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500)

122화

관찰.

숨은그림찾기든 숨바꼭질이든 꼭 필요한 능력이다.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라면 신경 쓰지도 않겠지만 한 번이라도 마주한 적 있다면 어느 정도 기억을 하는 편이다.

‘수상해.’

그래. 수상하다.

저기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 앉은 남자.

자세히 보니 부딪쳤던 그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선글라스뿐만 아니라 옷차림 역시도 달라져 있었다.

전에 봤을 때는 오버핏인 반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었다면.

지금은 반팔 셔츠와 슬렉스를 입고 있었다.

‘여기에는 우리보다 빨리 온 거 같지만…….’

얼음만 남은 투명한 플라스틱 컵을 보면 알 수 있다.

최소 10분 전에서 30분은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도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빠른 사람이라면 한 페이지당 7초.

느린 사람이라도 1분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책이라고 해도 전문서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데 저건 소설이잖아?’

저 부분이 감명 깊었다면 또 모르지.

하지만 왠지 이쪽 이야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걸까? 과대망상을 하는 걸까?

우연히 부딪친 게 한 번.

175 정도의 키와 체격.

거기에 우리보다 먼저 왔다고 하더라고 옷을 갈아입은 것까지.

과연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응. 햇볕이 눈을 뜨겁게 하는 거 맞지.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는 거야. 시하 똑똑하네.”

“아아.”

시하가 치즈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어쩌면 정말 우연일지도 모르고, 망상일지도 모른다.

옷 역시도 원래 갈아입으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무엇하나 확신하기에는 애매했다.

하지만 만약…….

“알리사. 그거 다 먹으면 가죠.”

“어디요?”

“경기장에 돌아가는 건 좀 그렇고 잠시 드라이브?”

“얼마 안 있으면 경기 끝나지 않나요?”

“글쎄요.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때 생각나시죠? 디자인 패턴 표절 사건.”

“아! 기억나죠.”

“아무래도 그때의 도움이 필요할 거 같아요.”

“아하…….”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진작 말해 주시지.”

“이번 일을 이겨내기 위해 그 사건을 좀 이용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거라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좋아요. 애들 데리고 잠시만 드라이브해요. 이거 빨리 먹을게요.”

알리사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급하게 안 먹어도 되는데요.”

“그럴 수 있나요. 갑이 하자면 을이 할 수밖에요.”

“하하…….”

우물우물.

“그렇잖아요. 오늘 미팅 건으로 온 건데, 제가 너무 억지 부렸죠?”

“…그렇지는 않아요.”

도대체 무슨 연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알리사의 미팅 상대는 나라는 걸로 바뀐 것 같다.

알리사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깨끗한 접시를 보여 주었다.

아이들이 대단하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알리사 누나 대박! 먹방이야!”

“엄청 마시께 머거!”

“아아! 리사!”

알리사가 냅킨을 놓았다.

“이제 가요. 전 드라이브 미팅은 생전 처음이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 탔다.

세 아이가 조르르 뒤에 타고 알리사가 조수석에 앉았다.

나는 차에 들어오고 나서야 한숨을 쉬었다.

“후우.”

“왜요?”

“아까 뒤에 수상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혹시나 해서요.”

“역시 그랬어요?”

“알리사도 느끼고 있었어요?”

“아니요. 시혁이 뭔가 이상해서 그랬죠.”

“음.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착각이면 다행이죠. 일단 출발해요.”

“그래요. 한 30분 둘러가다가 다시 돌아오죠. 그때쯤이면 경기가 다 끝나 있을 테니까.”

“오케이! 출발!”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몰았다.

그리고 살며시 주위를 훑어보았다.

‘없네…. 역시 착각인가?’

이렇게 하면 따라 나올 줄 알았다.

피곤해서 신경이 예민해진 걸까?

그런 쎄-한 느낌을 받으며 우리는 30분간 열심히 드라이브했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

“배고파!”

“하나도!”

“시하도!”

치즈케이크가 원수였다.

적은 양이 배에 들어가서 오히려 배고프다고 난리였다.

나는 애들을 진정시켰다.

“벨 선수만 잠깐 만나고 밥 먹자. 알았지? 그때까지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두기! 바로 가게!”

아이들이 뭐 먹을지 상담하기 시작했다.

“나는 돈가스! 먹고 싶어. 돈가스 먹으러 가자.”

“하나는 스파게티!”

“아아! 형아!”

승준이 고개를 저었다.

“형아는 먹는 게 아니잖아.”

“아아. 형아랑 가타!”

“응?”

“형아. 형아.”

“뭐 좋아. 그럼 가위바위보로 해서 정하자. 알겠지? 세 번 이기면 거기로 가는 거야.”

멀리서 보면 심도 있는 토론을 하는 줄 알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스티브 백을 보았다.

“여기로 들어가면 벨 선수가 있을 거예요.”

“그, 그렇습니까?”

“긴장하셨어요?”

“크흠. 아닙니다. 조금 떨리네요.”

무슨 아이돌을 보는 것처럼 긴장한 스티브 백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

문을 두드리자 벨 선수가 나왔다.

“시혁이 형. 오랜만!”

“어, 으응. 들어가도 되지?”

“어서 들어와.”

말 놓기로 했는데 아직 어색했다.

스티브 백이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벨 선수랑 형, 동생 하는 사이일 줄 몰랐다는 표정.

사실 이렇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친한 건 아니다.

그냥 벨 선수가 날 좋게 보는 거지.

벨 선수가 말했다.

“시하야. 안녕! 전에 나랑 한 번 봤지?”

“아? 시하 바빠.”

“응? 뭐 하느라 바빠?”

“아아. 형아바이보.”

나는 시하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가위바위보겠지. 지금 어떤 저녁 먹을지에 대해 애들이 대결 중이야. 이기는 사람이 먹고 싶은 곳으로 가는 거고.”

“와. 진짜? 형. 나도 같이 저녁 먹어도 돼?”

“안 되는데?”

“내가 쏠게!”

“그럼 되지.”

“너무 속물적인 거 아니야?”

집 사려면 돈 아껴야지. 암!

연봉 억이 넘는 사람에게 한 번쯤 얻어먹어도 되지 않을까?

“흠흠. 4강 올라간 거 축하해. 멋진 플레이였어.”

“땡큐.”

“아! 여기에 네 팬이 있어. 스티브 백이라고 잘나가는 미국 사업가야. 널 보러 여기까지 왔다네?”

“와, 진짜?! 안녕하세요.”

스티브 백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팬입니다. 사인하고 사진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다른 선수들이 애들에게 기웃거렸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모습이 귀여운지 흐뭇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가위바위보!”

승부의 결과는 승준의 승리였다.

제일 먼저 세 번을 이겼다.

“아싸! 돈가스 먹으러 간다!”

“힝. 하나는 스파게티 먹고 싶은데…….”

“형아…….”

아련하게 형아를 외치는 시하.

형아 살아있다. 안 떠났어.

목소리가 꼭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는 것 같길래…….

“크흠. 시하야. 형아는 돈가스 좋아해.”

“아?”

“많이 좋아해. 돈가스 먹으러 가자.”

“아아!”

시하가 기뻐했다.

벨이 말했다.

“돈가스집이면 스파게티도 같이하는 곳을 알아요! 거기로 가죠!”

“오! 그래? 하나야. 잘됐다. 스파게티도 먹을 수 있대.”

“만세!”

그렇게 가려고 할 때 다른 선수들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했다.

벨이 제지하며 못 가게 말렸다.

치사하게 애들 귀여운 모습을 혼자 본다고 타박했지만, 벨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좀 그랬다.

벨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랑 밥을 같이 먹기 쉽지 않으니까.

“스티브. 어떻게 하실래요?”

“알리사가 괜찮다면 저도 같이 가고 싶네요.”

“알리사 어때요?”

“저도 좋아요.”

그렇게 우리는 돈가스집으로 갔다.

아이들이 만족스럽게 먹어서 참 다행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승준과 하나를 떠나보냈다.

“시하야. 잘 가!”

“시하야. 잘 가! 시혀기 오빠도 잘 가!”

“아아! 바이바이~!”

왠지 모르게 얼굴이 반짝이는 승준 엄마와 헤어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싶어서.

“시하야. 집에 가면 빨리 씻고 자자.”

“아아.”

끼익.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우리를 반기는 사람이 있었다.

백동환.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왠지 옷이 불쌍해 보였다.

팽팽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행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나는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소리가 너무 컸으니까.

“행님 차가 보여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더.”

“그래. 그래. 그런데 정장이 너무 작은 거 아니야?”

“이거 이래 봬도 맞춤 정장 아입니까. 깔삼하게 하나 뽑은 건대예.”

“맞춤인데 왜 이렇게 불편해 보이냐?”

“요즘 근육이 좀 커지다 보니 이렇게 됐숩니다.”

너 직업이 헬스트레이너가 아니라 성우 맞지?

가끔 헷갈린다.

성우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백동환의 어깨는 넓어져만 가는 걸까?

사실 성우 공채에 합격한 게 아니라 어디 헬스장에서 일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음. 새로 맞춰야 하는 거 아니야?”

“살 빼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입을 일이 있어서…….”

“아, 그래?”

살 뺀다고 될 문제는 아닐 거 같은데…….

“백동!”

“도련님. 오늘도 형님이랑 재밌게 놀았습니까?”

“아아.”

“행님. 어서 집으로 가시죠. 밤은 위험합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근데 말투가 왜 이래?”

사투리랑 서울말이랑 어색하게 섞여 있다.

“내일 일이 좀 있어서예. 이해해 주십시오! 서울 깍쟁이들 말투 따라 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더.”

네가 부산 사람 말 따라 하고 있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분명 저번에 조폭 역할로 성우 녹음을 한다고 했었나?

이래저래 노력하는 백동환이었다.

물론 굳이 저렇게 안 해도 조폭 같았지만.

하긴 녹음은 겉모습이 기록되지 않으니까.

“그래. 들어가자. 밥 먹었어?”

“네. 먹었습니더.”

“푸흡. 그래. 들어가자.”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

아루아루 대표의 친구 하동철은 알리사의 자신감의 원천을 찾다가 둘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끼리 놀러 온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파랑몰이 시급한 이때에 놀러 다니지 않을 거니까.

아예 접겠다는 생각이라면 몰라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다가 시혁과 부딪쳤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며 사과하는데 어떠한 직감이 들었다.

‘어라?’

그저 부딪쳤을 뿐인데 시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움직인 것.

마치 자신의 면모를 낱낱이 파헤치는 감각.

그걸 느끼며 시혁이 어쩌면 자신과 동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놈은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놈인지 신경 쓰였다.

오늘 알리사가 만난 남자는 두 명이지만 늙은 쪽은 젊은 쪽의 인맥인 것 같았다.

‘저놈과 관련된 건가?’

일종의 직감이었다.

좀 더 조사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선글라스를 샀다.

아까 자신을 봤으니 또 어슬렁거리면 들킬 거라 생각했으니까.

잠시 경기를 보다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카페에 들렸다.

책을 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그런데 이런 우연이 있나.

알리사 일행이 온 것이다.

하동철은 지금이 좋은 기회라는 걸 느꼈다.

책을 살며시 넘기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멀지 않아서 이야기 소리가 다 들렸다.

-응. 햇볕이 눈을 뜨겁게 하는 거 맞지. 그래서 선글라스를 쓰는 거야. 시하 똑똑하네.

저 말을 들었을 때는 식은땀이 흘렸다.

하지만 태연하게 책장을 넘겼다.

그러더니 다시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저놈이 뭔가 해결을 해줬구나!’

뭔가 표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업계관계자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선글라스 속에서 눈웃음을 그렸다.

단서를 잡았다.

저 남자를 파헤치면 뭔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때였다.

‘응?’

시혁의 눈이 책에 머물렀다가 눈을 돌렸다.

하동철은 갑자기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책장을 넘겼었나?’

반사적으로 책장을 넘겼다.

알리사 일행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동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아니야. 들키지 않았을 거야. 흠. 혹시 모르니…. 조금 조심스럽게 행동할 필요가 있어. 너무 가까웠어.’

알리사 일행이 떠나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놔두고 주차장을 바라보았다.

빨간 멜츠 차량.

그걸 기억하고 나서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다시 돌아오겠지.’

예상대로 차량은 돌아왔고 하동철은 차의 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시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시혁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역시.’

뒷번호가 4885인 차로 시혁의 뒤를 밟았다.

빨간 차는 돈가스집에 들르고 집으로 이동했다.

차가 세워지자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길가에 세워두고 차에서 내려 몸을 숨겼다.

살며시 지켜보았다.

‘저놈은 뭐지?’

거대한 거구가 시혁 앞에서 ‘행님 오셨습니까!’라고 큰소리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하동철이 입을 벌렸다.

‘서, 서, 설마?!’

소리가 들린다.

행님. 도련님. 내일 있을 일.

하동철의 눈에는 시혁이 굉장히 심상치 않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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