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달콤한 맛보다 떪은 맛이 나는 설익은 과일.
붉게 물들어 익기에는 아직 멀었고 그 달콤함을 취하기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걸 기다리지 못해 따서 입에 넣는다면 결국은 퉤 하고 뱉을 뿐이다.
재휘의 마음이 그렇다.
기다리지 못하고 달콤함을 취하고 싶은 기분.
“왜 연락이 안 돼. 왜.”
좋아하는 연주와 연락이 안 된다.
아쉽게도 현재 연주는 미국 여행 중이다.
그래서 연락이 안 되는 것이다.
그걸 모르는 재휘는 가슴을 탕탕 쳤다.
옆에 있던 종수가 그런 재휘가 걱정되는지 살며시 어깨를 감싼다.
“재휘야. 왜 그래? 괜찮아?”
“응? 아니. 안 괜찮아. 연주 보고 싶어.”
“내가 피아노로 연주해 줄까?”
“그 연주 말고…….”
종수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지만, 재휘의 기분을 풀게 하려고 괜히 장난을 쳐봤다.
하지만 재휘는 예쁜 연주가 생각나는지 끙끙 앓고 있다.
선생님도 그런 재휘를 대충 눈치챘다.
“후후후.”
원장이 뒤에서 또 무슨 일을 꾸미냐는 듯이 쳐다본다.
유다희 선생님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비해둔 스케치북을 들고 왔다.
지금! 바로 이날을 위해 준비해온 것!
하늘이 돕는지 타이밍도 굉장히 알맞았다.
“자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아이들이 읭? 하며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싱긋 웃음을 머금었다.
“바로 오늘은 칠석이에요. 칠석이 뭔지 모르겠다고요? 그럼 오늘은 칠석에 대해서 알아보아요.”
선생님이 재휘를 가운데 앉혔다.
다들 궁금한지 스케치북 앞으로 모였다.
선생님이 해 주시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밌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늘 칠석 이야기를 해 볼게요. 견우와 직녀 이야기입니다.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죠.”
그때 승준이 손을 들었다.
“나 그 이야기 아는데!”
“하나도. 하나도!”
똑똑한 종수 역시 아는 이야기였다.
재휘도 알고는 있었지만 견우와 직녀를 생각하니 마치 연주와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견우…. 직녀…….”
물론 재휘랑 연주가 견우와 직녀처럼 열렬한 사랑을 하는 사이는 아니다.
“아?”
시하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위를 보니 다들 알고 있는 모양.
자신도 괜히 안다고 따라서 주장했다.
“아아!”
선생님이 검지와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쯧쯧. 다들 이 이야기를 알고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다 아는 이야기를 할까요? 그쵸. 시혁 씨?”
“네? 글쎄요? 저는 처음 듣는 거라.”
오늘 스토리를 고민하며 시하와 함께 놀기 위해 온 시혁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시혁에게 좋은 날에 왔다고 했다.
오늘 동화 실력을 보여주며 교육을 보여줄 수 있는 자리.
선생님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 그럼 먼저 다 아는 이야기를 할게요.”
“견우와 직녀가 있었습니다. 소를 돌보는 견우. 베를 짜는 직녀.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던 일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워 은하수 건너편에 떨어뜨려 놓았죠.”
아이들이 아는 이야기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시하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벌써 흥미진진한 모습.
선생님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견우와 직녀는 일하면서 너무 보고 싶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릴 때마다 지상에는 비가 내렸습니다.”
“지상에 있던 농부가 말했어요.”
“아이고! 허구한 날 비가 오니! 홍수 나겠네!”
“옆에 있던 마을 사람이 그 말을 받았습니다.”
“소~오!는 누가 키울 거야! 소오~는~!”
시혁은 그 말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라? 이거 들어본 대사인데?
아이들이 재치 있게 말하는 선생님을 보며 웃었다.
이상하게 슬픈 장면인데 웃게 만드는 선생님이었다.
오로지 재휘만이 과몰입을 한 채 서로 만나지 못한 견우와 직녀를 슬퍼했다.
“흑. 너무 슬퍼! 어떡해…….”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걸 본 까마귀와 까치가 두 사람을 안타깝게 여겨 칠월칠석에 은하수를 건너는 다리를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견우와 직녀는 다시 만나서 서로를 보듬어 안아줬답니다.”
아이들이 아는 이야기였지만 잘됐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지만 그 ‘유다희’ 선생님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휘리릭.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이 다음으로 넘어간다.
“견우는 까마귀와 까치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정말 고마워. 직녀랑 매년 만나는 걸 옥황상제님도 눈감아주실 거야.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다리를 놓아주겠니?”
“까치가 대답했습니다. 그럴게요!”
“고맙다. 그럼 여기 계약서에 사인을 해 주렴.”
“네~”
“까마귀, 까치들이 사인을 했어요. 그러면서 견우가 랩하는 것보다 빠르게 여러 가지를 읊어줬습니다.”
“10년 만기로 계약을 해지하면 자손 운 축소, 불행 확대, 은혜 보장 축소 등 불이익이 갈 수 있으며…. 자. 시간이 없으니 어서 계약서에 사인하렴. 중도 해지 시 우리에게 은혜를 입힐 수 없음을 확인 바랍니다. 어서!”
시혁은 입을 쩌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보험 사기 냄새가 견우에게서 났다.
아이들이 뭐가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이 서늘한 눈빛을 보내자 유다희가 찔끔하며 크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휘리릭.
스케치북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까치와 까마귀는 1년마다 다리를 놓았습니다.”
머리가 벗겨진 까치와 까마귀.
과연 털갈이하는 것일까?
아니면 스트레스성 탈모가 오는 것일까?
그 설정은 오로지 유다희 선생님만 알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견우는 직녀와 계속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일을 안 한 것이 지상에 피해가 갔기 때문에 벌을 받는 거죠. 하지만!”
“일을 엄청 잘하면 옥황상제님도 다시 돌아봐 주실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견우가 열심히 공부해서 공장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바로 소를 대신할 기계를 만든 거죠!”
스케치북에 경운기가 나왔다.
“그리고 직녀 역시도 공장을 세워 많은 옷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옥황상제는 이 엄청난 발명에 두 사람이 벌을 그만 받게 했습니다.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난 견우와 직녀!”
“부인. 보고 싶었소.”
“저도요.”
“그렇게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끝!”
짝짝짝.
이야기의 흐름이 어떻게 됐든 해피엔딩이었다.
견우와 직녀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사랑을 쟁취하는 진취적인 모습에 시혁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재휘가 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연주를 만나기 위해 엄청나질래. 나중에 만나면 보고 싶다고 할 거야.”
어떻게 보면 재휘가 다시 일어날 힘을 준 것 같기도 했다.
역시 선생님이다.
그때 승준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응? 왜?”
“그런데 까마귀랑 까치는 어떻게 됐어요?”
“아…. 까마귀랑 까치는 견우와 직녀가 만든 공장에 일하게 됐어요. 계약서에 사인도 했어요. 해피엔딩이랍니다.”
정말 해피엔딩일까?
시혁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숨겨진 설정이 예상돼서 못 물어보았다.
“아하!”
승준이 궁금증이 풀렸는지 손을 내려놓았다.
다음은 하나가 손을 들었다.
“선생님! 구런데 견우 잘생겼어요?”
“응. 엄청 잘생겼어.”
“시혀기 오빠만쿰?”
“아니. 시혁이 오빠가 더 잘생겼지.”
“선녀눈 예뻐요? 하나만쿰?”
“아니. 하나가 더 예뻐.”
“헤헤.”
하나가 기쁘다며 두 손을 볼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시하가 손을 들었다.
“아아!”
“응? 시하도 질문 있어?”
“아아.”
“뭔데?”
시혁은 시하의 질문이 궁금한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과연 어떤 질문을 할까?
“은하수 모야?”
“아! 은하수가 뭐냐고? 선생님이 그린 그림 중에 있지요. 짜잔.”
선생님이 다시 스케치북을 돌려서 한 장면을 펼쳤다.
노란 별들이 하늘의 다리를 놓고 있는 모습.
“이렇게 별들이 쭈욱 강처럼 모여 있는 걸 은하수라고 해요. 알겠어요?”
끄덕끄덕.
시하가 그렇게 말하고 오른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은하수?”
시혁은 그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거기에 은하수 있어?”
“아아. 형아 눈.”
“오! 형아 눈에도 있어? 형아 눈이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
“아아.”
시혁은 몰랐다.
서로의 말이 엇갈리며 대화가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칠월칠석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날.
은하수가 견우와 직녀를 멀리서만 바라보게 한 것처럼.
시하와 빛무리는 만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멀리서 바라보게 된 것일까?
그걸 모르는 시혁은 그저 시하를 안으며 사랑을 속삭였고.
분홍색과 파란색 빛무리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을 감쌌다.
***
“시하야. 오늘 재밌었어?”
“아아.”
오늘 나 역시도 황당하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그래도 저런 엉뚱한 이야기를 들으니 스토리를 짜는 데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 같다.
견우 같은 인물상을 왕으로 만들면 어떨까?
선생님이 만든 견우는 자신의 사랑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로 보였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어쩌면 선생님이 다른 의도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사랑만 생각하는 견우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까마귀와 까치를 회사 직원으로 만들고 결국 일을 별로 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을 쟁취한 장면이 주목됐지만, 그 설정은 그렇게 생각되게끔 했다.
‘계약 이야기 장면은 일부러 그런 점을 부각하려고 넣은 건지도?’
해학적으로 만들었지만, 견우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열렬한 사랑을 자처하는 선녀 역시도.
‘그렇다면 그걸 상대할 주인공은 어떤 인물일까?’
나는 시하를 보았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실컷 친구들과 논 시하.
물론 내 옆에 딱 붙어있어서 같이 놀 수밖에 없었지만…….
“시하야. 친구들 좋아?”
“조아!”
“그래? 그럼 친구 중에 누가 제일 좋아?”
“아?”
시하가 열심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
“하하. 다 좋아?”
“아아.”
“그럼 친구들하고 형아 중에서는?”
“형아!”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역시 시하다.
그런데 이게 듣다 보니 기분이 좋다.
유치하지만 왜 이런 질문을 애들에게 던지는지 알겠다.
아이들은 귀찮아하거나 곤란해하지만 말이다.
“그럼 형아랑 형아 중에 누가 더 좋아?”
“아? 형아?”
“역시 형아가 좋지?”
“아아.”
답은 형아라고 정해져 있다.
괜히 한 번 더 질문해 봤다.
“그럼 시하는 좋아하는 여자애 있어?”
오늘 재휘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하는 좋아하는 여자애 없나?
아직 사랑이라 하기에는 뭔가 싶지만.
“아? 하나? 연주?”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견우처럼 좋아하는 여자애. 직녀랑 매일매일 같이 살고, 보고 싶은 사람. 알겠어?”
“아아.”
“같이 살고 싶은 여자애 있어?”
“아냐.”
“없구나?”
그럴 줄 알았다.
아직 관심을 갈 나이는 아닌가?
아닌데. 어릴 때부터 많이 있던데.
시하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시하. 이써.”
“어?”
“매일매일. 이써.”
“매일매일 같이 살고, 보고 싶은 사람 있다고?”
“아아.”
뭐야 있었네…….
쪼그만 게 벌써부터!
형아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안 된다!
그러다 정말 흙을 뿌리면 어떡하지?
“누, 누군데?”
시하가 해맑게 웃었다.
“형아!”
“헉!”
아무래도 시하는 형아랑 평생 같이 살 팔자인가 보다.
그래도 평생은 조금 그러니 취업 때까지만 열심히 지원해 주자.
“형아도 시하랑 매일매일 같이 살고 싶고, 보고 싶어!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어!”
“아아! 형아!”
나는 시하를 들고 한 바퀴 휙 돌았다.
그렇게 서로가 기쁨에 취해 있을 때 암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좋겠다…. 매일매일 같이 살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느새 도착한 집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