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스티브 백이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 선수와 찍은 영상은 잘 봤습니다. 재밌던데요. 신기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른 분들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지 궁금했는데.”
“하하. 댓글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댓글이라 모르는 부분이 많죠. 이렇게 저희가 만나서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죠. 모르니 더더욱 만나야죠.”
나는 펜을 꺼내서 앞에 있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대략적인 내용 파악은 끝났다.
계약서에 주겠다는 돈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거래는 이 사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맞아요. 그러니 이렇게 쇼핑몰을 크게 키웠을 게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도 궁금한 게 있네요.”
“뭐든 물어보세요.”
스티브 백이 어깨를 으쓱하며 살짝 손짓했다.
여유로운 얼굴과 흥미가 공존하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게 호의가 있다는 것.
그 말은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첫 단추가 중요한 것처럼 시작은 일 얘기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폰에 녹음 어플을 켜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서전을 어떻게 쓰면 좋겠습니까?”
“그건 쓰는 사람이 정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말할게요. 위기, 그리고 극복.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이겨내겠다. 한마디로 그 사람에 대한 우상화를 목적으로 쓸지 말하는 겁니다.”
“좋네요.”
스티브 백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가 거짓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스티브 백에게서 평범한 사람과 조금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이런 자서전은 마음에 안 드시나요?”
“하하. 그래요. 저는 그렇네요.”
“그럼 어떤 걸 원하시나요?”
“전 제 저열한 감정까지 드러내길 원합니다. 시혁 씨가 말한 우상화. 전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위대한 사람의 발자취. 그런 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걸 원하시는 건가요? 남들과 다른?”
“아니요. 전 평범한 걸 원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나. 그걸요. 그리고 지금은 어느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보다 이 자리가 훨씬 유익할 것 같았다.
그래. 이번 자서전 집필에 들어가면서 그 사람의 민낯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가면으로 가리는 것이든.
아니면 숨기면서 자신을 띄워 주길 바라는 것이든.
홍진수 과장이 커피 두 잔을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그럼 저는 이만 빠지겠습니다. 두 사람 다 좋은 시간 되시죠.”
“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홍 과장님.”
홍진수가 나가자 두 잔의 커피만이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뜨거운 머그잔에 담겨 있어서 차가 식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마 식는 동안 우리는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 볼까요? 이 자리에 어떤 저열한 감정을 가지고 올라왔는지에 대해서.”
“하하. 왠지 스스로 악담을 집필하는 것 같네요.”
“아니요. 전 인간적이고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 저런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구나. 그걸 가지고도 위로 올라왔구나. 생각이 변했구나. 얼마나 드라마틱해요.”
내 앞에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다.
아니, 평범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머그잔 안의 인스턴트 커피가 우리에게 평범한 것처럼.
사실 판매량과 매출을 보면 절대 평범한 게 아님에도.
스티브 백이 살며시 머그잔을 들어 입을 갖다 댔다.
“드라마틱하죠. 처음 미국에서 쇼핑몰에 취업했을 때는 인종차별로 꽤 힘들었죠. 늘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렇죠.”
어디 회사에서나 차별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인종이라는 프레임으로 덮이는 순간 손쉽게 적이 되어버리는 점.
사람은 거기를 이용하는 걸지도 모른다.
“저도 그렇게 좋은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헤헤 웃으며 굽신거렸죠. 속으로 대단히 욕을 하면서.”
“힘들었겠네요.”
“별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전 자신 있었거든요. 자존심 없다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훗날에 제가 그들을 누를 자신이요.”
굉장히 호전적인 사람.
진취적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지금 그대로 누르셨네요.”
“네. 맞습니다. 전 거기서 사람들의 비겁함을 너무 많이 봐 왔죠. 저조차도.”
“비겁함이요?”
“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두 무리가 싸움이 났죠. 기득권에 누르는 걸 참다가 총질을 시작했습니다.”
“진짜 총이요?”
“비유입니다. 하하! 미국이라서 다들 진짜 총 쏠 거라 생각은 말아 주시죠.”
난 또 진짜 총 쏘는 줄 알았네.
미국이라서 그런가?
스티브 백이 이어서 말했다.
“막 사람들이 시원하다면서 응원을 하는데 얼마나 비겁해 보였는지 아십니까?”
“왜요?”
“나중에 잘못되니 등을 싹 돌리며 욕하더군요. 멍청하다면서. 그때 알았습니다. 나도 똑같은 놈이구나. 그게 접니다.”
“와…. 이런 걸 쓰라고요?”
“하하. 물론 이런 생각만 가졌다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겠어요. 전 비겁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선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한 건가요?”
“아니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저 올라가기 위해 다른 것을 취했을 뿐이죠. 전 비겁합니다. 거래처와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그대로 나와 창업을 했죠.”
“음.”
“회사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만 거래처의 꽉 묶인 끈이 하나 사라졌을 뿐이죠. 허망한 신기루처럼요.”
“그게 피해준 거 아닌가요?”
“당장 눈에 보이는 피해는 없었죠. 나중에 서서히 느슨해지고 끊어졌지만. 결국은 제가 이긴 거죠.”
“와…….”
그래. 이 사람은 길게 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성공할지. 이 경쟁에서 이길지.
자신의 명확한 선과 모순된 감정인 비겁함을 가지고 성공의 가도를 달렸다.
그가 지닌 성공을 정정당당함으로 포장할 수 있겠지만 그는 그걸 거부했다.
“이런 걸 다른 사람이 봐도 회사에 피해는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거든요. 화제가 되면 더 좋죠. 화제는 또 돈이니까. 이것도 저의 비겁함일지도 모르죠.”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알리사도 마찬가지 전략이지 않은가?
그게 좋은 화제든 나쁜 화제든.
어떻게든 알릴 목적으로 시작된 이용이었다.
나는 머그잔에 손을 댔다.
뜨거웠던 머그잔이 따뜻하게 변했다.
온도가 내려간 이유가 시간이 흐른 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가 가진 비겁함이라는 차가운 기운이 머그잔을 식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선이라는 무언의 규칙이 남아 있어서 이 커피는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성공하셨으니 목적이나 목표가 뭔가요?”
“남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거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그리 크게 성공한 거라 생각이 안 드네요. 저보다 잘난 사람 앞에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해서.”
“비교하면 끝도 없지 않습니까.”
“제가 비교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비교합니다. 그래서 가끔 의문이 들죠. 이건 내 생각인가?”
“그래서 결론은요?”
“환경이 그렇다 보니 결국 내 생각이 되었죠.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망과 열정이 아직 불타고 있음을 거기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게 어디 쉽나요.”
“하하. 그렇죠. 제가 벨 선수를 좋아하는 건 대리만족이 큽니다. 한국에서도, 세계에서도 1위 팀을 거머쥐고 있죠.”
여기서 한 번 분위기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웰 선수에게 졌을 때 분했겠네요?”
“좀 그런 감이 없잖아 있죠.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누가 져도 이상하지 않을 역량이었어요. 실력은 비슷했죠.”
“운의 영역?”
“운도 무시할 수 없죠. 그날 웰 선수가 이상하게 컨디션이 더 좋았을 뿐입니다. 이거 좋은 통역사 때문이 아닙니까?”
스티브 백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드디어 대략적인 이야기가 끝이 나고, 스티브 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한 가지.
딱 한 가지만 확인해 보자.
이 커피의 뒷맛이 씁쓸하지 않기 위해.
“의류 종사자면 꼭 한 번씩 경험하는 게 있죠. 표절 말입니다.”
그 말에 스티브 백은 고민도 없이 반응했다.
“그건 제 선뿐만 아니라 다른 종사자들의 선도 훨씬 넘는 도둑 행위입니다. 아이디어 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나는 커피를 테이블에 놓았다.
평범하디 평범한 액체인 물은 신기한 점이 있다.
이렇게 미지근한 물이 언제든지 뜨거워질 수 있으니까.
‘그럼 어디…….’
스티브 백의 마음을 팔팔 끓어오르게 해 볼까?
“대충 들어보니 아직도 미국에서 무시당하는 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직 열이 많은 것 같아서요. 열정도 계시고. 그럼 혹시 회사가 한 발 더 올라갈 아이디어가 있다면 저랑 계약 한 번 더 나누시겠습니까?”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볼펜을 들었다.
아까 쓰고 놔둔 그 볼펜을 말이다.
“무슨 말이죠?”
“아직 잉크가 마르기에는 한참 남은 것 같아서요.”
“하하. 좋은 사업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물론 있죠.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실지가 문제지만요.”
“재밌네요. 그럼 한번 들어나 볼까요?”
“아니요. 제가 아직 그 선이 정말로 믿어도 될지 몰라서 말이죠. 일단 사주시죠.”
“오! 이런 제안은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여유로운 척을 하나 스티브 백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물들였다.
설마 이런 제안이 나올 줄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스티브 백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제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그래요. 일단 들어봅시다.”
“먼저 전 프리랜서입니다. 근데 한 미꾸라지가 제 친구 쇼핑몰을 엉망으로 만들더군요. 이제 시작인데 말이죠.”
“그건 좀 이상하네요.”
“그렇죠? 리뷰로 아예 분탕을 쳤습니다. 이건 비겁함을 넘어서 선을 넘은 거죠.”
스티브 백이 내 이야기에 흥미가 가는 허리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어느새 꼬았던 다리도 풀어져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친구분이 만든 쇼핑몰은 지금 이제 막 시작된 거죠? 젊은 나이에?”
“네. 아직 대학생이죠. 청년 창업이라고 할까요? 요새 스타트업을 많이 합니다.”
“멋지네요. 그런데…. 이거 참. 아직 경쟁을 시작도 안 했는데 그걸 꺾어버리다니. 같은 업계 선배로서 참 화가 나는데요?”
“하하.”
“제가 호감과 호기심이 가는 사람에게 이런 피해를 주다니.”
“전 고용된 입장이라 피해는 없어요. 앞으로 이득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제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요.”
역시 사업가라 그런가? 눈치가 귀신같다.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콕 집어서 눈앞에 들이민다.
하지만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다.
이건 도움이 아니다.
“아니요.”
“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반문이 튀어나왔다.
이해가 안 가면서도 나를 아주 재밌게 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이 대체 무슨 말을 할까?
딱 이런 심정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도움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말씀드렸잖아요. 한 발 더 올라갈 방법이 있다고. 그걸 사라고.”
“보아하니 거래처 연결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그거야 도와 드릴 테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에이. 제가 설마 그것만 바라겠습니까?”
“그럼 뭘요?”
“제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친구가 만든 파랑몰도 한 발 걸치게 해주세요.”
스티브 백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이 사업이 무조건 된다고 보시는군요.”
“물론이죠. 그렇지 않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거래를 할까요? 여기 계약서도 만들어왔습니다. 읽어 보시고 사인해 주시죠.”
“하하. 참 재밌습니다.”
“나쁘지 않은 거래일 겁니다. 동등하게 이야기하시죠.”
“만약 제가 안 하면요?”
나에게는 두 가지 카드가 있었다.
하나는 스티브 백이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방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좋은 제안을 할 수 있는 거다.
나머지 하나는…….
“그럼 벨 선수와의 1대1 팬 미팅은 없어지는 거죠. 아쉽네요. 이번에 같이 피씨방에서 게임하기로 했는데.”
“벨 선수와 피씨방에서요?”
“네.”
“커험.”
스티브 백이 내 손에 있는 펜을 건네받더니 계약서를 훑어보고 사인을 했다.
스티브 백에게 불리한 조건은 적혀 있지 않았다.
“절대 벨 선수와의 만남을 기대해서 그런 거 아닙니다.”
나는 저게 거짓말인 걸 안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벨 선수 경기 보러 미국에서 날라오지 않았을 거니까.
스티브 백은 나에게 찐팬인 걸 들켰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설마 그런 이유로 사인하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니 이제 말해 주세요. 대체 그 아이디어가 뭡니까?”
나는 그 말에 씨익 웃었다.
“혹시 미래산업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