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500)

123화

-아루아루 사무실.

대표는 하동철을 만났다.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눈동자가 보였다.

하동철의 초점 없는 눈이 그의 피로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성과는 좀 있어?”

“있지…….”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너도 들으면 나랑 같은 표정 지을 거다.”

대표는 뚱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대체 얼마나 잘난 놈이 알리사를 도와주길래 이러는가 싶어서.

하지만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뭔데. 누가 도와주는 건데? 아니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

“누가 도와주는 건 아는데 어떤 일을 벌일지는 모르겠어. 추측하자면 해외 수출이겠네. 이건 네가 아무리 잘나도 못 막아.”

“대체 뭘 알았길래 해외 수출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이쯤 되면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하동철이 앉은 소파로 다가갔다.

가운데 의자에 앉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말해 봐. 누군데?”

하동철이 패드를 꺼내며 사진을 띄웠다.

“이름은 이시혁. 23살이고 강인대학교에 다니고 있어. 그리고 뒤를 따라가다가 알게 된 건데 방송도 한 번 나왔더라. 나도 어디서 봤다 싶었지.”

“그래?”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야. 통역사로도 일하고 있는데 그 인맥이 대단해.”

“지가 대단 해봤자지.”

“아마 이걸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여기 인별 보이지? 경력이 화려하다고.”

KI 미디어, 하비니스 기업, 멜츠, UX, NM 게임 회사 등.

인별에 올려진 경력들이었다.

“그것뿐만 아니야. 친분도 엄청나다고. 여기 사진들에 달린 댓글 좀 보라고.”

-니콜드 : 다음에 만날 때는 술 한잔합시다!

-리암 : 독일에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ㅎㅎ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니엘 : 싱가포르 올 생각은 없나? 없으면 내가 한국에 갈 때 한번 보지ㅎㅎ

-장웨이 : 저번에 말한 제안은 언제든지 유효합니다.

-홍진수 : 다른 출판사님들. 서로 상도덕은 지킵시다. 예?! 시혁 씨 저희랑 신뢰도 높아요!

-벨 : ㅋㅋㅋ

-웰 : 벨! 여기서 뭐 해?

뭔가 중간에 이상한 게 끼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표가 하동철을 쳐다보았다.

“이게 왜?”

“여기 댓글 단 사람들. 다들 한자리하거나 대표님이야. 부사장도 있다고.”

“그래서? 한국에서 꽤나 힘쓸 수 있을 것 같아? 분야도 다른데? 아마 이런 일로 다른 사람에게 부탁도 못 할걸? 왜냐. 쪽팔리거든.”

“그건 그렇지…….”

친분이 있는 한국 기업에게 부탁은 못 할 것이다.

이건 다른 나라로서도 그렇고 기업 이미지로서도 그렇다.

괜히 저런 손쉬운 부탁을 하는 건 일종의 지고 들어가는 거나 다름이 없으니.

그리고 이런 사소한 것도 해결 못 하고 부탁을 한다는 이미지도 줄 수 있었다.

하동철은 여기서 다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하비니스 기업은 해외수출에 도움을 줄 수 있어. 섬유, 의류 쪽으로 대기업이니까.”

“크흠. 역시 믿는 건 이쪽 인맥인가?”

“그렇지. 내가 조사 좀 해 봤는데 여기가 섬유박람회 때 표절당한 회사였거든. 아마 그쪽으로 이시혁이 도움을 줬나 보더라고.”

“그래?”

“어.”

하동철이 어제 알리사와 들은 대화를 상기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기사를 찾아봤는데 하나 걸렸다.

물론 실제로 시혁이 하비니스 기업에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다.

대표가 턱을 쓸었다.

“흠. 이건 못 막겠네.”

“그래. 너도 이쯤에서 손 떼는 게 좋겠어.”

“내가 왜?”

“봤잖아. 저 친한 인맥들. 어떤 인맥이 더 있을 줄 누가 알아?”

“아니. 한국 인맥도 아니고 이 정도면 내가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그럼 나는 여기서 손 뗄게.”

“대체 왜 그러는데?”

대표는 황당하다는 듯이 하동철을 보았다.

배포 있는 친구였다.

이렇게 뒤를 보고 도망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떨 때는 과감하게 나가는 면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딘가 모르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생각해 봐. 저 인맥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불과 몇 개월 만에 만들어진 거로 생각하기에는 이상하지 않아?”

“저 이시혁에게 뭔가 있다는 거야?”

“그렇지…. 어제 내가 이시혁에게 누군가 행님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

대표가 그게 뭐 어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행님이라고 부르는 건 흔하디흔한 호칭이었으니까.

하동철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람이 거구더라고. 적어도 2미터는 되어 보였어. 그리고 몸에 터질 듯한 근육도 장난 아니었지.”

“설마 조폭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아마도? 내 생각은 이래. 아마 조폭이 운영하는 경호업체 사장이겠지. 거기 행님이라고 불리는 게 바로 이시혁이고. 이시혁 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니 뭔가 있는 거 아닐까?”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니. 생각해 봐. 이 기업들의 인맥을 어떻게 생각해? 대표들도 있는데. 아니야? 23살에게 통역을 맡기는 것도 웃기는데 이런 사람들과 일을 한다? 첫 경력이 이거라고?”

대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만약 드러난 인적사항이 이 정도라면?

드러내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거라면?

어쩌면 이건 심각한 사항일 수도 있다.

하동철이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자, 봐. 이게 바로 행님행님하던 사람이야. 인상 좀 봐. 엄청나지?”

“으음.”

누가 봐도 조폭 같은 얼굴의 백동환이었다.

사진으로 찍었는데도 드러나는 거구.

하동철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이 정도면 서울 4대 조직은 통합할 정도라고.”

“서울에 4대 조직이 어딨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 정도 되니 대표도 조금 쫄렸다.

“더 조사는 못 하겠지?”

“말도 마. 이시혁이라는 놈도 보통이 아니야. 잠깐 부딪쳤는데 내가 수상하다는 걸 감으로 느끼더라니까? 내 감이 증거야.”

“그 정도라고?”

프로페셔널한 친구가 잠깐 부딪친 정도로 수상한 걸 느꼈다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착각이다.

그저 시혁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습관이 잡혔을 뿐이었다.

“쩝. 이건 접자. 굳이 이런 리스크를 쥐면서 계속 건드릴 필요는 없지.”

“그렇지? 이대로 묻고 가자.”

“그래. 수고했어. 수고비는 줄게.”

“어허이. 위험수당도 넣어줘야지. 잘못하다가 나 이 거구에게 맞을 뻔했다.”

“엄살은…….”

대표가 어이없어하며 흰 봉투를 건넸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몰랐다.

두 사람이 끝낸다고 이 사건이 끝나지 않음을.

***

알리사는 미국으로 떠났다.

거기에서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굉장히 일정이 순조로웠다.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개발도 순조로워서 시범 운행을 한다고 했다.

그 일정에 맞춰 옷을 공급하게 되어 일이 술술 풀렸다.

이미 공급한 물량에 대한 가격은 스티브 백이 치러줘서 적자를 면했다.

그와 동시에 고소장이 접수되고 악플을 단 아이디에게 쪽지로 통보했다.

재밌는 점은 그런 악플들이 굉장히 뻔뻔하다는 거다.

-이제 취업준비생인데 이게 고소로 넘어가면 앞으로 인생 끝장납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죄송합니다. 너무 삶이 너무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부모님과 저는 앞으로 더더욱 힘들게 되는데 이렇게까지 하실 건가요?

-제가 빌빌거리며 산다면 당신 눈에 피눈물 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사과하다가 오히려 고소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들고 있다.

저들은 난리 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학교가 투자한 일종의 기업.

심지어 강인대학교가 배출한 판검사, 변호사 출신들도 다수가 있다.

과연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날까?

뻔할 뻔 자 아니겠냐고.

또 재밌는 점 하나.

어떤 사람은 변호사 쪽을 가해자로 만드는 댓글을 남겼다.

-남의 인생 망쳐놓고 돈을 버시면 좋습니까? 그 피 묻은 돈으로 얼마나 잘살 거 같아요?

왜 자신이 찔렀던 흉기는 기억하지 못한 채.

자신의 흐르는 피만 생각하는 걸까?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은 상처가 되고, 흘린 피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부족한 피를 수혈해야 하지만 그건 쉽지 않다.

적어도 곁에 있는 친구들과 위로가 조금이라도 수혈을 해줄 뿐이다.

알리사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함께 손잡을 수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혼자가 아니란 걸 깨달아서 다행이다.

함께 두 손을 맞잡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그 손을 지팡이 삼아 한 걸음씩 걸을 수 있다.

“아! 기사 뜰 시간인가?”

나는 폰을 꺼내서 기사를 읽었다.

[의류 서브스크립션 서비스의 시작]

-현재 미국에 있는 SB 의류가 서브스크립션 서비스를 다음 주에 시작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중략)

한국에 있는 파랑몰 대표 알리사 씨는 디자인 제공에 뛰어들어 한국에 외화를…….

“음. 잘 적었네.”

그것뿐만 아니라 파랑몰이 어떤 경로로 공격을 받았는지 밝혀지자 더더욱 이슈가 되었다.

시작은 알리사의 인별이었고 그다음은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자연스레 기사로 작성됐다.

화제에 연이은 편승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루아루도 광고가 됐다.

나쁜 회사의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결말을 맞이했다.

매출이 급감하며 사업을 접어야 할 처지가 됐다.

브랜드 이미지가 이렇게 무서웠다.

아루아루라는 이름을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하야! 이제 다 끝났어!”

“아아.”

“그런데 뭐 그려?”

“아아. 이거!”

시하가 태블릿을 들어 그림을 보여 주었다.

“우와! 진짜 잘 그렸는데?”

“아아.”

“형아가 오랜만에 그림 올려줄게. 요즘 뜸했지?”

“아아. 하트!”

“하하. 그래. 하트 많이 받자!”

이렇게 귀여운 시하에게 하트를 안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시하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만.

***

-시하의 그림. 픽시브 업로드.

[제목 : warmth(온기)]

1. 오른쪽에 있는 손잡이가 부러진 머그컵 그림.

2. 손잡이가 다시 붙여진 머그컵 그림.

3. 손잡이가 왼쪽에 있고 그 위에 따뜻한 음료가 채워져 있는 그림.

머그컵 한가운데에는 왼손으로 엄지를 척 든 그림도 조그맣게 그려져 있다.

4. 손잡이가 안 보이고 양손으로 감싼 머그컵 그림.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warmth #4cut toon #not alone

[댓글]

-모두 외쳐! 시하페페!!

-와! 돌아왔구나! 시하페페!!

-대체 뭐 하다가 온 거야?!

-왜 그래? 왔으면 됐지. 그런데 오늘은 무슨 그림이지?

-오! 오늘도 따뜻한 그림이네!

다들 시하의 그림을 보고 좋아했다.

-손잡이가 부서졌는데 다시 붙였네?

-안에는 따뜻한 음료가 채워졌어.

-손잡이를 안 쓰고 양손을 쓰게 되었네? 이게 무슨 뜻일까?

-해석하기 어렵겠어.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시혁이 시하가 지금까지 한동안 그려놓았던 머그컵 그림을 순서에 맞게 배치한 것뿐이니까.

-내 생각에는 부러져도 다시 붙이면 된다는 뜻인 것 같아.

-오! 그럼 다음은?

-하지만 손잡이에 금이 간 채로 붙어 있잖아. 그럼 쓸 수 없겠지. 그래서 양손으로 잡은 거야.

-그럼 온기는 무슨 뜻인데?

-시하페페는 의인화를 잘 쓰지. 아마 누군가의 도움으로 고쳐지고 쓰이는 것. 아마 그게 사람 사이에 온기라는 뜻이 아닐까?

-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아!

-진짜다! 헤시테그에 혼자가 아니야, 라고 적혀 있어!

-마자! 그런 뜻 맞는 것 같아!

-캬! 역시 시하페페! 외쳐! 시하페페!

시혁은 알리사를 도와준 사람들의 온기에 대해 생각하고 쓴 건 맞았다.

4컷의 의미까지 생각하고 배치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얼추 시혁의 스토리를 잘 따라간 건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등장하는 해석가가 존재했으니.

-쯧쯧. 아직도 일차원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군.

-뭐야? 넌 또 다른 해석이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하아~ 이번에는 일차원적으로 생각 안 했거든!

해석가는 그 말을 부정하며 자신의 해석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하나의 의미가 더 숨어져 있지! 아무도 눈치 못 챈 것 같군!

-그게 뭔데;;;

-오늘 업로드한 날짜를 잘 봐!

-???

-8월 13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하아. 사회에 관심 좀 가져! 바로 세계 왼손잡이의 날이라고!!!

-???

-그리고 돌려진 그림에는 세계 왼손잡이의 날 기념 그림 로고가 그려져 있지! 바로 왼손으로 엄지를 든 그림말이야!!!

-?!

-이건 이날을 노렸다고 할 수밖에 없지!

우연이다.

시혁은 이날을 노린 적 없다.

심지어 시하도 그냥 카페에 있는 머그컵을 그대로 그렸을 뿐이다.

-이래서 시하페페가 대단한 거야!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컵을 잡는 것을 차별하지 마라. 우리는 양손으로 온기를 나눌 수 있다!

-어?!

-우리는 이런 차별하지 말고 오른손과 왼손의 온기를 잘 나누자! 이런 뜻이지!

-지, 진짠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해석가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이게 바로 시하페페의 따뜻한 그림에 숨어져 있는‘진짜 의미’다!

-와! 엄청나! 이게 진짜라고?!

시하페페의 해명이 없는 이상 댓글을 보러 온 사람들은 헷갈릴 것이다.

그럴듯한 해석은 악플일까? 아니면 선플일까?

어찌 되었건 이 댓글을 쓴 사람들은 시하페페의 그림을 사랑한다는 건 틀림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그들의 온기가 닿을 수 있는 세상이 된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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