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500)

136화

모방.

실력을 키우기 위해 자주 하는 것이 모방이다.

일러레 같은 경우는 새로운 그림체를 가지기 위해 모작을 한다.

그려진 걸 종이에 대고 따라 그리는 게 아니다.

그림의 기본적인 능력인 관찰력.

오로지 이 관찰력만으로 그림을 그대로 머릿속에 들고 와서 따라 그린다.

그렇게 그리다 보면 알게 된다.

왜 선과 선이 만나는 점을 강조하는가?

그건 사물의 명확함을 위해서다.

왜 이 선을 굵게 했는지, 색감을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 빛이 오는 방향은 어디로 잡고 색을 칠했는지.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어느새 내 창작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글도 마찬가지지.’

많이 읽은 사람에게는 어딘가 닮은 형상이 보인다.

누군가는 그걸 클리셰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클리셰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글이 탄생한다.

보고 공부한 것에 느낌이 묻어난다.

순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웹소설에 맞게 글을 쓴다고 한들 그 향기가 지워지지 않듯이.

‘그렇다면 나는 어떤 향기가 묻어나올까?’

내가 가진 거라고는 머릿속에 있는 다양한 지식.

영화, 드라마, 만화 등등에서 보고 느낀 것.

그게 바로 내가 ‘읽은’ 것들이다.

‘흠.’

그런 점에서 나는 어쩌면 충분한 인풋과 모방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시하도 열심히 모방하는 거야?”

“아? 모방?”

현재 내 앞에는 시하가 자신을 따라 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앞에 있는 전신 거울을 보며 포즈를 잡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방은 따라 하는 거야. 과연 거울에 속 시하가 따라 하는 걸까? 아니면 시하가 거울을 따라 하는 걸까?”

“아?”

“그냥 이상한 소리를 해 봤어. 하하.”

시하가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아아! 시하 따라.”

거울이 시하의 행동을 따라 한다.

만세도 하고, 가슴을 쭉 펴는 포즈도 취한다.

배가 빼꼼 나와 있는 모습이 귀엽다.

“거울 말고 형아를 따라 해 볼래?”

“아?”

나는 거울 앞에 털썩 앉아서 시하와 시선을 맞췄다.

“자. 형아 표정을 따라 하는 거야. 알았지?”

“아아.”

“먼저 기쁜 얼굴.”

입을 살짝 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이 살며시 호선을 그리며 웃는 상이 만들어졌다.

이건 다 시하의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한 것이다.

시하가 거울을 보며 내 표정을 따라 했다.

입꼬리가 0.01mm 올라갔다.

“아아.”

“으음. 그렇지. 그렇지.”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천천히 시도해 보자.

“그다음은 슬픈 표정~”

“아아.”

살며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꼬리를 내렸다.

시하도 살며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남들이 봤을 때는 아까와 별다를 바 없이 보이겠지만 내 눈은 안다.

시하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그다음 살며시 흘겨보기.”

나는 괜히 옆머리를 쓸어 넘기며 ‘칫’ 하는 소리를 냈다.

시하도 ‘칫’ 하는 소리를 내며 옆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표정 연습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표정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자. 오늘은 이쯤 하고 어린이집에 가자.”

“아아.”

내가 일어나서 가방을 멨다.

시하도 펭귄 가방을 멨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퍽 닮아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굳이 일부러 따라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자연스럽게.

그림도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을 모작해 보고, 글도 좋아하는 작가의 것을 읽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며 나만의 색채를 찍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닮아가며.

또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

-게임 개발 동아리방.

똑 닮은 세 사람이 새 단장을 위해 청소를 하고 있다.

전에 시혁이 본 것은 일상의 풍경 중 반절이었다.

이번 새로운 작업을 위해 다시 한번 정리를 하는 것이다.

3학년의 마지막 학기가 다가옴에 따라 이 셋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앞으로 이게 인생에서 마지막일 거라고.

어쩌면 셋이서 개발하는 것 자체도.

박경준이 활짝 열려 있는 창문을 물티슈로 띠끄띠끄 닦으며 안경호에게 말했다.

“야. 진짜 시나리오를 맡아줄까? 솔직히 쉽지 않은 이야기잖아. 안 그래?”

“글쎄? 모르겠네.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

“안 되면 우리끼리 기획해서 만들어?”

“아무래도 그래야지. 뭐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번역도 해야 하고.”

“이야. 힘들겠는데? 최대한 신경 덜 쓰는 쪽이면 좋겠다.”

“의견 조율하는 것도 힘든데. 뭐.”

마음이 맞는 이 셋도 의견을 조율하기 위해 다툴 때가 있다.

그건 이미 일상이라 상관없었다.

안경호가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켰다.

“으윽! 그래도 받아줄 거 같은데?”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냥 느낌이? 막 생각이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래. 우리가 딱 여기서 마주칠 때 느꼈던 기묘함이라고 해야 하나?”

“쯧쯧. 그때 느꼈던 건 퀴퀴한 냄새와 이 동아리를 가입해야 하나 싶은 걱정밖에 없었어. 내 청춘이 여기에 먼지처럼 쌓이겠구나. 도망가야 하나? 이런 생각.”

박경준이 자신이 들고 있는 물티슈를 쫙 펴서 보여준다.

시커먼 먼지가 곳곳에 묻어나와 있는데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빠져나오지 못하는 형상이었다.

안경호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야! 그래도 재밌었잖아!”

“재미야 있었는데…….”

옆에 있던 신경환이 성질을 냈다.

“야! 잡담 그만하고 빨리 손 놀려. 입만 놀리지 말고! 그리고 경호는 빨리빨리 대답 듣고. 일주일이 뭐야. 일주일이. 앞으로 3일 내로 대답해 달라고 해.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그래서 오늘 대략적인 기획을 할 생각이라고…….”

“그거 좀 더 해서 진행할 생각이야?”

“어.”

안경호가 뒤집힌 칠판을 보았다.

전에 시혁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제작 기간, 각자 맡은 파트와 장르, 그리고 타깃층까지 적혀 있었다.

본격적인 스토리 구성은 나중으로 미뤘다.

언제까지 미룰 수 없지만, 자신들이 좀 더 진행해서 원하는 밑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신경환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 책 건드리지 마라. 내가 다 정리할 거니까.”

“알았다고.”

안경호가 살며시 안경을 들어 눈을 문질렀다.

자신이 동아리 회장인데 어째 취급이 너무한 것 같다.

이게 다 3년간 동고동락했기 때문 아닐까?

그래도 같은 게임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친구 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셋은 게임 개발에 있어서 어떤 프로보다도 진지했다.

“자. 빨리빨리 합시다. 금방 끝나요.”

그렇게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동아리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똑똑.

셋이 짜기라도 한 듯이 몸을 멈췄다.

“누구세요?”

“이시혁입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려고 왔는데요.”

“아! 잠시만요!”

도어락의 잠금을 해제하고 그대로 문을 열었다.

“정말 시나리오 짜주실 건가요?”

시혁이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경호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지금 청소 다 끝나가거든요. 잠시만 여기서 이거 보고 있으세요.”

달칵.

칠판이 반 바퀴 돌아간다.

화이트보드에 빛이 반사되어 시혁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었다.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검은 글자가 시혁의 머릿속에 들어와 맴돈다.

세세한 계획들.

얼마나 본격적으로 할 생각인지 보인다.

“제작 기간이 6개월에서 1년 6개월이네요?”

“네. 정말 최선을 다할 거거든요. 물론 스토리 쪽은 그 이전에 끝나겠지만요.”

창을 가렸던 뿌연 먼지가 상념을 지우듯 지워진다.

그렇게 먼지를 다 닦은 물티슈가 검은 봉지에 들어간다.

박경준이 말했다.

“나이도 같은데 서로 반말해도 돼요?”

“어. 해.”

시혁이 먼저 그렇게 말을 놓자 박경준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신경준이 마지막 책을 책장에 끼워 넣었다.

반듯하게.

“일도 끝났는데 뭐 좀 마시고 시작하지?”

신경준이 시혁에게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했다.

시혁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아니야. 편하게 있어. 편하게. 앞으로 부딪칠 게 많을 테니 달콤하게 먼저 입을 축이자고.”

그렇게 아이스티를 손에 들고 서로 자리에 앉았다.

오로지 안경호만이 화이트보드 앞에 일어서 있었다.

자신이 여기 동아리 회장이라는 걸 표현하듯이.

신경준이 말했다.

“서 있지 말고 앉아. 정신 사나우니까.”

“넵.”

안경호가 얌전히 시혁 옆에 앉았다.

시혁은 그 모습을 보며 정말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각자 은근히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듯한 느낌.

비슷한 색채로 물들어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내뿜는 셋.

그들을 보며 이곳의 일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스티의 달콤함이 머리를 깨웠다.

***

기획 시작.

처음은 스토리 위주로 같이 짜보기로 했다.

서로의 머릿속의 밑그림을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셋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아니었으니까.

안경호가 말했다.

“이번에 만들 게임은 여기 적혀 있는 것처럼 모험이야. 그래서 스토리가 정말 중요하지. 오히려 이 스토리를 보기 위해 게임을 하려는 미국인도 있을 테고.”

“미국인에게만 팔 거는 아니지 않아?”

“맞아. 그래도 일단 영어권 쪽은 다 들어간다고 봐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겠다.

“혹시 원하는 배경 있어? 판타지라던가 아니면 현대라던가.”

“우리는 일단 판타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판타지라…….”

“분기점도 있으면 하고.”

“분기점?”

“응.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 스토리 라인이 바뀌는 거지. 근데 그거까지는 시간이 없어서 시나리오 기획 단계에만 그칠까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겠지?”

“뭐, 그거는 일단 설정집 같은 느낌으로 내가 써놓으면 될 거 같기도 해. 그건 그것대로 재밌는 경험이겠네.”

“역시! 말만 들으면 프로 작가야.”

그렇게 시작된 서로의 정보 공유.

결국, 바라는 그림이 있었고 그걸 짜내야 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나는 게임에 중점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안경호가 살며시 물었다.

“어때? 할 수 있겠어?”

“스토리 중심이라고 했는데 내 생각에는 역시 캐릭터 중심으로 일단 가는 게 맞다고 봐.”

“캐릭터 중요하지.”

“캐릭터의 성격을 위해서 세계관을 구성하는 거지. 숲이 아니라 먼저 나무를 조성하고 나무를 늘려나가는 것으로.”

“음.”

“요즘은 결국 캐릭터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어. 판타지라고 했으니 그에 맞는 위기감을 먼저 주는 게 낫지.”

“위기감?”

“응. 늘 나오잖아. 불우한 상황이거나 못 이뤘던 상황.”

“오! 뭔가 생각해둔 게 있나 봐?”

“조금.”

스토리에는 항상 조금 모험이 필요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걸 즐기는 사람들이 늘 좋아하는 요소.

스토리에 몰입되게 주인공을 응원하는 요소.

모험에 중요한 건 언제나 커다랗게 닥친 불운을 주인공이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를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스토리적으로 통하는 초반 부분을 말한 것이었다.

어느 유명 피디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익숙함 90%에, 특별한 10%만 만들면 된다고.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야. 판타지라고 하니 일단 주인공 한 명을 세우자. 기사로.”

“전형적이네.”

“응. 전형적이지. 하지만 이걸 전형적이지 않게 만드는 건 우리 몫이야.”

“그래서 어떻게 전형적이지 않은 특별함을 부여할 건데?”

“그건…….”

“그건?”

다들 기대감을 품은 채 내 입을 바라보았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같이 생각해 보자.”

“아이! 뭐야!”

“하하. 이 부분은 조금 생각해 볼게. 일단 대략적인 스토리는 왕에게 배신당하는 기사 어때?”

“복수?”

“아니. 탈환.”

“탈환?”

“왕위 탈환이지. 복수라는 것도 맞고.”

“오홍. 갑자기 선덕여왕이 생각나네.”

그렇게 대략적인 의견을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과연 나는 이 게임에 들어갈 만한, 특별한 키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이어졌고…….

다음 날 나는 특별한 키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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