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시하의 임무를 확인했다.
완벽하게 수행을 했지만, 애들에게 다 들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사이좋게 두 명씩 짝지어서 가기로 했다.
전부 영화관에 데려갈 여건은 되지 않지만 친한 엄마들끼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랬지.’
친한 사람들끼리!
한마디로 오늘은 승준과 하나와 함께 간다.
별로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승준 엄마도 함께 가는 거였고 시하도 같이 놀 수 있으면 좋았으니까.
이제 셋이서 다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진다.
마치 형제자매와 같은 모습의 세 사람을 볼 때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그도 그럴 게 나와 시하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고 공감을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적으니까.
이런 소꿉친구를 가지는 게 아주 큰 부분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만약 내가 시하를 혼자 어화둥둥 키우려고 했으면 이런 친구들도 못 만났겠지.
다행히 문도환의 좋은 조언이 있기에 생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냉정한 척했고 굉장히 감성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하야. 여기가 영화관이야.”
“아아!”
시하가 큰 영화관을 보았다.
매표소가 있는 곳에는 이번 공룡 영화에 맞춰 커다란 캐릭터 등신대가 있었다.
dinosaur 영화.
말 그대로 공룡 영화인 이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미국 팟쳐사가 만든 것으로 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스릴러적인 장면도 있어 충분히 4D로 즐길 만했다.
“형아!”
시하가 공룡 캐릭터 등신대를 가리켰다.
“응. 저건 바로 등신대야.”
“둥신?”
“응. 공룡 그림을 저렇게 어른 크기만큼 세워뒀어.”
“왜?”
“함께 사진 찍으라고.”
“둥신?”
“응. 둥신대.”
나도 모르게 등신대가 아니라 둥신대로 발음했다.
하긴 등신대 어감이 좀 그래서 둥신대가 나을지도?
“어? 승준이랑 하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하나랑 승준이 보였다.
승준과 하나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시하가 나에게 배운 등신대를 가리켰다.
“둥신.”
“응?”
“승준. 하나. 사진!”
“아하! 와! 나도 다이노랑 사진 찍고 싶어. 엄마. 엄마. 가자.”
승준 엄마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늦은 건 아니죠?”
“네. 안 늦었어요. 시작 시각 5분이 지나도 괜찮을걸요?”
“하긴.”
상영 시작 5~10분은 광고를 하니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손해는 없다.
오히려 늦게 들어가는 것도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시혀기 오빠.”
“응? 왜 하나야.”
“하나랑만 안 노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전에 통화했던 이야기인가 보다.
그때 하나 아버지가 반대한 거로 아는데…….
“나는 시하도 있어서. 시하랑 하나랑 승준이랑 넷이서 놀면 안 될까?”
“돼!”
“그럼 최대한 자주 놀자. 알았지?”
“응.”
승준 엄마가 내 어깨를 콕 하고 찍는다.
“그런 약속 함부로 해도 돼요?”
“뭐 어때요. 지금까지 그래 왔는데요.”
“개강하면 시혁 씨도 바빠질 거잖아요.”
“그렇게 안 바쁠 거예요. 학점을 많이 채워놔서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1, 2학년 때 엄청 열심히 했나 보네요?”
“뭐, 그렇죠.”
나야 전공과목만 들으면 끝나는 문제였다.
1학기보다는 더 여유롭게 시간 활용이 가능했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낼 생각은 없다.
자서전을 마무리한 다음 새로운 번역일을 맡을 생각이다.
언제나 안정적인 벌이를 해야 하니까.
“형아!”
“그래. 갈게.”
아이들이 다이노 앞에 서 있었다.
공룡 주인공 이름이 다이노라니.
대충 지은 게 틀림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친근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럼 사진 찍을게.”
셋이서 귀여운 한 컷.
승준은 입을 벌리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고, 하나는 손가락 하트를 만들었으며, 시하는 두 손으로 브이를 굽혔다.
아마 시하는 공룡 앞발을 흉내 낸 것 같다.
손가락 세 개가 아니라 두 개를 굽힌 것을 보면 브이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야. 잘 나왔네. 그럼 영화관에 가기 전에 팝콘하고 음료를 사자.”
나는 줄을 서서 팝콘과 사이다를 샀다.
달콤한 냄새가 나자 아이들이 팝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살며시 팝콘을 좌우로 옮겼다.
아이들의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는 마술.
너무 귀여워서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들어가서 먹자. 이건 영화 보면서 먹어야 엄청 맛있거든.”
그렇게 우리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갔다.
“자. 시하야. 저 사람에게 표를 주는 거야. 할 수 있지?”
“아아.”
시하가 자신감 있게 표를 제출했다.
직원이 그런 시하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2명 맞네요. 저기 4관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죠?”
“아? 너이. 간?”
“풋! 네. 너이 관으로요.”
직원이 센스 있게 잘 알아들어 다행이다.
승준과 하나도 직원에게 표를 준 뒤에야 우리는 드디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직 한창 광고를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안내 방송이 나왔다.
어디로 대피할지 나오는 방송.
오랜만에 온 영화관이라서 그런지 참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4D는 생전 처음이었다.
“시하야. 기대되지?”
“아아.”
“시혀기 형아. 쉿! 이제 해.”
“어. 그래. 알았어.”
그렇게 시작된 영화.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악역인 티라노사우루스를 피해 도망치는 장면에서 의자가 덜덜 떨렸다.
크아아아 하고 울음소리가 나올 때는 바람이 휭 하고 불었다.
아이들은 그게 신나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다들 즐겁게 관람해서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 있지 않은가.
놀랄 때 다들 고함치며 놀라고, 웃긴 장면이 나올 때는 다 같이 웃고.
영화관에는 그런 것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는데 눈시울을 붉히는 남자들이 보였다.
“흑흑.”
시하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형아.”
“응. 마지막에 좀 슬펐지?”
“아아.”
“그래서 저 형들도 감동해서 우는 거야.”
마지막 장면.
주인공인 다이노를 구하기 위해 친구가 악역에게 당해서 쓰러졌다.
다이노는 울면서 티라노와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때!
친구의 영혼이 다이노의 손과 손을 겹치며 결국 악당을 물리칠 수 있었다.
친구는 죽어서까지 다이노를 도운 것이었다.
앞의 남자가 말했다.
“친구 영혼이 떠나갈 때 대사도 장난 아니었어.”
“크으. 나도 그런 대사를 하는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그 대사를 떠올려보았다.
[울지 마. 다이노. 너와 나눈 포도 주스는 내 인생에 한 점 후회도 없었어. 혼과 혼이 맺는 친구의 증표잖아. 언제나 난 네 안에서 살아갈 거야.]
컵 위로 따른 포도 주스를 보며 사실 미묘한 표정을 지었었다.
뭐 어디서 본 장면인 것 같았지만 저렇게까지 감동하지는 않았다.
저 사람들을 보니 내 감정이 메말랐나 싶었다.
옆을 보니 시하도 울지 않았다.
“시하야. 안 슬퍼?”
“왜?”
“어? 아니야. 안 슬프면 됐지.”
“형아. 다이노. 여기. 이써. 친구.”
“그래. 여기 가슴에 살고 있지. 맞지?”
“아아.”
뭘 알고 말하는 걸까?
“형아. 눈. 이써. 시하 손 이써.”
“응? 그래. 형아 눈도 있고 시하 손도 있지.”
“아아.”
나는 좀 뜬금없는 말에 시하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이노 친구의 영혼이 눈을 통해 보고, 손을 통해 같이 만들어간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시하는 그런 의미를 전한 건지도 모른다.
그때 승준이 시하에게 손짓했다.
“시하야.”
“아?”
“우리도 포도 주스 마시자. 같이 컵에 부딪히는 거야.”
아무래도 승준은 친구의 증표를 중요하게 봤나 보다.
이런 걸 따라 하려는 걸 보니.
밖으로 나가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마치 이걸 위해 준비했다는 듯.
“굿즈 판매합니다. 다이노와 나눈 이 컵! 포도 주스와 함께 구매하시면 좋습니다. 여기 캐릭터 인형도 있으니 한번 보고 가세요.”
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판매원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노골적인 상술이 영화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뿐만 아니라 푯말에 커다랗게 [한정 판매!]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이번에 개봉하면서 그때만 파는 굿즈라는 거다.
하하. 설마 내가 이런 거에 당할 수는 없…….
“형아!”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기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상술에 당해 줘야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 굿즈를 파는 곳으로 갔다.
앞에는 이미 살짝 눈물을 훌쩍였던 성인 남자 3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있으며 어딘가 셋 다 닮은 외모.
그 셋이 컵을 들고 대화했다.
“와! 이건 사야 해!”
“이야. 솔직히 한정 판매면 살 수밖에 없지.”
“여기 포도 주스도 살까?”
승준 역시도 인형보다는 컵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하나는 다이노 인형을 가지고 싶어 했고, 시하는 포도 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시하야. 굿즈는 관심 없니?
굿즈에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포도 주스가 마고 싶은가 보다.
승준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아~ 왜~ 하나만. 응?”
“하나도 하나만~”
둘이서 간곡히 부탁했지만, 승준 엄마는 끄떡없는 모습을 보였다.
“형아. 포도!”
“으응? 포도 주스 먹고 싶어?”
“아아.”
“그래. 알았어.”
나는 포도 주스를 드는 김에 컵도 세 개 샀다.
어린이들에게 맞춘 작은 머그컵.
어차피 시하 전용 컵을 하나 살 생각이었다.
하나와 승준에게도 이런 선물을 하고 싶기도 했다.
시하랑 잘 놀아줘서 고마웠으니까.
“자. 시하야. 여기. 승준이하고 하나도 받아.”
“아아!”
“와~ 신난다!! 시혀기 형아 고마워!”
“아싸! 시혀기 오빠 고마어~”
쌍둥이가 신나서 폴짝폴짝 뛴다.
시하만이 내게 컵을 쭈욱 내밀며 포도 주스에 시선을 고정한다.
어서 따라 달라는 소리겠지.
“일단 저기에 앉아서 마시자.”
승준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안 사줘도 되는데…. 시혁 씨 얼마였죠?”
“아. 괜찮아요. 이 정도는. 얼마 안 하는데요. 뭐. 저기 인형이 훨씬 비싸지…….”
저기 인형을 하나씩 사달라고 했다면 나는 손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굿즈는 비쌌다.
“자. 다들 한잔하게나.”
나는 포도 주스를 컵에 따라주었다.
다들 신나는지 컵을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자. 이 포도 주스를 나누면 이제부터 영원한 친구야. 건배!”
“아아! 건배!”
“건배다!”
“하나도!”
“우리도. 우리도 건배~”
엥?
이상한 잡음이 섞이고 컵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옆에서 똑같이 생긴 남자가 등짝을 쳤다.
“미친놈아! 네가 거기 왜 끼어!”
“아! 따가! 살살 좀 때려. 아니, 낄 수도 있지. 뭘? 친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정신 차려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시하가 말했다.
“가치.”
그 말에 승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해. 같이해.”
“하나는 시혀기 오빠랑 엄마도 가티해쓰면 좋케써.”
결국, 컵을 더 샀다.
직원의 얼굴이 흐뭇함으로 물든다.
저게 과연 애들이 귀여워서 나온 흐뭇함인지, 아니면 판매에 만족한 흐뭇함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전자일 것이다.
설마 후자겠어?
그렇게 결국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건배를 했다.
“건배!”
짠!
컵이 부딪친다.
승준이 호쾌하게 포도 주스를 마신다.
하나가 맛있게 마신다.
우리 시하는 조금씩 아껴서 마신다.
“시하야. 포도 주스 많아.”
“아?”
시하가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서이, 너이…….
그리고 다시 한번 포도 주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반이나 없어졌다.
“아냐.”
“없어지면 형아가 또 사줄게. 아껴서 안 먹어도 돼.”
“아아.”
그제야 시하가 꼴깍꼴깍 주스를 마셨다.
나도 그제야 컵에 입을 댈 수 있었다.
웅웅.
[홍진수 과장]
연락이 와서 주스를 못 마시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시혁 씨?」
“네.”
「하하. 좋은 일감이 왔습니다.」
“뭔데요?”
「금색 시곗바늘 시리즈 2탄이 나왔습니다. 이 작품 번역을 시혁 씨가 해 주시면 됩니다. 제이슨 작가님도 그걸 원하시고요.」
“오! 진짜요? 금색 시곗바늘 번역할 때 굉장히 재밌었는데. 호평을 받았잖아요.”
「그거야. 시혁 씨가 잘 번역해 줬으니까 그렇죠. 솔직히 초월번역 아닙니까.」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건 아닌데요.”
「하하. 아무튼, 원고는 메일에 보내 두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 톡으로 이야기해도 되지 않아요?”
「에이. 톡으로 이야기하면 정 없죠. 우리가 그렇게 딱딱한 비즈니스적 관계가 아닌…….」
“아. 지금 영화관이라 끊어야겠네요. 뭐? 시하야. 이제 시작한다고? 그럼 다음에 통화하겠습니다.”
「잠깐 파트너…….」
뚝.
하여간 더 통화했다가는 쓸데없는 소리가 절반이 될 거다.
잘 끊은 거다.
“저기…….”
“네?”
“정말 이시혁 번역가이신가요?”
남자 셋 중 한 명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살짝 뒤로 물러났다.
뭐야…. 무서워…….
“저 아세요?”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금색 시곗바늘 번역하신 이시혁 번역가님이시라는 거죠?!”
“아, 네…. 제가 번역했죠.”
“오오!”
남자의 안경알이 천장의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났고, 나는 그마저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그다음에 나오는 말에 나는 아연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