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500)

119화

알리사가 자연스럽게 폰을 떨어뜨렸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건 없었다.

하지만 통화상 건너편에서는 그걸 알 수 없으니.

“앗. 폰을 떨어뜨렸네요. 죄송해요.”

주우면서 스피커 모드로 바꾼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괜찮습니다. 저도 가끔 떨어뜨리는데요. 액정은 괜찮습니까?」

“아. 기스가 조금 났네요.”

「저런.」

“뭐 그래도 못 볼 정도는 아니에요. 다들 이렇게 기스나도 멀쩡하게 잘 사용하잖아요. 내용물은 끄떡도 없다는 듯이.”

「그렇죠.」

뭔가 대화가 오묘하다.

네가 아무리 우리를 기스낸다고 하더라도 끄떡없이 잘 돌아갈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고도의 언어 마술일까?

설마 그런 거까지 계산하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려고 떨어뜨렸을 테니까.

아니지. 진짜 이런 말을 하려고 떨어뜨린 건가?

그렇다면 좀 무서운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리기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물어봤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구나…….”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아니요. 전혀. 도와준다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있나요.”

「하하.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임마. 너 알리사 표정 봤으면 저런 말 못 할 거야.

당연히 기분 나쁘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알리사의 표정은 겨울의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그런데 목소리만은 상냥해서 그게 더 무서울 지경.

옆에 있던 혜나가 오한을 느끼는지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로고를 디자인했던 남자는 눈치를 못 챘는지 그 모습을 보고 에어컨 온도를 올렸고.

그거. 아니야. 그거 때문에 팔짱 끼는 거 아니라고.

“그런데 도와주신다고요?”

「네. 제가 이런 일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처리하며 넘기는지에서부터 더 나아가 잘 팔 수 있는 것까지.」

알리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와! 정말요?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하하. 네. 이게 같은 업계 선배로서 남 일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 방법이 어떤 건가요?”

「법률 쪽 자문부터 업계에 살아남는 방법까지. 너무 많아서 전화로 하기 좀 어렵겠네요. 이렇게 된 거 같이 식사라도 하시면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아…. 식사요?”

「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뱉었다.

옆에 있던 혜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그렇지 않나?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인데?

진짜 이걸 위해서 그랬단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편하게 식사할 여건이 안 돼서요.”

「아! 그런가요. 그럼 카페에서라도 만날까요?」

“요즘 스트레스성 위염이 와서 뭔가 들어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아…. 그럼 저희 사무실에서 만나실래요? 거기라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 깨끗합니다.」

“아…. 제가 새집 증후군이 있어서…….”

나는 듣다가 웃음이 터져 나갈 뻔했다.

이걸 새집 증후군으로 피한다고?

「네? 새집 증후군이요?」

“네…. 정말 죄송해요. 아! 지금 급한 전화가 걸려왔는데…. 죄송해요. 끊어야 할 것 같아요.”

「네? 아니. 이것보다 급한 전화가 어딨다고…….」

“사실 도움을 주기로 했던 분의 전화거든요.”

「아니. 누가…….」

“지인이에요. 꽤 잘생긴.”

알리사가 그러면서 내 얼굴을 본다.

다들 알리사의 시선을 따라 쳐다보니 주목받았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 누가 있나?

「크흠. 그, 그러시군요.」

“네. 시간 되면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네…. 그럼.」

통화가 종료되자 우리는 드디어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영어 듣기 평가하는 것보다 더 집중해서 들은 것 같다.

숨도 제대로 못 쉬었네.

먼저 입을 뗀 건 혜나였다.

“미친 새ㄲ…. 어우. 완전 또라이잖아? 안 그래?”

동감이었다.

먼저 상황을 만들어놓고 도움을 주겠다고 전화를 걸다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정말 어떤 의미로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것도 이제 끝이겠지만.”

“끝내야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요.”

“그렇죠. 아직 악플들 삭제는 안 했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아루 대표는 자신이 한 짓에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이 시작의 결과를 알고 덤비는 거다.

드디어 같은 선상에서 때려잡기 위해.

***

-아루아루 사장실.

통화를 종료한 아루아루 대표 변덕규가 폰을 책상 위로 던졌다.

눈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꼈다.

“어떤 새끼가 도와주고 있는 거야?”

“왜 잘 안 돼?”

변덕규의 친구가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후르륵 마셨다.

그는 변덕규가 잘 안 되는 모습이 신기한지 피식 웃고 있었다.

그게 신경을 건드렸다.

“야. 넌 여기 커피 마시러 오냐?”

“왜 그래. 친구가 가끔 올 수도 있지. 네가 통화한 사람이 걔지? 전에 말했던 애.”

“하아. 이게 아닌데. 이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전에 인별 사진 봤는데 괜찮던데? 그 정도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다는 사람 있을 거 아니냐. 너 같은 놈도 있는데.”

“뭐?!”

변덕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대로 뭔가 해 보기 전에 엉클어지는 느낌.

제일 싫어하는 거다.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순서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부터 났다.

친구는 그런 심정을 알고 살살 긁는 중이었다.

아슬아슬한 선을 밟으며.

“그렇잖아. 아니야? 그 정도 외모가 도와 달라고 하면 너나 나나 다 도와줄 거 같은데.”

“흐음. 그래도 해결하기 쉽지 않겠지. 뭐 해 봤자 후기들 싹 지우는 정도.”

“그거라도 어디야. 이제 시작한 데인데.”

“그게 오래가면 걔들 멘탈과 돈이 감당될까? 한 달에 빠져나가는 돈만 해도 여기저기인데.”

“뭐 크게 일 안 벌이면 초기 자금은 적지 않아?”

변덕규가 코웃음을 쳤다.

잘 알지도 못하는 친구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이상하게 서로를 상처 입히는 말을 하면서 잘 어울리는 그들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 이상한 관계였지만 자기들로서는 정상이었다.

마치 이러는 게 당연한 룰인 것처럼.

그 일정한 룰은 넘는 순간 크게 싸울 거지만 서로는 그 선을 잘 지키고 있었다.

“그냥 쇼핑몰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걔들은 자기 디자인의 옷을 만들거든. 단가가 세지.”

“그러면 좀 힘들겠다?”

“그러니까. 한 달만 안 팔려도 멘탈 나가는 게 사람인데. 그게 두세 달 이어진다? 못 버텨. 장사 접고 딴 일 알아보지.”

“그건 그렇겠다. 시간 손해. 돈 낭비.”

“그러니까 나에게 덥석 기댈 텐데 무슨 깡이 있어서 버티는지 모르겠다니까.”

“미친.”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항상 친하게 지내면서 의문인 게 저런 또라이가 어떻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변덕규가 중얼거렸다.

“뭔가 있어. 뭔지 모르겠지만 안심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단 말이지.”

“어떻게 아는데?”

“급했으면 나 만나 줬겠지. 그런 이상한 소리 안 하고.”

“뭐라 했는데?”

“들었잖아. 새집 증후군.”

“큭큭. 그건 들어도 들어도 웃기네! 제대로 까인 거잖아.”

“야 이! 다 들어놓고 일부러 말하게 해?!”

“야! 요즘 방송도 다시 보기 하는 판에 재밌는 건 다시 들어야지.”

“어휴. 내가 저걸 친구라고.”

변덕규는 더는 말 섞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숙이며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 있는 건 필요할 때마다 쓰는 흰 봉투 여러 개였다.

현금 거래가 꼭 필요할 때가 있다.

계좌는 증거가 남기 때문에 이런 현금은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저번 후기를 조장하는 사람에게도 이 현금 봉투를 전달했다.

“야. 누가 도와주고 있는지 알아 봐줄 수 있냐?”

“내가 그런 일 하는 놈인데. 뭐. 누구 만나는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그래?”

“어. 너무 깊숙한 일은 안되고.”

“뭐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아니고. 대충 만나는 놈 프로필 좀 가져와 주라.”

“사람 찾는 놈인데 그 정도는 완벽하게 하지. 후!”

그가 흰 봉투에 든 돈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작아.”

“선금 인마.”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조사 좀 해 보고 가져다줄게.”

“이틀.”

“에헤이. 3일은 줘야지.”

“그래. 3일.”

“빠르면 이틀이면 되고.”

“부탁한다.”

“난 딱 돈 받은 만큼 일하는 놈이거든.”

친구가 일어나며 사장실을 나갔다.

변덕규가 팔짱을 끼며 자리에 앉았다.

어떤 놈인지 늘 했던 대로 처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정도 돈을 쓸 줄 아는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했으니까.

***

시하를 데리고 가는 길.

오늘 있었던 일을 시하가 쫑알쫑알 이야기했다.

“형아. 컵. 따닥!”

“응. 컵이 그렇게 됐어?”

“아아. 재히. 따닥.”

“응. 재휘가 그랬구나?”

“샘. 따딱. 범인.”

“다희쌤이 범인이었다고?”

“아아.”

사실 다 알아들은 건 아니었지만 보충 설명은 알림장에 적혀 있을 것이다.

은근히 상세하게 적어주시기 때문에 감사했다.

“아. 맞다. 시하야. 형이 오늘 하루가 참 다이내믹했거든.”

“다이나?”

“엄청 신기한 일이 많았다는 거지.”

“왜?”

“그러게 왤까? 사람들이 참 다양한 것 같아. 재휘도 시하랑 다르고. 승준과 하나도 시하랑 다르고.”

“아아.”

“그런데 다른 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틀린 게 아닌 거지.”

“달라? 4딸라?”

“응?”

갑자기 알리사와 밤에 시하랑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아이의 의식의 흐름이란 정말 예측할 수 없다.

“맞아. 4딸라도 한국 돈이랑 다르지. 그래서 신기한가 봐.”

“아아.”

시하는 이해했을까?

어떤 국가를 만나든 다름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틀림’이 아니라 그저 ‘다름’.

그걸 모른다면 그 나라의 문화, 풍습을 이해할 수 없다.

나라가 아니라 같은 국민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나는 다름을 인정해야 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비관하는 게 아니다.

같은 성공에 도달하더라고 그 과정과 고뇌는 다른 법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앞으로 나가자.

우리는 언제나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게 답임을 알게 되겠지.

“시하야. 형아는 네가 좋은 시하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 형아 조아.”

“뭐? 하하하. 그래. 형아도 시하가 너무 좋아~”

“아아! 형아!”

네가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게 답이라고 믿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거기에 걸리는 부가적인 모든 장애물을 치워줄 수 없다고 하여도.

나는 큰 돌부리라도 치워주고 싶다.

알리사처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형으로서 그건 막아 주고 싶었다.

큰 힘이 작은 힘을 눌러도 버틸 수 있게.

더 큰 힘으로 만들 수 있게.

나는 형으로서 지지해 주고 싶다.

“다 잘하지 않아도 돼.”

“아?”

“형이 도와줄게.”

“아아. 시하도! 형아 도아!”

“하하. 그래.”

네가 실패해도 괜찮은 배경이 되어주고 싶다.

이건 나만 생각하는 욕심이 아닐 것이다.

사실 오늘 그걸 느꼈다.

세상 풍파에 자그마한 휴식처라도 될 수 있는 건 굉장히 쉽지 않을 거라고.

그 휴식처를 만든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고 또 대단하다는 생각을 오늘에서야 절실히 느낀 하루였다.

아버지.

저는 잘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시하를 잘 지킬 수 있을까요?

시하의 앞에 더 멋진 미래가 걸어갈 수 있게 지지해줄 수 있을까요?

그래. 여기에 답은 없다.

하지만 시하를 보면 알 수 있다.

“형아. 조아!”

“형아도 시하가 너무 좋아!”

이렇게 날 좋아하는 시하가 잘 가고 있음을.

“형아!”

“응.”

“내일!”

“응? 내일?”

“승준! 하나! 시하 집!”

“으응??”

“시하 집. 와.”

“어어? 또 초대했어?”

“아아.”

날 좋아한다면 친구들은 한 달에 한 번 초대로 봐주면 안 되겠니?

설마 아까 ‘조아’가 비즈니스적인 ‘조아’는 아니겠지?

아버지. 저는 갑자기 잘 모르게 됐어요.

정말로 잘 가고 있는 거겠죠?

“형아. 반짝!”

“응. 반짝거리네.”

시하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반짝반짝을 외쳤다.

내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반짝이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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