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500)

135화

안경호가 말했다.

“게임 시나리오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

굉장히 흥미로운 제안.

하지만 곤혹스러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게임 시나리오를 써달라고요?”

“네. 바로 그겁니다.”

“아니. 뭘 보고 게임 시나리오를 써달라는 거죠? 여기 동아리에는 시나리오 담당이 없나요?”

“네. 없어요.”

안경호는 단호했다.

대체 어떤 생각인지 몰라서 나는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정확히 말해서 그 정도는 필요 없었죠. 대충 저희끼리 회의하고 만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꼭 게임 시나리오가 필요해요. 작가에 버금가는.”

“음…. 아시다시피 저는 글 쓰는 사람이 아니에요. 강인대학교에는 글 쓰는 분들도 많은 거 같은데…….”

“그 사람들은 게임에 관심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안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향과는 달라요. 어렵지 않은,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 않은 글을 원합니다. 순문학의 향유 같은 건 곤란합니다.”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러니까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정도의 글이라는 거죠?”

안경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겁니다. 물론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다른 이유는요?”

“영어로 집필해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올해 크게 게임을 만들어 그걸 외국계 회사에 넣어본다고 했었나?

직접 만든 걸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실력 증명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게임회사에 내밀어 뜯어고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실현할 수 있게 만들 거라니.

과연 저런 패기를 게임회사에서는 어떻게 볼까?

한국이 아니라 외국이라서 더더욱 모르겠다.

“확실히 영어로 집필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은 적겠네요. 그렇다고 영어권 작가를 구할 수도 없는 거고.”

대학생이 돈이 어딨나.

그런 시나리오를 구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안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협까지 번역해낸 ‘시혁 씨라면 어쩌면!’이라는 마음으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물론 저희가 어떤 돈을 드릴 여건은 안 됩니다만…. 저작권 쪽으로는 확실히 보장되니…….”

갑자기 안경호가 소심하게 눈치를 봤다.

자기가 제안하는 거지만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아는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도 열정을 바쳐서 게임을 만들 거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크흠. 크흠. 물론 동아리비로 밥도 자주 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비용은 나오지 않을 건데요?”

“커험.”

나는 곤란하다는 듯이 뺨을 긁었다.

“뭐 미국에 먹힐 만한 게임 시나리오를 써야 할 텐데 그게 어디 쉽나요.”

“써주시기만 한다면 저희가 게임에 맞게 잘 어루만져 보겠습니다. 일정 부분은 같이 기획하거나 상의할 수 있습니다.”

“흐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작업이다.

하지만 만약에 이 게임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아니, 외국계 기업에 채택되어 프로젝트로 만들어진다면?

그 무엇보다도 엄청난 보상이 따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흥미가 좀 생겨.’

말 그대로 흥미.

대학 시절에만 할 수 있는 도전 같은 열정이 뭔가 부럽기도 하고 그랬다.

나 역시도 4학년이 끝나고 나면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일해야 했다.

같은 통역 일이라도 전문 분야가 다양하다.

게임, 자동차, 호텔, 의료 등등.

결국, 하나의 전문적인 일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새로운 도전을 해 보는 건 어떨까?

“흠.”

“많이 고민되시나요?”

“뭐, 그렇네요.”

안경호를 힐끗 보았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쩔쩔대고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제대로 이런 작업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조금 생각해 봐도 괜찮을까요?”

“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일하는 것과 병행해야 해서…. 시하도 돌봐야 하고요.”

“물론이죠. 이해합니다. 이건 부탁드린 거지 꼭 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거든요. 어쩌면 보답을 받지 못할 투자라는 걸. 펀드 같은 거죠.”

“그렇네요. 펀드. 배당금을 못 받을 수 있는…….”

비유가 참 재밌었다.

그래. 이런 일에는 조언을 한번 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결정하지 말고 좀 더 판단해본 후에 선택하자.

“최대한 빨리 답변을 드릴게요. 한 일주일 안에?”

“네.”

“저도 마음 같아서는 하고 싶네요. 꽤 흥미가 가거든요. 현실에만 부딪히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서 제안을 수락했을 겁니다.”

“하하. 그렇죠?”

“네.”

그렇게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과연 이 손과 손이 다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

뒤를 돌아보았다.

과거를 보면 현재의 삶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저 먼 과거가 아니라 최근에 일을 시작한 시점을 본다.

앞으로 계속 일하면서 이만큼 벌 수 있을까?

솔직히 말도 안 되게 벌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막 1억씩 번 건 아니고.

무협 소설 번역을 하면서 몇 달치는 미리 번 것 같다.

거기에 잔잔하게(?) 통역 일을 한 비용까지.

‘좋은 기회가 왔을 뿐이지.’

프리랜서의 수입은 늘 불안정하다.

일이 없으면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앞으로 얼마나 들어올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해놓은 게 있으니 먹고 살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그 정도로 멈춰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더 벌어야 한다.

‘정말?’

아니. 아니다.

돈보다 우선시해야 할 게 있다.

그것은 시하다.

어느새 돈을 시하보다 앞서서 생각할 때가 많다.

변명하자면 생활권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

‘나도 여러 가지 도전해 보고 싶다.’

그래.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런 능력을 얻은 것도 과분할진대 이상하게 욕심을 부리고 있다.

시하를 잘 키우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돈도 잘 벌고 싶다.

이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는 걸까?

과연 주어진 하루를 다 쓰며 할 수 있는 걸까?

인간은 그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감정을 죽여야 하나?’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냐.

때로는 포기도 하는 법이다.

아버지가 통역사를 포기하고 번역가를 한 것처럼.

이장혁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된 것처럼.

나도 똑같은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잘 모르겠다.

아니. 안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라고 하셨겠지.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걸 응원해 줬으니까.

자기가 하지 못한 걸 원망하는 대신 아들이 더 많은 자유를 느꼈으면 했으니까.

‘나도 마찬가진데…….’

나의 부자유 속에서 시하가 더 많은 자유를 얻는다면.

그 선택을 할 것이다.

“후우.”

“웬 한숨이야.”

“어? 형?”

문도환이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형.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여기 학교 도서관 휴게실이야.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아니. 그런 건 아니죠.”

“일 있어서 왔는데 세상 근심 다 가지고 있는 얼굴이 보이더라.”

“그랬어요?”

“어. 그랬어. 뭔데. 이번에 또 뭐가 문제인데?”

문도환이 물으며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음료수 캔의 차가움을 느끼며 매끄러운 표면을 매만졌다.

“그냥. 나도 이제 평범한 대학생은 아니다 싶어서요.”

“평범하지는 않지. 어떤 대학생이 통역 일을 뛰고 있냐.”

“아하하. 그렇죠?”

“그래. 임마. 어깨 쫙 펴. 또 학기 전 초기처럼 어깨가 휘어지려고 해.”

“어깨가 휘어지는 게 아니라 허리가 굽혀지는 거죠.”

“많이 앉아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어디 봐? 거북목 왔는지 보자.”

문도환이 내 목을 잡으며 흔들었다.

나는 그대로 당하며 ‘어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고.

“이상은 없는데?”

“형이 의사예요? 그걸 다 알고?”

“의사는 아니지만 너는 내가 잘 알지.”

“피.”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도환이 형은 언제나 나를 잘 헤아려주니까.

친구가 많지 않은 내 유일한 친구이자 형.

조언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안 그래도 형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래? 그럼 잘됐네. 말해. 무슨 일인데?”

“만약 내가 도전할 일이 생겼는데 그게 돈이 안 되는 일이면 해야 할까요? 시하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새끼. 맨날 어려운 문제만 나한테 들고 오지.”

“미안해요. 어차피 형이 해결해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임마. 내가 누구야? 나 문도야.”

“문도환이 아니라?”

“아이 씨. 시하 때문에 요즘 문도라 불린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건 좀 웃겼다. 하여간.

“뭐 뻔한 말이지만 후회 안 하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진짜 뻔한 말이네요. 덜 후회하는 쪽으로 하라는 말 아니에요?”

“무책임한 말인 거 알거든? 그런 의미에서 무책임한 말 하나 더 할게. 도전해. 하다가 안 되면 버려. 해 보고 안 되면 버리면 되지. 그게 뭘 어려운 거라고.”

“그러다 욕먹으면?”

“먹어. 먹고 버려. 그 정도는 돼야 뭘 하지. 아니면 어떻게 도전해? 솔직히 애 키우면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어떻게 하냐.”

“진짜 무책임한 말이네요.”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렇게 행동할 수 없을 것 같다.

문도환이 음료를 들이켰다.

“나는 시하도 좋지만 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뭐가요?”

“넌 시하가 잘됐으면 하지만 난 네가 잘됐으면 좋겠어. 이 차이 이해하지?”

나는 가만히 캔을 매만지다가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음료가 입안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문도환의 말은 너무나 달콤하다.

목구멍에 사라지는 달콤함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혀끝에 맴도는 맛이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고마워요. 이렇게 말해 주는 건 형밖에 없을 거예요.”

“시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인 건 아는데 가끔은 너도 기쁜 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직 시간 있잖아. 조금은 대학 생활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1년 반이야.”

“그래요. 1년 반.”

“그 1년 반 동안 누구도 너한테 뭐라고 할 수 없어. 지금까지 실컷 달려왔잖아. 아니야? 그럼 가끔 널 위해 쓰는 시간도 있어야지.”

나는 남은 음료를 다 들이켰다.

표면에 묻어나오는 물기가 메말라가며 내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그렇다고 내 말을 다 듣지 말고. 무척 편파적인 생각이거든. 나보다 더 어른에게도 물어봐.”

“알겠어요. 고마워요.”

“좀 고민이 가셨어?”

“네. 조금 마음이 기울었어요. 확인 하나만 더 하고 선택하면 될 거 같아요.”

“오. 누구에게?”

“의사 선생님에게?”

문도환이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너 설마? 아니지?”

“왜 그래요?”

“뭐 도전한다느니. 시하를 돌봐야 한다느니. 이거 다 수술해야 하는 상황 아니야?”

“뭔 소리 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어휴. 놀랬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문도환을 보았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상상하셨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뭘 도전하는지 구체적으로 말 안 하긴 했다.

그래도 수술 결정은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싶은데.

이 형은 가끔 헛다리를 짚는다.

***

또 하나의 조언이 도착했다.

의사와 작가, 투잡을 하는 제이슨에게.

[시혁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드립니다.

시혁이 또 번역을 맡아주셔서 감사하네요.

이번 메일은 좀 특별하네요.

의사 일과 집필을 둘 다 하는데 힘들지 않냐는 물음에 시혁의 고민을 대충 알 수 있었습니다.

두세 가지의 일로 고민하고 있지요?

제 답변이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의사 일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왜 쓰고 싶었냐면 꿈이었거든요.

일종의 취미라고 봐도 무방하겠네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취미로 정말 하고 싶은 걸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글이었지요.

제 글을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뻑뻑해 컴퓨터 앞에 못 앉으면 누워서 녹음이라도 했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쌓이고 쌓인 게 지금의 글입니다.

연재 형식이 아니라 책 형식이라 퇴고도 많이 했었죠.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책임감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책을 내는 건 일종의 사람 대 사람의 약속이니까요.

그렇게 저는 책을 낼 수 있었고 이번 시리즈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제 말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정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환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 다시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 다시 회복해서 새로운 직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 이 재활이 끝나면 다시 공을 찰 수 있을까요?

질문은 달라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말은 같습니다.

저는 도전하라고 합니다.

안 되면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정말로 좋아한다면 언제나 길은 있고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힘이 드는 건 당연한 겁니다.

시혁. 세상의 모든 일은 힘이 듭니다.

그 속에서 자그마한 재미만 있다면 사람은 그걸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 쓰다 보니 이야기가 길었군요.

당신의 앞길이 언제나 밝기만을 바랍니다.

생명의 길에, 마지막 희망인 의사 제이슨이.]

나는 이 편지를 읽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혔다.

그까짓 거 한번 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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