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아머존에서도 영문으로 무협을 번역했다는 것도 압니다. 읽어봤는데 예술이더라고요. 어떻게 미국 특유의 소설 감성을 그렇게 잘 살리셨는지.”
“하하.”
이렇게 들으니 괜히 쑥스러워진다.
설마 한국 사람이 영문으로 된 무협 소설을 읽을 줄 몰랐던 게 첫 번째.
내가 번역한 책을 다 읽었다는 게 두 번째.
그리고 나의 이름을 기억해 줬다는 게 세 번째.
이 정도면 꽤 감사한 일이다.
번역가로서의 성취감이 이럴 때 느껴지나 보다.
괜히 얼떨떨하고 기분이 좋고 그렇다.
이 맛에 번역하는 사람도 있겠구나 싶어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이번에 금색 시곗바늘을 번역하신다니. 정말 기대가 되네요. 제가 의학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영문으로 읽으실 줄 아시면 충분히 구매해서 볼 수 있을 텐데요?”
“하하. 사실 영문으로는 잘 안 읽습니다. 번역가님 책을 우연히 읽다가 찾아보게 된 경우랄까요?”
“그런가요?”
뭔가 조금 이상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번역가님을 뵙게 돼서 정말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뭘 또 잘되기까지…….”
그가 손을 모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혹시 시간 되시면 강인대학교 게임 개발 동아리에 와주세요.”
“아, 네…. 네? 강인대학교요?”
“네. 하하. 사실 저희가 대학교 3학년생이거든요.”
“아…. 저도 사실 강인대학교 3학년입니다.”
“정말요?! 와! 진짜…. 아이가 있어서 동안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하. 시하는 제 동생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형아라고 불렀죠…….”
이제야 눈치를 챈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눈치채는 게 느린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럼 더 잘됐네요. 저희는 언제나 동아리방에 있거든요. 괜찮다면 연락처 교환해도 될까요?”
“뭔가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하하. 그냥 이야기라도 나눌까 싶어서…. 물론 부탁도 있긴 합니다만. 여기서 말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네. 좋아요. 재밌겠네요.”
NM 게임회사와 함께 일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
게임 개발이나 작업하는 환경 등이 참으로 궁금했다.
물론 통역사로서 선수들을 만나는 것도 즐겁기는 했지만.
그런 경험 때문인지 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그가 안경을 치켜들며 이름을 말했다.
안경을 왜 치켜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안경호입니다.”
왜 하필 안 씨라서 웃음을 유발하려는 걸까.
“뭔가…….”
“네. 맞습니다. 얼굴과 잘 어울리죠? 많이 들었어요. 하하.”
“아, 네. 하하.”
그 뒤로 두 사람과도 통성명했다.
박경준, 신경환.
이상하게 경 자 돌림의 친구였다.
들어보니 그래서 더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참 신기한 3인방이었다.
인상도 비슷하고…….
“그럼 시간 내서 들르겠습니다. 이제 곧 개학이기도 하지만 방학 때도 어린이집에 가야 할 일이 있거든요.”
“네! 꼭이요.”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짧은 대화였는데 그새 애들이 포도 주스를 다 마셨다.
“형아.”
“응? 왜?”
“시하. 시~”
“아! 화장실 가자. 화장실.”
깜빡하고 내가 이걸 안 가르쳐줬네.
시하야. 영화가 끝나면 바로 화장실로 가줘야 한단다.
우리는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승준, 하나와 헤어졌다.
오늘 시하의 첫 영화관은 성공적이었다.
***
게임 개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개발.
하지만 퀄리티와 다양성을 생각하면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요즘 팀 단위로 하는 분업도 많고, 특히 게임은 다양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재를 뽑을 때 특출한 능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팀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뽑는다.
서류를 통과한 시점이라면 능력 면에서는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팀플레이가 중요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인재 한 사람, 한 사람이 협력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만들어가는 하나의 작품!
그것이 게임이었다.
“오늘은 다 같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보아요.”
어린이집에서 협동심을 위한 게임을 준비했다.
카프라.
젠가보다는 얇은 나무블록인데 이걸 가지고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다.
높은 탑을 쌓을 수도 있고 기차와 같은 철도를 만들 수 있다.
놀이가 최고의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도 어린이집에서는 다양한 놀이를 준비했다.
“자. 이걸로 자유롭게 상상해서 무엇이든 만들어 보죠.”
“네!”
“그럼 경쟁을 위해 팀을 정해 주겠어요. 잘 완성한 팀에게는! 초콜릿을 하나 더 주겠어요!”
간식으로 모두에게 주는 작은 초콜릿.
그런데 하나면 좀 섭섭하다.
그래서 이긴 팀에게는 두 개가 돌아갈 예정.
아이들이 투지에 불타올랐다.
그렇게 정해진 두 개의 팀.
역시 시하팀과 종수팀이다.
종수가 시하를 보며 말했다.
“야. 시하야. 누가 잘하는지 보자. 내가 이길 거야.”
“아?”
갑자기 라이벌 의식을 불태워봤자 시하는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어떤 걸 만들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말은 승준이 받았다.
“종수야. 우리가 더 엄청난 거 만들 거거든.”
“승준이 너는 맨날 나한테 지면서.”
“아니거든! 언제 졌다고 그래!”
승준이 발끈하자 종수가 코웃음을 쳤다.
종수가 옆에 있던 재휘의 어깨를 두들겼다.
“재휘야. 너도 지고 싶지 않지?”
“…으응. 안 져.”
재휘가 오늘도 허세를 부렸다.
사실 그냥 나무블록을 즐기고 싶을 뿐이었다.
“자! 빨리 만들자. 시하에게 지면 안 돼!”
“그런데 뭐 만들 거야?”
“음…….”
그렇게 시작된 고민.
시하 쪽도 마찬가지였다.
“시하야. 이걸로 공 만들기는 어렵겠지?”
“아아.”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하나는 도마 만들고 시퍼!”
“바보야! 그걸로 못 이겨.”
“하나는 바보 아니야.”
하나가 허리에 손을 척 하고 올려놓은 채 오빠를 노려보자 승준이 찔끔했다.
“흠흠. 도마 말고 다른 걸 해 보자.”
“알아써. 시하야. 뭐 만들래?”
시하가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아아! 형아!”
“엥?”
“형아. 형아.”
“아니. 이걸로 시혀기 형아를 만들 수 없잖아.”
“아냐. 형아.”
“음…. 안 될 거 같은데.”
시하는 형아를 만들기 위해 나무블록 잡았다.
먼저 기초를 다지듯이 바닥부터 탄탄하게 넓게 깔았다.
“형아. 커.”
“그래! 그럼 일단 큰 걸 만들어 보자.”
“아아.”
“하나는 다리 만들래.”
그렇게 아이들의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인간의 발과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하가 도도도 발을 만들자 하나와 승준이 똑같이 보고 따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다리가 완성되고 두 다리를 연결해야 할 때.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재채기를 했다.
“에치!”
저도 모르게 다리를 건드리며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다.
망연자실한 표정.
시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형아. 다리…. 부서…….”
형아 다리가 부서졌어…….
그렇게 멍하니 한 다리가 없는 형아를 보고 충격을 받은 채 멍하니 있었다.
승준이 하나에게 뭐라고 했다.
“아악! 무너뜨리면 어떡해!”
“히힝. 하나가 일부러 안 해써…. 어떡해…….”
하나가 울먹이려고 하자 시하가 정신을 차렸다.
곁에 다가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들겼다.
승준도 괜히 미안한지 하나를 껴안았다.
“개차나. 개차나.”
“다시 또 만들면 되지. 왜 울려고 해.”
“웅…….”
선생님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이 놀이는 바로 이런 교육을 위해 존재했다.
무언가 만들려고 할 때 분명히 트러블이 생기며 실수를 할 것이다.
때로는 화내기도 하며 부딪치고, 다시 지나서 사과하기도 하고.
새로 만들자며 보듬어주기도 한다.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 경험만큼은 사회생활과 비슷하다.
물론 사회는 더 치열하고 냉정하지만.
그런 냉정함까지는 아직 몰라도 되는 법이다.
“아아! 다시!”
“같이하면 돼!”
“웅…….”
그렇게 세 아이가 하나가 되어 시혁의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몸통도 만들고 팔도 만들었다.
팔은 만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이 부분에서 감탄했다.
굵은 다리 부분 중간에서 나무블록을 반쯤 튀어나오게 하며, 그 위를 곡선으로 쌓아서 몸통과 연결한 것이다.
저렇게 되면 팔의 하중을 다리와 몸통, 두 곳에서 받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마무리로 얼굴을 만들고 나서야 시혁이 완성됐다.
“아아! 형아!”
“와! 시혀기 형아? 다?”
“와! 시혀기 오빠? 다?”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게 사람 같이 생긴 건축물이 되었지만, 시혁이라고 보기에는 모호했다.
“아아. 시하.”
시하가 블록을 잡았다.
만들어진 시혁 옆에 앉아 있는 인간을 만들었다.
탑을 세워서 그 앞에 4개의 블록으로 두 다리를 만들고 1개의 블록으로 발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마치 작은 인간이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와!”
“우와!”
승준과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따라서 그걸 만들었다.
“아아. 형아. 시하. 승준. 하나.”
시하가 하나하나 짚으며 사람을 말했다.
이렇게 둥글게 앉아 있으니 정말 세 아이와 시혁이 같아 보였다.
선생님이 놀라서 손뼉을 쳤다.
“와! 진짜 대단해!”
혹시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미리 사진을 찍었다.
찰칵.
그걸 본 종수가 입을 벌렸다.
“와! 어떻게 만들었지?”
하지만 지기 싫어서 자신의 것도 뽐냈다.
“우리도 대단하거든!”
실제로 종수네도 굉장히 높은 탑을 쌓았다.
자신의 키보다 높이 쌓은 것이다.
“선생님 누가 이겼어요?”
그 말에 선생님이 고민하다가 빙긋 웃었다.
경쟁은 발전을 돕지만, 과도한 경쟁은 서로를 죽일 뿐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누군가 이기는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지만 오늘은 그런 냉정한 교육을 하는 날은 아니다.
스포츠라면 몰라도.
“두 개 다 너무 뛰어나서 무승부! 초콜릿은 모두에게 두 개씩 줄게요.”
“쳇. 이번에 이길 줄 알았는데.”
“초코!”
종수가 혀를 찼고, 시하는 초콜릿 먹을 생각에 기뻤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사진 찍자고 모두를 모이게 했다.
찰칵.
그렇게 아이들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협동심을 배웠다.
마치 게임 개발을 하는 팀처럼 말이다.
***
나는 시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에 안경호와의 약속을 위해 동아리방에 들렀다.
똑똑.
문을 두드리자 우당탕 의자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뭘 하는 건지 황급하고 분주한 움직임이 문밖까지 전해졌다.
달칵.
문이 열리자 안경호가 나왔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요. 그런데 뭔가 치우고 있었나 봅니다?”
“하하. 사실 오시기 전에 열심히 뭘 좀 치우고 있었습니다.”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하. 아닙니다. 들어오시죠.”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서적과 A4 용지가 불규칙하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정리를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내 눈에 담겼는지 안경호가 어색하게 웃는다.
“지금 한창 뭔가 찾을 자료와 함께 만들고 있어서. 하하. 저렇게 보여도 다 정리되어 있습니다. 머릿속에요.”
“그렇군요.”
“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다들 대충 어디에 어느 자료가 있는지 압니다.”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정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정리가 된 게 맞다.
저기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책장에 여러 서적이 척척 꽂히는 순간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저렇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그게 일상인 것이다.
“아이스티라도 드릴까요?”
“아니요. 그냥 물 주세요.”
“네.”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화이트보드가 뒤로 뒤집혀 있었는데 저건 일부러 저렇게 둔 것처럼 보였다.
안경호가 물을 건넸다.
나는 살짝 목을 축인 뒤 말했다.
“흥미롭네요. 무슨 말을 할지.”
“하하. 별거 아닙니다.”
“별거 맞는 것 같은데요. 저기 화이트보드는 제가 와서 일부러 뒤집어 놓은 거 아닙니까?”
“예? 하하.”
“제가 한번 돌려봐도 돼요?”
“그건 좀…….”
곤란한 기색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편하게 말하세요.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흠. 저희는 이시혁 번역가님이 통역 일도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영어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것도요.”
“뭐.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안경호가 눈을 빛냈다.
“좀 뜬금없긴 한데 저희가 벌써 3학년의 마지막을 달리고 있습니다. 취업을 준비할 때죠.”
“뭐 저도 같은데요.”
“네. 그래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저희가 꿈이 있거든요. 이 게임 개발 동아리를 만든 것도 그 꿈을 위해섭니다.”
“멋지네요.”
순수한 칭찬에 안경호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 꿈은 외국계 회사에 저희가 개발한 게임을 인정받는 겁니다. 그걸로 본격적인 개발 착수로 들어가면 더 좋고요. 한국에 있을 생각은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알겠다.
내게 부탁할 게 뭔지.
“그럼 제가 그 게임 개발에 참여해 주면 되는 겁니까? 번역가로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반은 틀렸다고요?”
“네.”
그럼 뭐지? 어떤 부탁을 하려는 거지?
나는 더욱 궁금해져서 안경호의 입을 바라보았다.
“번역가로서가 아니라…….”
아니라?
“아니. 번역가도 맞나?”
아니. 이 사람이 장난하나?
꺼벙한 모습에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뒤이어 들린 안경호의 제안에 나는 무척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