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영화.
넓은 스크린 속에 약 2시간 동안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기는 곳.
알면 알수록 더더욱 새로운 모습과 해석이 보이며, 감독의 의도마저 꿰뚫어볼 수 있다.
연기, 연출, 시나리오.
즐길 만한 요소가 산더미처럼 존재하며 감상을 느끼는 것도 다양하다.
장르 역시 마찬가지.
스릴러, 미스터리, 로코, 로맨스, 드라마, 공포, 코미디 등등.
인생이 다양한 것처럼 우리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 또한 풍성할 따름.
내게 첫 영화도 그러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간 날.
장르는 비록 애니메이션이었을지라도 그날의 두근거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툴툴대며 왜 쓸데없는 데 돈을 쓰냐며.
비디오나 보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웃으며 자기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흥분해서 말하는 것도 참으로 웃겼다.
아빠처럼 다 큰 어른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애니메이션을 그렇게 좋아한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했던 거라고.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찾아보질 않을 정도.
나는 그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기 아버지가 적어놓은 육아일기만 봐도 그렇다.
-시혁이의 육아일기.
[오늘은 시혁이와 영화를 보기 위해 준비를 했다.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잔소리할 게 뻔했기 때문에 미리 영화표를 산 것이다.
이렇게 적다 보니 조금 억울했다.
아내도 없는데 왜 아내에게 변명하는 남편의 모양새가 되어 버리는 걸까?
아무튼, 야무진 아들을 위해 영화표를 들고 유혹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아빠 보고 싶은 걸 보지 왜 비싼 돈을 쓰냐고 뭐라고 했다.
자기에게 돈을 쓰지 말라는 걸까?
말 하나하나에 가슴이 아팠다.
시혁이 이렇게 크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의 인격은 이미 이렇게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아빠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고 싶어서 그래! 어른도 많이 본다니까?”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애는 애인지 영화에 관심이 생기나 보다.
이미 사 버린 건 어쩔 수 없다면서 영화표를 기웃거리며 보는데 웃음이 나왔다.
시혁을 무릎 위에 앉히며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도란도란해 주었다.
아마도 시혁은 기뻐했겠지.
그 기쁨이 내 삶의 원동력이다.
아이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는 걸 너는 언제쯤 알게 될까?
사실 잔소리 듣는 것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일부러 그런 적도 많으니.
“이제 아빠랑 영화관에 가자.”
그렇게 영화관을 갔는데 그냥 들어갈 수가 있나.
팝콘이라도 사서 들어가려고 하자 거기서 또 티격태격하게 되었다.
나중에 밥 먹으러 갈 건데 팝콘이 말이 되냐면서.
하지만 아빠로서는 시혁이 첫 영화관을 잘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팝콘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팝콘은 못 샀지만 그래도 영화는 참 재미가 있었다.
일부러 흥분한 척 침을 튀기며 말하자 시혁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조용히 하라며 나를 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내가 부끄러웠나?
그래도 뒤에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정말 재밌었어요.”라고 말하는 걸 보니 뿌듯했다.
이 맛에 아빠를 하고 이 맛에 돈 쓰는 거지.
“다음에도 또 올까?”
“안 돼!”
상기된 표정으로 좋아했으면서 참으로 단호했다.
그렇게 말해도 들을 아빠가 아니다.
왜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철이 없다고 하잖나.
나는 아들에게 철없는 아빠가 될지언정 너에게 근사한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다음에도 몰래몰래 영화 예매권을 사둬야겠다.
아니지. 그냥 산 게 아니라 이벤트에 당첨되었다고 해야겠다.
그래야 하는 수 없이 시혁이가 따라오지.
요 녀석아. 너는 모를 거다.
너를 위해서 특별하게 맨날 핑계를 궁리한다는 걸.
+추가) 머리가 굵어졌다고 이제 통하지 않는다.
이벤트에서 받았고.
영화관에 일하는 사람에게 받았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선물로 받았고.
길 가다 주웠다고도 했고.
출판사에서 선물로 보내 줬다고 했고.
참으로 다양한 핑계를 대긴 했다.
하지만 이제 통하지 않는다.
증거를 제출하란다.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해서 얼른 도망쳤다.
짜식. 눈치만 빨라져서는.
아니면 내가 너무 말이 안 되게 자주 써먹었나?]
***
택배가 도착했다.
공룡 전집과 영화 예매권.
내가 아버지의 육아일기를 떠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공룡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다는 것.
1매에 2인이라고 적혀 있는데 총 4매가 왔으니 8인이 입장할 수 있다.
“시하야.”
“형아!”
시하는 지금 영화 예매권보다 상자에 있는 책이 중요한가 보다.
공룡 책들이 한가득 있으니 정말 좋겠지.
“책 많아서 좋아?”
“아아!”
“이야. 그림도 많네? 그치?”
“공렁.”
“박물관에 본 공룡들도 많고.”
“아아.”
시하가 공룡들을 떠올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흉내를 냈다.
손가락을 세 개 펴고, 크아아아 하며 울음소리를 따라 했다.
나는 거기에 편승해 같이 크아아아 해 주었다.
“크아! 형아!”
시하가 내 팔을 콕 찍었다.
“시하야. 형아 아야 해. 손톱이 날카로워서.”
“아?”
과장되게 행동하자 시하가 깜짝 놀랐는지 내 팔을 쓰담쓰담해 준다.
어디서 배웠는지 “나아라. 나아라.” 하고 주문도 걸어 줬다.
정말 다쳤을 때 시하가 이렇게 해 주면 하나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오! 다 나은 것 같은데?”
“형아. 개차나?”
“응. 형아 괜찮아.”
나는 시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후 영화 예매권을 꺼냈다.
이제 책에서 관심이 멀어졌으니까.
“자! 이건 공룡을 볼 수 있는 표야. 한 표에 두 명이 들어갈 수 있어. 알겠어?”
“아?”
“모르겠다고?”
“아냐. 이거. 두 명!”
“응. 맞아. 이거 하나를 주면 두 사람이 공룡을 볼 수 있게 해 줘. 영화관이란 곳에 줘야 해.”
“아아.”
나는 시하에게 영화표 3개를 쥐여 주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친구들에게 몰래 줘. 몰래. 알았지?”
“아아.”
시하가 자신의 펭귄 가방을 질질 끌고 오더니 그 안에서 각티슈를 꺼냈다.
그리고 각티슈 안에 영화표를 넣고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니. 시하야. 거기에 왜 영화표를 넣어?
하여간 엉뚱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예전에는 직사각형을 들고 다녔다면 요즘은 정사각형을 들고 다닌다.
아무래도 부피가 작은 걸 선호하는 거 같다.
“형아. 티슈!”
“응. 티슈 안에 넣었어?”
“아아.”
“안 잃어버릴 자신 있어?”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아마도 저 영화표는 승준과 하나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남은 표는 종수에게 주겠지.
재휘에게 줄 수도 있겠지만 공룡을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으니 굳이 주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잊지 말고 줘야 해. 알았지?”
“아아.”
“몰래. 몰래. 알지?”
“아아.”
비장한 표정의 이시하.
그는 과연 미션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지켜보면 알겠지.
***
-어린이집.
오늘 임무를 맡은 시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아가 몰래 주라고 했으니 그걸 완수하기 위해 가방을 구석에 두었다.
승준이 그런 시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야. 뭐 해?”
“아? 쉿!”
시하는 검지를 들며 입가에 대었다.
승준이 뭔가 또 놀이를 하는 걸 눈치채고 같은 행동을 한다.
하나는 뭔지 모르겠지만 오빠랑 시하의 행동을 따라 했다.
자기도 같이 끼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서로 검지를 댄 체 침묵이 흘렀다.
먼저 움직인 것은 시하였다.
슬금슬금.
그 뒤를 따라 쌍둥이도 움직인다.
“세 사람 다 뭐 해요?”
선생님이 그런 모습을 보고 물었다.
시하가 대답 대신 검지를 들었다.
선생님도 왠지 참여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얌전히 정좌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어린이집에 스며들었다.
어느새 종수도 재휘도 검지를 든 채 따라 했다.
원장은 이게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 지켜보고 있었다.
재휘가 말했다.
“근데 이거 뭐 하는 거야?”
대답은 승준에게서 돌아왔다.
“쉿. 떠들면 벌칙을 받는 거야.”
그런 룰을 정한 건 없지만 애들이 그 말을 듣고 더더욱 입을 막았다.
그렇게 모두가 시하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시하는 당황했다.
왜 다들 자신을 쳐다보지?
몰래 영화표를 줘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색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몰래 줄 수 있는 방법.
그때 시하의 눈에 이불이 밟혔다.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졌고, 이불은 펭귄 가방을 덮었다.
드디어 마련된 은밀한 장소.
시하가 거기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엉덩이만 빼꼼 내민 채.
시하가 손짓으로 승준을 불렀다.
승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면 돼?”
“아아.”
승준이 뭔지 모르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렇게 두 개의 엉덩이가 이불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시하는 몰랐다.
이런 행동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는 걸.
“승준.”
“응.”
“이거.”
시하가 각티슈에 빼낸 영화표를 넘겨주었다.
“몰래.”
“몰래?”
“아아. 가져.”
“아. 이거 몰래 주는 거구나?”
“아아.”
시하의 화법을 용케 알아들은 승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을 벗어나 영화표를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쏙 넣었다.
다음은 오하나.
하나가 쏙 들어와 시하를 보았다.
“하나. 이거. 몰래.”
“응! 시혀기 오빠가 날 위해 몰래 주라고 한 거지?”
시하는 놀란 얼굴로 하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
물론 하나는 시하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리고 하나의 말뜻은 시하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히힛. 시혀기 오빠랑 논다!”
하나가 기쁜 얼굴을 하며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시하에게 남은 영화 예매표는 하나였다.
이걸 누굴 줄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줄 사람이 없다.
“아아!”
시하가 꼬물꼬물 이불에서 나와 선생님을 불렀다.
“샘!”
“응? 나?”
“아아.”
시하의 부름에 선생님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거기에 영화표를 받는 건 당연한 수순.
시하가 몰래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주의를 시키자 선생님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고이고이 접어서 살며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모든 임무를 마무리한 시하가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아아.”
그런 시하의 반응에 아이들이 의문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종수가 물었다.
“이제 끝이야?”
“아아.”
“???”
종수는 도대체 무슨 놀이인지 알 수 없어서 승준을 바라보았다.
“승준아. 이게 무슨 놀이야?”
“그것도 몰라? 난 종수가 다 아는 줄 알았는데.”
“흥!”
승준의 말에 종수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
이대로 못 맞추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애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 답을 송출해냈다.
“그래. 알겠어. 이건 마피아 게임이라는 거야!”
아이들은 마피아 게임이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역으로 맞춰보라고 했던 승준 역시도 마피아 게임을 몰랐다.
종수의 콧대가 높아졌다.
“마피아 게임은 말이야. 저렇게 어두운 곳에 가서 비밀 지령을 받는 거라고!”
승준이 움찔했다.
대충 알아맞혔으니까.
물론 종수는 그냥 말했을 뿐이고 얻어걸린 것뿐이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맞지? 비밀을 가르쳐준 거지!”
“아?”
“왜 아니야?”
“아냐. 비밀 아냐. 몰래.”
“몰래나 비밀이나 같은 거야.”
“비밀?”
“그래.”
그런 거라면 맞다고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수가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비밀 지령이 뭔데?”
“아아. 몰래. 주기.”
“역시!”
선생님이 입을 벌렸다.
그걸 말하면 몰래 주는 의미가 있었을까?
“뭐 줬는데?”
하지만 눈치 빠른 승준이 말했다.
“그건 비밀이야! 나하고 하나하고 쌤만 알아!”
“쳇! 치사하게.”
그때 하나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머야! 시혀기 오빠랑 둘만 노는 거 아니어써? 같이 영화 보는 줄 알았는데.”
하나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영화 예매표가 들려 있었다.
종수가 제법 빠른 눈썰미로 하나의 손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똑똑한 종수는 글을 조금 읽을 줄 알았다.
“고, 공룡? 영화?!”
그 말에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이번에 개봉하는 공룡 영화.
그건 아이들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희들만 가고 치사해! 그거 하나면 두 명이 갈 수 있는데!”
종수가 이런 영화 예매표를 본 적이 있어서 나올 수 있는 지식이었다.
선생님이 아이고야 하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현재 표를 받은 사람은 세 명.
그렇다면 표는 세 개.
오랜만에 종수의 머리가 긴밀하게 돌아갔다.
“그럼 저 표로 두 명씩 짝지어 갈 수 있는데!”
뒤에 있던 재휘가 살며시 “나는 안 보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
시하는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무튼, 임무는 완수했다.
“형아.”
시하는 이 일과 상관없이 형아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가득 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