야.”
“그럼 뭘 찾는데요?”
“듣기로는 분위기값이라던데?”
“분위기값?”
“어.”
“시하에게 도움이나 됐으면 좋겠네요. 한 번은 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고.”
“넌 시하밖에 없어?”
“그럼요. 난 시하 빼면 시체야.”
“그건 아니다.”
그렇게 우리의 식사가 시작됐다.
나는 시하를 안고 형형색색인 음식을 보여주었다.
“형아! 마나!”
“응. 진짜 많지?”
“아아.”
“뭐부터 먹을래?”
시하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았다.
“형아랑 가타.”
“형아랑 같은 거?”
“아아.”
“그래. 그럼.”
역시 시하는 나랑 같은 걸 먹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 먹을 수 없는 법이다.
시하가 잘 먹을 수 있는 걸 선택해야겠다.
원래 그렇잖아.
부모님들이 애들이 좋아하는 반찬을 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물론 건강을 생각해 좋아하는 반찬만 할 수는 없긴 했다.
그래도 식탁에 올리는 건 애들 입맛에 맞는 식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먼저 양송이 수프를 먹어보자.”
“아?”
“형아랑 같이 먹으면 엄청 맛있을걸?”
수프 한 그릇으로 나눠 먹을 생각이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빨리 차서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없을 테니까.
“짜잔.”
“아아!”
양송이 수프 위에 부풀어 오른 빵을 보고 시하가 신기해했다.
나는 내가 한 요리가 아님에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뜨거우니까 식혀서 먹자. 알았지?”
“아아.”
나는 빵과 수프를 함께 후후 불어서 시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진다.
그걸 본 문도환이 중얼거렸다.
“뜨거운 건 언제나 식는 법이지.”
“형. 진짜 무슨 일 있는지 말 좀 해요.”
“아니야. 밥 다 먹고 말하자. 지금 들으면 얹혀.”
“아 놔. 얼마나 엄청난 일이기에 이러지?”
“먹어. 먹어.”
시하가 문도에게 숟가락을 내밀었다.
“문도! 아!”
“헉!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아아.”
“고마워. 진짜 고마워. 역시 나도 너희 둘밖에 없다.”
“이 형 오늘 왜 이러지?”
그렇게 감동하는 문도환을 보며 우리는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그다음은 여러 음식을 먹은 뒤에 스테이크를 가져왔다.
열심히 썰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문도환이 또 한 번 말했다.
“저렇게 한 번 썰어봤어야 했는데.”
“대체 뭔데요?”
“아니야. 많이 먹어. 들으면 체해.”
안 들었는데 벌써 체할 거 같다.
진짜 무슨 일 있기는 있나 보다.
시하가 오물오물 씹으면서 문도환을 봤다.
“문도.”
“왜?”
“쉿. 밥. 머거.”
“어어.”
그렇지.
밥 먹을 때는 조용히 음미하는 거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예의가 바르다.
입에 있는 음식은 다 먹고 나서 말하는 것도 또 하나의 식사 예절이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배우지 못했나 보다.
기어코 시하에게 한 소리 듣고 나서야 식사자리에 달그락 소리만 남았다.
“이제 디저트 먹을까?”
“아아.”
“여기 아이스크림도 있어. 어때? 맛있겠지? 시하는 뭐 먹을래? 초코, 딸기, 바닐라.”
“초코!”
“알겠어.”
나는 초코를 열심히 퍼서 돌아왔다.
문도환은 커피를 타고 호로록 마시고 있다.
“달다.”
“형. 그거 블랙커피 아니에요? 누가 보면 소주 마시는 줄 알겠어요.”
“직장인들이 커피 소비량이 참 많아. 아마 피로를 날릴 겸 달달한 걸 찾는 거겠지. 입가심으로.”
“어…. 그렇죠.”
“이상하게 그게 익숙해지면 안 마시면 허전하고, 자꾸 손이 가고, 그렇게 일상에 스며들지.”
“그… 그렇죠.”
“나도 이 커피처럼 일상이 달달했었는데. 어느새 이런 블랙커피를 마시게 되더라.”
“왜요?”
“왜긴 왜야. 이제 달달하지 않아서 그렇지.”
“뭔 소리야? 그치 시하야?”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입에 오물오물 물고 있는 시하가 고개를 들었다.
읭?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런 시하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맛있게 먹어.”
문도환의 말이 계속됐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만난 거 기억나?”
“어. 그때 진짜 고마웠어요. 진짜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주는 거잖아요.”
“그치. 그랬지. 그때 일 있어서 잠시 들렸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었는데요?”
“연애 사업.”
“네?”
“잠시 커피를 마시러 간 거였어. 방학 동안 그녀가 있었는데 정말 예쁘더라. 야무지고. 그때부터 자주 가서 친해졌지.”
“아…….”
왜 난 이 연애 사업의 결말을 알 것 같지?
벌써 끝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문도환이 보인 모든 행동과 말이 힌트였다.
“어느새 남자친구가 생겼더라. 제길.”
“힘내요. 형.”
“고맙다. 그래도 고백은 안 한 게 다행일까?”
“고백도 안 했어요?”
“그냥 좋은 친구 같은 선배였지. 하아.”
“아, 그래요…….”
“잠깐만. 눈물 좀 닦고.”
“눈물 안 나는데요?”
“야. 이럴 때는 모른 척 좀 해줘. 뭐지? 감정이 메말랐나? 눈물도 안 나네.”
“시하가 너무 귀엽게 먹고 있어서 슬픈 감정이 날아갔나?”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저렇게 정색하니 괜히 찔끔하네.
아니. 그렇잖아. 시하가 도환이 형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눈물 들어갈 만하지.
암. 그렇지.
시하의 귀여움은 짝사랑의 상처도 낫게 하는 마법이 있다.
그런 헛생각을 눈치챘는지 문도환이 어이없어하며 피식 웃는다.
“아무튼, 너희 둘은 오늘 내가 큰일을 당했으니까 마지막까지 놀아줘야 해.”
“형. 나 오늘 바쁜데요…….”
그런 내 대답을 들었는지 시하도 따라 말했다.
“시하 바빠.”
“너희 진짜 너무한다…….”
나는 농담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쁘지만 그래도 형을 위해서 시간을 내줄게요. 형 가고 싶은 데 가요. 술 파는 곳만 아니면 돼요.”
“그럼 코노 가자. 코노. 시하도 즐길 수 있고 나도…….”
“아. 실연당한 사람이랑 코노는 쪼큼.”
“야!”
“농담이에요. 시하야. 코노 가자. 코노.”
“코노?”
시하가 코노가 뭔지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인 노래방이라는 곳이야. 동전을 넣고 마음대로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어.”
“노래?”
“응. 노래.”
“시하. 노래해. 백수송.”
“그래. 백수송 부르자.”
“아아.”
그렇게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코노로 출발했다.
***
저녁 시간이라도 코노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노는 사람이 많나 보다.
우리는 생수 두 개를 사서 방 하나에 들어갔다.
“시하야. 여기 지폐를 넣어서 부르는 거야.”
“아아.”
나는 시하의 손에 지폐를 쥐여 주고 안에 돈을 넣게 했다.
위이잉.
오천 원짜리가 빨려 들어갔다.
시하는 그게 신기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구멍 안을 지켜보았다.
손가락도 쏙 넣어보기도 했다.
“헉. 손 빨려 들어가!”
“아?!”
시하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을 뗐다.
나는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형. 누가 먼저 부를래요?”
“시하. 먼저 불러.”
“알겠어요.”
시하가 열심히 백수송을 불렀다.
나도 옆에서 따라 불렀다.
같이 부르면 더욱 재밌으니까.
그런 즐거운 분위기와 다르게 문도환이 뒤에서 신중히 노래를 고르고 있다.
나는 그 모습에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다.
[십! 십년이 가도 나는 놀 거야!]
그렇게 노래가 마무리되고 나는 문도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아마 문도환은 마이크 드롭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일 텐데 꼭 잡은 손이 안타까워 보였다.
마치 이 마이크라도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느낌.
대망의 노래 제목이 나왔다.
[제목 : 짝사랑했다~]
[노래 : 마이콘]
[작사 : 일방통행]
[작곡 : oxytocin, noradrenaline]
왜 이런 슬픈 노래를…….
곧바로 노래가 나온다.
문도환은 이미 자신의 감정에 심취해 있었다.
마이크를 보며 입을 뗐다.
[짝사랑했다~ 우리가 만나~
이별도 못 할 기회가 없다~
헤어질 서브 남주~
병풍 된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배경이 되는 허들 시나리오~
이젠 조명도 안 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내 이름 석 자~도~ 없죠~
에이 괜찮지만은 않아 주인공이 아니라는 건.
우정으로만 속이던 어제에 나는 내일도 똑같다는 건.
아프긴 해도 네 곁에 있음 행복하니까~ ye ye.
널 사랑했고 네가 행복하니 난 그걸로 좋아~
나 너를 보면서 이따금 말 못 할 고백.
행복한 네가 있다면 내 목은 잠길래.
짝사랑했다~ 우리가 만나~
이별도 못 할 기회가 없다~
헤어질 서브 남주~
병풍 된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배경이 되는 허들 시나리오~
이젠 조명도 안 되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내 이름 석 자~도~ 없죠~]
“크흑.”
그때 시하가 탬버린을 흔들었다.
짤랑짤랑. 탱탱.
짤랑짤랑. 탱탱.
문도환의 감정과 다르게 시하는 신나는 비트에 해맑게 흔들었다.
한 공간에 다른 감정이 공존한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