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2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별한 좌석이 보였다.
막 그렇게 널찍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끼리 오면 딱 좋을 그런 장소.
우리는 의자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승준과 하나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와! 신기하다!”
“시혀기 오빠! 다 보여!”
“그러게.”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무대가 다 보였다.
특별 취급을 받는 느낌도 들고 신기했다.
실제로 선수 관계자들만 올 수 있는 것도 맞긴 했지만.
“자! 다른 사람이 올지 모르니까 자리에 앉자.”
다들 잘도 대답하며 푹신한 의자에 한 줄로 앉았다.
승준이 시하의 손을 끌었다.
“시하야. 내 옆에 앉아!”
“아아!”
그렇게 자리에 앉는데 시하가 나를 보았다.
“형아!”
의자 손잡이를 팡팡 치며 옆에 앉으라는 신호를 주었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부할까.
냉큼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알리사가 옆에 앉았다.
하나가 살며시 내 앞으로 와서 말했다.
“하나는 시혀기 오빠 앞에 안즐래!”
“으응?”
“시혀기 오빠!”
하나가 팔을 벌리자 얼떨결에 잡아서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알리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푸흡. 아니에요. 다리는 괜찮겠어요?”
“뭐. 저리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래요? 푸흡. 시하는 어쩔 수 없지 않은 거 같은데요?”
“네?”
내가 옆을 보자 시하가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충 ‘형아를 뺏겼어…….’라고 얼굴에 적혀있는 건 아닐까?
“형아…. 시하도…….”
“으응? 뭘?”
시하가 손으로 내 다리를 가리켰다.
역시 하나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앉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충격받은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시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오늘 화끈하게 불타는 건 나의 다리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뜨거운 피가 한순간에 통하며 내 다리는 저리는 고통을 겪게 되겠지.
이런 미래는 능히 예측할 수 있지만.
때로는 그렇다고 해도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 시하도 형아 앞에 앉자.”
“아아.”
왼쪽 허벅지에는 하나.
오른쪽 허벅지에는 시하.
그렇게 앉히게 되었다.
“너희 안 불편해? 그냥 의자에 앉자.”
“안 불편해!”
“아아!”
나는 좀 더 애들이 편하게 앉기 위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때 승준이 내 옆자리로 불쑥 이동했다.
“시혀기 형아! 나도!”
“미안하지만 자리가 다 찼어!”
“아니야. 시혀기 형아는 할 수 있어.”
“아니야. 안 될 거야.”
“예전에 삼촌이 말했는데 안 되면 되게 하래~”
“으응?”
삼촌 군대 다녀오셨지?
그 말 군대에서 자주 듣던 소린데…….
설마 애한테서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
“크흠. 그런데… 아! 시작한다!”
때마침 건스 국내대회가 시작되었다.
눈앞에 있는 큰 화면이 무대를 비추고, 선수들을 소개했다.
화려한 이펙트와 싸움.
오늘은 8강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벨 선수가 속한 팀은 4강에 올라갈 수 있을까?
아마 모두 우승까지 예상할 것이다.
‘다들 관심이 돌아가서 다행이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다리를 떨었다.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지?’
나는 살며시 두 아이를 안았다.
***
경기는 화려했다.
다른 사람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왜 이렇게 재밌을까?
응원하는 재미, 전략이 보이면 예측하는 재미, 때로는 반전이 일어나며 상상도 못 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재미.
뭔가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그 재미를 게임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래서 이걸 ‘e스포츠’라고 말하나 보다.
이 뜨거운 여름에 에어컨이 선선히 켜져 있는 것을 즐기며 경기를 본다.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말이다.
그러한 열정이 있어서 이렇게 직관을 오겠지.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열정까지는 있지 않은가 보다.
“아! 잘 봤다. 이제 가자!”
“하나도 이제 다른 거 하고 시퍼!”
“아아!”
다른 팀들의 경기가 남아있었지만, 그것까지 볼 필요는 없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와 시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악!”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지 못하겠다.
“잠깐만 더 있다가 갈까?”
“왜?”
“형아가 지금 중요한 생각이 났거든. 아! 그래. 지금 이 방에서 숨바꼭질 같은 게임을 하는 거야.”
“아?”
아이들이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시하에게 다리 저린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괜히 걱정할까 봐 그렇다.
이걸 들켰다가 시하가 내 위에 앉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싫어.’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은 다리가 풀릴 때까지 잠깐의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설명할게. 이건 여기서 숨는 게 아니야. 봐봐. 숨을 곳은 없지?”
“응. 없어.”
“아니야. 하나는 의자 미테 숨어.”
“아아.”
다들 재밌는 반응이다.
알리사도 내 말에 집중해서 듣는다.
아까까지는 별로 재미없는 표정이었다.
하긴 이런 걸 재미없어할 수도 있지.
애초에 알리사가 여기 온 것은 스티브 백과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으니.
“그래서요? 어떤 게임을 할 건데요? 빨리 설명해 줄래요?”
“알리사도 할 거예요?”
“저만 빠질 수 없죠.”
그러면서 알리사가 내 다리를 쿡 하고 찔렀다.
나는 움찔하면서 신음을 참았다.
이 여자, 다 알고 이러는 게 틀림없다.
옆에서 내 반응에 쿡쿡 웃음을 흘렸다.
“큽. 좋아요. 그럼 설명할게. 자! 10초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거야. 그 뒤에 내가 눈을 감으면 뭔가 바꾸는 거지. 그게 옷이 될 수도 있고 이상한 행동일 수도 있어. 그걸 내가 맞추는 거야. 알았지?”
다들 설명이 어려운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시범 삼아 해 보기로 했다.
사실 이 게임은 그냥 내 다리 저린 것을 풀리기 위한 거라 딱히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자! 그럼 모두 10초간 정지! 일, 이, 삼…십! 그럼 내가 눈을 감을게.”
내가 눈을 감자 애들과 알리사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으면 얘기해줘.”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다 됐다!”
나는 눈을 떴다.
다들 아까와 똑같이 서 있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명씩 지켜보았다.
먼저 알리사.
“알리사. 손에 턱을 괴고 있네요. 간단하네요.”
“맞아요. 저는 쉬운 거로 했어요.”
그다음은 승준.
팔과 다리는 변한 게 없었다.
천천히 올려다보며 얼굴을 보자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푸흡.”
코를 인위적으로 벌렁대며 다른 행동을 주장하고 있었다.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여간 사진 찍을 때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완전 장난꾸러기였다.
왜 자신의 얼굴을 망치는지 모르겠지만.
유쾌하고 재밌었다.
“승준이는 콧구멍!”
“정답!”
“그럼 시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뭐지? 아니. 아니야. 분명 달라진 게 있을 거다.
이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얕지 않다.
이게 그럴 정도의 일인지 싶겠지만 나에게는 무척 중요했다.
“그래. 시하는…….”
눈도 귀엽고, 코도 귀엽고, 입도 귀엽다.
볼록 작게 튀어나온 뱃살도.
알사탕을 두 개 문 볼도.
짧은 팔다리도.
모든 게 귀여웠다.
‘이게 아니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나는 살며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깨가 달라!”
“아냐…….”
시무룩.
시하가 대번에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야? 그럼 달라진 게 없나?”
“아냐.”
“응? 아니야?”
“아아.”
시하가 오른손을 들었다.
손을 여러 번 뒤집으면서 반짝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요기. 형아.”
“으응.”
“다시 요기!”
이번에는 왼손으로 반짝반짝 포즈를 취했다.
대체 저게 뭔데?
시하의 손의 포즈는 그대로인 걸 기억하고 있다.
이 정도로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틀렸나 보다.
아마 손이 0.1mm라도 움직였겠지.
“그랬구나. 손이 달라진 거였어! 맞지?”
“아아!”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나 보다.
역시 이시하.
그렇게 눈에 안 띄는 움직임으로 형을 속이다니.
천재임이 틀림없다.
옆에 있던 알리사가 의문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안 바뀐 게 정답 아니야?”
승준 역시도 뭐가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내 눈으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야. 분명 바뀌었어.”
“그래요? 왜 난 모르겠지…….”
모르는 게 정상이다.
이건 슈퍼 형아만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니까.
아무래도 형으로서 좀 더 단련해야겠다.
“아아! 리사. 반짝반짝. 요기. 요기.”
“으응? 그, 그랬구나…….”
알리사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도 그렇다고 받아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이제 하나만 찾으면 되겠다.”
“응!”
“하나는 애교머리를 귀 뒤로 넘겼네.”
나는 살며시 하나의 옆머리를 살짝 뺐다.
그러자 하나가 뺨을 비벼왔다.
“헤헤. 마자.”
옆에 있던 알리사가 놀랍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살며시 목소리를 낮춰서 대답했다.
“게임 시작할 때 옆머리를 슬쩍슬쩍 넘기더라고요. 아마도 신경 쓰여서 무의식적으로 한 거겠죠.”
“아하.”
이건 식은 죽 먹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리도 괜찮으니 나가도 될 것 같았다.
승준이 말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
“승준아. 이제 가는 거 아니야?”
“아닌데? 이건 시험 삼아 한 거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구나…….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이 놀이가 끝날 때까지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
놀이가 끝났지만 건스 경기는 계속됐다.
하지만 애들이 지겨워해서 그냥 밖으로 나왔다.
자리를 마련해준 벨 선수에게는 미안했지만 이해해 줄 것이다.
“알리사는 계속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좀 쉬려고요. 카페 갈 생각이죠?”
“그렇죠. 아무래도 벨 선수를 소개해 줘야 하니까.”
“그럼 같이 가요. 막 단 게 먹고 싶어요. 치즈케이크라도 먹어야겠네요.”
치즈케이크라는 말에 애들의 눈이 빛났다.
“치즈케이크!”
“하나도! 하나도!”
“아아! 시하도!”
아무래도 오늘은 치즈케이크 당첨이었다.
“시하야. 뭘 알고 먹고 싶다는 거야?”
“아아.”
“좋아.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하나로 나눠 먹자.”
“아아.”
이거 먹고 저녁을 먹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조금 더 있으면 경기가 끝날 것이다.
옆에 있던 알리사가 충격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한 개로 나눠 먹을 수 있어요.”
“밥 먹어야 하니까요.”
“이거 먹고 또 밥 먹으면 되죠.”
“네?”
“네?”
잊어먹고 있었다.
알리사의 위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흠흠.”
“일단 카페에 들어가죠.”
“그래요.”
알리사가 아이처럼 통통 튀는 걸음으로 카페로 갔다.
아이들이 신나서 알리사 뒤를 쫓았다.
경기장 내부에 카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괜히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우리는 커피와 치즈케이크를 샀다.
“자. 시하야. 아!”
“아!”
오물오물.
시하가 맛있게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머그컵을 쥐고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가 피곤함을 가시게 했다.
오늘 낮잠을 자긴 했지만, 눈이 또 감겼다.
“음.”
내가 미간을 꾸욱꾸욱 누르고 있자 알리사가 물었다.
“피곤해요?”
나는 슬쩍 시하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요.”
“피곤하면서…….”
“전 형아라서 안 피곤합니다.”
“형아가 무슨 슈퍼맨이에요?”
“필요하다면 슈퍼맨도 돼야죠. 그치 시하야?”
“아?”
아. 시하는 슈퍼맨을 모르지.
“형아. 잠아?”
“아니. 잠 안 와. 자, 시하야. 형아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아?”
“이렇게 머그컵을 돌려서 왼손으로 마실 수 있다~”
“아아!”
“그리고 아이구 뜨거워.”
“뜨거?”
“응. 하지만 형아의 손은 엄청 뜨거워서 양손으로 잡아도 아무렇지 않아요.”
나는 슥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쌌다.
뜨끈한 기운이 손을 감쌌다.
살짝 뜨거운 거 같아서 3초 있다가 손을 뗐다.
“자, 형아 손을 잡아봐. 따뜻하지?”
“아아. 뜨거.”
시하가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얼마나 뜨거운지 궁금한 모양.
“살짝만 만져볼래?”
“아아.”
시하의 손을 잡고 살짝 만졌다가 손을 떼게 했다.
정말 빠른 속도라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뜨거…….”
“아하하. 뜨겁지?”
“아아.”
“자. 이렇게 뜨거운 열을 받아서 눈에 대면 피로가 풀린대?”
“피로?”
“잠을 더 참을 수 있대.”
나는 살며시 시하의 눈에 손을 대었다.
뜨끈함을 느끼는지 시하가 눈을 댄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손도 같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신기하지?”
“아아.”
승준과 하나가 말했다.
“나도! 나도!”
“하나도! 하나도!”
다들 머그컵에 손을 댔다가 자기 눈에 붙였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알리사가 말했다.
“저게 신기해요?”
“알리사. 눈에서 손이나 떼고 말하시죠.”
“푸흡.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따라 했네요.”
그때 시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형아.”
“응?”
“저어기. 눈 뜨거~”
“어?”
시하가 가리킨 곳에 마스크를 하고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보였다.
들어가기 전에 부딪혔던 그 사람인 것 같았다.
‘뭐지?’
나는 살며시 경계심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