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스티브 백이 되물었다.
“미래산업 말입니까?”
“네.”
“들어는 봤는데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요.”
“현대에 와서 판매 방식이 많이 바뀌었죠. 소품종 소량 생산, 소품종 대량 생산, 다품종 대량 생산.”
“그렇죠.”
“그리고 이번 이다스 쪽에서 다품종 소량 생산을 위한 시범 공장을 생산했던 걸 알 겁니다.”
스티브 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스 기업은 스포츠와 신발 쪽 의류로 유명한 기업이다.
현재 시범 운영을 위해 공장을 돌리고 있는데 그게 주목받고 있었다.
“음. 공장 자동화 시스템을 하자는 겁니까? 저희도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자고요?”
“아니요. 전 이게 아직 잘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가방에서 자료를 꺼내 건넸다.
“이다스 기업의 사례를 보시면 굉장히 꿈같지 않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걸 선택해 신발을 만들어 주문하면 공장에서 딱 찍어서 집까지 배달해 주다니.”
“전 꽤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전 거기서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 그래요?”
“네. 이 별로인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고요.”
“그것참 궁금하게 하네요.”
나는 싱긋 웃으며 머그잔 윗부분을 매만졌다.
“제가 막 장점으로 포장한 이 사업을 듣고 젤 먼저 떠오른 게 뭔 줄 아십니까?”
“그게 뭡니까.”
“귀찮다. 딱 이 감정이었습니다.”
“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매번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고 그걸 조합하고 신발을 사야 합니다. 한 번의 수고는 참아줄 수 있지만…. 글쎄요. 매력적이지는 않네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네요.”
“네. 지금에 와서 굉장히 시스템이 소비자에게 편리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특히 더 그런 면이 있죠.”
“택배를 보니 그런 면에서 굉장하죠.”
스티브 백도 인정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중요한 법이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죠. 한국에서가 아니라 미국에서 통할 만한 사업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
드디어 본론을 마련하는 내 입술을 스티브 백이 침을 삼키며 집중했다.
막상 들어보니 그럴싸하기만 한 아이디어라서 실망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별거 아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 별거 아닌 것에서 돈을 벌게 되는 점이 신기한 것이다.
“전 이 편리성에서 답을 찾았죠.”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어? 설마 옷을 정기구독시키자는 말입니까?”
“네. 구독자의 취향을 설문으로 조사해서 최신 트렌드인 옷들을 보내는 겁니다. 노리는 시장은 성인도 되겠지만 아동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아동복이라…….”
“아이는 크면서 굉장히 많은 옷을 못 입게 되죠. 성장도 빨라서 옷을 자주 사줘야 합니다. 성인과 다르게.”
“그렇죠. 일반인들이 그렇죠.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좀 다르겠지만.”
“하지만 취향에 맞는 옷들을 우리가 ‘정해서’ 가져다준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흠…….”
스티브 백이 계산을 하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나는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몰아쳤다.
중요한 건 성인이 아니라 아동복에 초점을 맞추는 거니까.
“제가 외교관에게 조사한 자료도 하나 있습니다. 미국 아동복 시장이 현재 300억 달러로 전년 대비 5%가 증가했습니다.”
“아동복이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정보를 조합해 재정립했다.
결정을 더 가속시키고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키는 데 필요한 건 하나.
정확한 수치였다.
“현재 인구수는 작아지지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부모 연령층이 커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경제력이네요.”
역시 척하면 척이었다.
의류 사업을 하는 사람답게 계산이 빨랐다.
“그러면 어떻게 될지도 알겠네요. 더더욱 가속화되고 어려지지는 않겠죠.”
“그렇죠. 그만큼 돈이 있으니 아동복에 대한 구매율도 높아지…. 설마 증가한 이유가 이겁니까?”
“아시면서 물어보시네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적다고 해서 판매율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단순한 계산이다.
실제로는 판매율이 오르고 있다.
그 이유는 결혼 연령이 올라감에 따라 안정한 벌이를 하는 부모 때문.
그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벌이가 안정적이라는 말은 부모가 일로 바쁘다는 뜻.
아이들 옷 사주는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거다.
그걸 해결하기 위한 편의성이다.
실제로 미국 같은 큰 시장이라면 이 사업을 해도 별문제가 없기도 했다.
아마 지금 스티브 백의 위치와 힘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사업이었다.
“어떻습니까? 이제 유통 쪽으로 잡아야 더 올라갈 구멍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저 잘난 브랜드들이 시장 점유율을 꽉 잡고 있다면 새로운 길로 뚫어야죠.”
내 말에 스티브 백이 폭소했다.
“하하하!”
한 손으로 배를 쥐고, 한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나는 이게 스티브 백의 만족의 표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한 방 먹었다는 듯이 계약서를 흔들었다.
“시혁 씨.”
“네.”
“대단하시네요. 한 방 먹었습니다. 이러면 유통 비율로 볼 때 파랑몰이 한탕 가져가겠네요.”
“초창기 멤버라면 이 정도 챙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탁자에 올려져 있는 폰을 잡고 녹음기를 껐다.
이제 모든 게 끝이 났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서전을 쓰면 되겠죠?”
“하하. 지금 자서전이 문제겠습니까.”
“그럼요. 이게 제 일인데요.”
“그럼 저도 좋은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스티브 백을 보았다.
저 눈빛이 어떤 건지 이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이거였다.
“절 고용하려면 안 될 거 같네요. 전 여기 한국이 좋아서요.”
“그거참 아쉽네요. 설마 동생 때문입니까?”
“뭐 그렇죠.”
“하지만 언제까지 동생 뒷바라지만 할 수 없겠죠?”
“네?”
스티브 백이 싱긋 웃으며 자리에 일어섰다.
“오늘 정말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이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제 생각인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이미 거래처와 유통 쪽은 굉장하니까요. 방금 거래처가 하나 더 생기기도 했고.”
“흠…….”
“그리고 제가 거래를 자주 하는 리서치 업체도 있습니다. 만들기만 하면 금방이라는 거죠.”
“스티브 백이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하하. 그렇죠. 반드시 할 겁니다. 굴렸던 자본을 여기에 쓰면 되겠네요. 사실 제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거든요.”
“어떻게 기업을 한 번 더 올릴지에 대한 그런 거요?”
스티브 백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뭔가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걸어봐야죠. 여기서 들을 가치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지에 맞지 않네요.”
“네?”
“저울추가 너무 제 쪽으로 넘어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이건 선 넘은 거죠.”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좋은 선물로 보답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시죠.”
“뭔지 모르겠지만 그 선물 기대할게요.”
다시 한번 맞잡은 두 손은 힘을 들이지 않고 살포시 잡혔다.
***
-어린이집.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가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언제나 오래 이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뽀각.
재휘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있는 컵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어어?”
이게 이렇게 손쉽게 부러질 게 아닌데?
재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재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았다.
예쁜 머그잔이 있길래 만졌는데 부러질 줄 몰랐다.
살며시 머그잔을 쿠션 뒤로 숨겼다.
선생님이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으로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재휘야!”
“으응? 종수야.”
“뭐 해?”
“아무것도 아니야.”
재휘는 혹시나 선생님이 혼낼까 봐 너무 무서웠다.
괜히 조마조마하며 심장이 떨렸다.
잘못한 걸 알고 있어서 재휘의 양심은 쿡쿡 찔리고 있었다.
종수가 그런 재휘를 이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같이 놀자. 애들이랑 오늘 틀린 그림 찾기를 할 거거든.”
“응.”
재휘가 종수를 따라 애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힐끗.
머그잔이 부서진 곳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
재휘가 그걸 모른 척했다.
그렇게 애들이랑 놀고 있을 때 시하가 숨겨진 머그잔을 발견했다.
“아?”
현재 시하는 승준과 하나와 함께 보물찾기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각자 보물을 숨겨서 찾는 게임.
하지만 시하가 발견한 건 손잡이가 부서진 머그잔이었다.
“샘! 샘!”
시하가 선생님을 불렀다.
쌤이라는 표현을 이번에 형아를 보고 배웠다.
다희쌤, 다희쌤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응? 시하야. 왜?”
“샘! 샘! 이거.”
“어? 이거 왜 이래? 왜 부서져 있어?”
“부서?”
“응. 손잡이가 부서져 있네? 내가 분명 붙여둔 거 같은데…. 혹시 시하가 건드렸니?”
“아냐.”
“그래? 정말?”
“아아.”
“흠. 그럼 누가 그랬지? 분명 여기 둔 적이 없었는데.”
“아?”
선생님이 애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분명 건드리지 말라고 한 머그잔이 건드려져 있었다.
모두에게 주의를 시켰지만, 안 들은 애들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모두 멈춰요! 여기 이 머그잔 손잡이가 부러져 있고, 숨겨놨어요!”
재휘가 살며시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승준과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하고 주위의 애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머그잔이 여기 제자리에 안 있네요. 자! 범인은 이 자리에 있어요! 착한 어린이는 어서 솔직하게 말하세요! 그럼 혼내지 않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말에도 아이들이 모르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이렇게 범인을 못 찾게 되어서.”
그때 종수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종수야. 왜 그러니?”
“범인은 먼저 발견한 사람이에요. 저 만화에서 봤어요!”
“그래?”
아무래도 종수가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초의 목격자를 의심하는 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이걸 먼저 발견한 건 시하였어.”
“시하. 아냐.”
“응.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왜냐면 만화에서 목격자가 범인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
원장이 그런 유다희 선생님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근거가 겨우 만화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다희 선생님은 자신의 상황에 취해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어린이집에 최적화된 프로 선생님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누가 그랬을까?”
선생님의 가늘게 뜬 눈에 재휘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포착한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이 누군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가 보는 상황에 재휘가 그랬다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를 하며 주의를 시키고 끝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아아!”
시하가 손을 척 하고 들었다.
“응? 시하야 왜?”
“시하. 아라.”
“뭐, 뭘?”
“시하. 이거. 아라.”
설마 시하가 범인을 눈치챈 것일까?
선생님이 걱정된 표정으로 귀를 가까이 댔다.
“그럼 선생님에게만 살짝 알려줄래?”
“아아.”
“누가 그랬어?”
시하가 선생님에게 귓속말했다.
“재히.”
“어? 어떻게 알았어?”
“이케. 이케. 아라.”
시하가 손으로 여러 번 뒤집었다.
마치 반짝반짝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주위를 한 번 돌더니 재휘를 슥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원을 빙글빙글.
시하가 재휘의 주위에 원을 그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무슨 행동인지 몰라서 시하의 손을 따라서 고개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고는 시하가 배를 쭈욱 내밀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이케.”
선생님은 저 행동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다.
시혁이었다면 알아들었을까?
“음. 그렇구나.”
일단 아는 척을 했다.
“아아.”
“그렇구나. 그랬어.”
“아아.”
선생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이렇게 되면 시하에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시하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밝힐 수도 없었다.
재휘가 상처받고 애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몰랐으니까.
그때 시하가 선생님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아직 안 끝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