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시혁이의 육아일기]
-시혁 7살.
오늘 시혁이에게 옷을 사줬다.
성장기라서 그런지 매년 쑥쑥 크고 있다.
작아서 못 입는 옷들이 매년 쌓인다는 말이다.
집에서 옷 정리를 하는데 착한 아들은 내 옆에서 같이 행동한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자기가 입었던 옷이니 자기가 한단다.
나는 그게 좀 슬펐다.
내 마음은 그냥 시혁이가 이런 일을 신경 쓰지 말고 잘 놀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척척 알아서 다 하려고 한다.
그렇게 조금 먹먹한 심정으로 함께 옷을 정리하다 보니 시혁이 물었다.
“아빠. 아빠 낡은 옷은 정리 안 해?”
정리할 옷이 없다고 하자 시혁이 내 옷장을 살폈다.
아빠 옷이 왜 이렇게 적냐는 말에,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많이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들은 마음이 불편한 눈치였다.
원래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의 옷은 사줘도 부모의 옷은 잘 사지 않는 법이다.
내가 새 걸 덜 입더라도 좋은 옷을 자식에게 사주고 싶은 심경.
그런 심경을 시혁은 모르겠지.
“아빠. 옷 사자.”
그래서 시혁이 이런 말도 하는 거다.
더 감동인 것은 자기가 모은 돼지 저금통을 가져오더니 그걸로 아빠 옷을 사주겠다고 한다.
너무 기특해서 괜찮다고 하니 고집을 꺾지 않는다.
누굴 닮아 이렇게 고집이 셀까?
내 어릴 적과 똑 닮았다.
지금은… 고집이 꺾였다.
아들을 위해 고개도 숙이고 싫은 소리 못 내는 아버지가 되었다.
웬만하면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사람과 부딪칠 때마다 서러운 순간이 있는데 시혁의 돼지 저금통은 그 순간을 모두 보상받게 만들었다.
기특하고 또 기특한 우리 아들.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어서 결국 옷을 사러 나갔다.
언제 저금통에 이리 많은 돈을 모은 건지 아래위로 옷 한 벌 값은 되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준 용돈을 다 돼지저금통에 넣은 것 같았다.
그게 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코가 시큰해졌다.
아들아. 아빠가 많이 부족하지만 좀 더 잘할게.
이 옷 소중하게 입을게.
+추가) 7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시혁이 어릴 때 사준 옷을 입는다.
이제 헤질 대로 헤져서 잠옷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혁이 그걸 보고 옷 좀 버리라고 하길래 나도 버럭 화를 냈다.
어딜! 아직 10년은 더 입을 수 있어!
아들이 못 말린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요즘 머리가 컸다고 저러는 게 틀림없다.
아빠가 쪽팔려? 라고 물었는데 그 옷 입은 아빠는 쪽팔린단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옷은 찢어져도 버릴 수 없다.
아들이 자기 과자 먹을 돈 꼬박 모아 사준 건데 어떻게 버리겠나.
아직도 이 옷만 보면 추억을 회상하게 되는데.
내 손자에게까지 물려줄 거다!
물론 이 말은 못 했다.
요즘 사춘기라서…….
조금만 건드리면 시한폭탄이다.
***
나는 벨 선수의 스트리밍 TV에 나가기로 했다.
그걸 위해 옷장을 열어 보았다.
재작년의 산 옷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예전 아버지의 심정을 왠지 알 것 같았다.
올해는 시하의 옷을 사는 것만 생각했지 내 옷을 살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저 있는 옷을 입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올해는 옷 좀 사볼까?
이런 생각을 했겠지만…….
‘아끼고 아껴서 집 사야지. 아니면 시하 장난감이나 옷을 사고. 나도 참.’
아버지가 자신의 옷을 잘 사지 않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아버지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는 기분.
비록 시하가 동생이기는 하지만 나이 차이가 상당히 나니 아들 있는 기분이었다.
“형아!”
“응?”
“모해?”
“형아가 내일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 중이었어. 시하도 같이 고민해 줄래?”
“아아.”
시하가 손을 가위 모양으로 만들고 턱에 댔다.
전에 승준이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
저렇게 하면 좋은 생각이 나나?
나도 옆에서 시하를 따라 했다.
“음.”
“음.”
둘이서 뭐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 시간이 너무나 재밌었다.
시하랑 있으면 언제나 새롭고 재밌는 것 같다.
“형아!”
“그래. 다 골랐어?”
“아아.”
시하가 두 번째 서랍을 열더니 자기 옷을 꺼냈다.
“이거!”
“이거는 시하의 펭귄 옷이잖아?”
“아아.”
“설마 이거 입으라고?”
끄덕끄덕.
시하가 내 손에 꼬옥 쥐여 주었다.
여름이라서 이걸 입으면 덥다. 그것보다도 이건 내 몸에 안 들어간다.
“이건 작아서 형아 몸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아?”
시하가 옷과 내 몸을 번갈아 보더니 그대로 펭귄 옷을 뺏어 서랍에 쏙 넣었다.
나는 그런 시하를 귀엽게 보며 옷을 정리해서 다시 넣었다.
“너무 딱딱하게 입으면 좀 그런 거 같은데. 그렇다고 너무 집에서 온 패션은 좀 그렇고…….”
나는 대충 흰 티와 무난한 검은색 상의와 반바지를 골랐다.
상의는 약간 오버핏으로 맞춰 입고 밑단에 고무줄이 있는 부분을 조였다.
살며시 밑단을 둥글게 말고 흰 티가 드러나게 했다.
살짝 풍성해 보이면서도 무난하게 맞춰 입은 것 같다.
이 정도면 여름 패션으로 적당하다.
집에 있는 샌들을 신으면 완성.
물론 방송에 나갈 곳은 상의뿐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시하야. 어때?”
나는 한 바퀴 돌아서 시하를 보았다.
“아아. 머시써!”
“정말? 멋있어?”
“아아.”
나는 몇 번이나 확인하며 물었다.
시하는 귀찮음 없이 똑같이 대답해 주었다.
“그럼 시하도 내일 멋진 옷으로 어린이집 갈까?”
“아아. 형아. 가치.”
“응? 형아랑 같은 옷 입고 싶어?”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시하는 나랑 비슷한 옷을 입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밑단에 벤딩 처리된 옷이 없을 텐데…….
이런 디자인 옷을 고른 적이 없었다.
올 블랙 패션을 산 적도 없었고.
“흠…. 형아랑 같은 옷 아니어도 되지?”
“아냐.”
“안 되는구나?”
하지만 대충 엇비슷하면 시하도 만족할 것이다.
“일단 아동복 파는 곳으로 가볼까?”
“아아.”
찾아보면 대충 비슷한 거 있을 것이다.
검은색 반바지와 흰 티는 무조건 있을 거고.
문제는 나와 같은 검은색 상의.
‘흠. 모르겠다.’
일단 만능 해결 옷집으로 가보자.
나는 시하랑 손을 잡고 알리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알바하는 중에 갑자기 찾아와서 당황하지만 않으면 좋을 것 같았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리사가 우리를 반겼다.
“시혁! 시하! Hi~”
“아아. 리사! 하이!”
알리사가 시하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하지만 난 보았다.
알리사가 무료한 표정을 짓고 널브러져 있는 걸.
아무래도 많이 심심한 시간이었나 보다.
그런데 여기 사장은 어떤 사람이길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까?
물론 이 매장에 많은 알바가 필요 없어 보이지만.
“알리사. 월급 루팡 아니에요?”
“월급 루팡?”
“별로 일 안 하고 돈 받는 거요.”
“아니에요! 저 일 많이 해요.”
“정말요? 아까 축 처져 있던데요?”
“진짜예요. 시혁이 제가 쉬고 있을 때 꼭 나타나서 그래요. 왜 있잖아요. 공부 실컷 하고 쉴 때 엄마가 나타나는 거.”
외국에서도 한국과 비슷한 경험을 하나 보다.
아니, 대부분이 걸리는 경험이 아닐까?
물론 나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나타났지만.
알리사가 말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별거는 아니고요. 이런 벤딩 처리 된 아동복 있어요? 검은색으로.”
“아니요. 없는데요.”
“역시 그렇죠? 시하가 저랑 비슷한 옷을 입고 싶다고 해서요.”
“그거라면 비슷한 옷 집어서 수선하면 될 거 같은데요? 저기 벤딩 처리만 해 두면 될 것 같은데…….”
“오! 역시 페디과.”
알리사가 내 말에 살포시 웃었다.
“페디과가 다 이런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누구나 다 생각할 수 있는 건데요. 뭐.”
“그럼 이거랑 비슷한 검은 옷 하나 주세요.”
“잠시만요.”
알리사가 매장에 옷을 하나 집어 오더니 시하의 몸에 댔다.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창고로 들어갔다.
“여기 밴딩으로 수선하면 딱 예쁘게 나올 거예요. 그런데 시혁 씨 오늘 패션 센스 나쁘지 않네요.”
“그래요? 고마워요.”
“아아. 리사. 고마어~”
시하가 손을 척 하고 들었다.
그런 시하의 말에 우리는 빵 터져서 웃었다.
시하는 왜 웃는지 몰라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하여간 귀여운 시하였다.
“알리사가 있어서 살았네요.”
“그럼 저한테 도움 좀 줘요.”
“뭐든 말하세요. 알리사에게 도움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이번에 저도 공장에서 옷 하나 뽑을 생각이거든요.”
“네.”
“그런데 모델을 해줄 사람이 없네!”
“모델이야 많을 거잖아요.”
“그런데 모델을 해줄 사람이 없네!”
“크흠.”
알리사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모델을 해달라는 거겠지.
하긴 내가 에이전트에게 모델이 되자고 제안을 받은 몸이다.
핏이 정말 괜찮다는 거겠지.
인제 보니 알리사도 본격적으로 옷 장사에 뛰어들 모양.
그러면 광고도 중요하고 사이트 운영도 중요하다.
“알리사. 그럼 이제 옷가게 차리는 거예요?”
“인터넷 쇼핑몰을 하나 만들려고요.”
“오!”
“여기저기서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 마음 맞는 친구들하고 같이하기로 했고.”
“아, 그래요?”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거 같다.
“좋아요. 그럼 제가 모델 해줄게요.”
“네? 왜 시혁이 모델을 해요?”
“네?”
알리사가 피식 웃으며 턱짓을 했다.
나는 아래에 있는 시하를 보았다.
“저기 시하 말한 건데요?”
“네? 안 돼요!”
“아, 왜요!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요?”
“시하는 소중하니까? 이상한 댓글 달리면 어떡해요.”
“보통 모델을 평가하는 댓글은 안 달리죠. 주문이 들어오지. 시하가 보지도 못할 건데요? 다 비밀 댓글이라서.”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이상한 리뷰나 댓글은 다 관리하고요.”
“그건 그렇죠.”
괜히 과민반응한 것 같아서 머쓱해졌다.
이제 초창기로 시작할 텐데 얼마나 팔리고 얼굴이 알려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모델을 한 명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동복이면 여자아이 옷이 더 많이 팔리지 않아요?”
“글쎄요. 여자아이 옷이 많이 팔리긴 하겠죠. 디자인도 다양하고요.”
“그렇죠?”
“그런데 전 이상하게 남자아이 옷이 많이 끌리던데요?”
“왜요?”
“다양성이 적으니 이쪽 방면으로는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자신감 하나는 대단했다.
하긴 이런 자신감이라도 없으면 사업을 어떻게 하나.
“그래서 해줄 거예요?”
“그건 시하에게 맡길래요. 시하야. 어때 할래?”
“아?”
시하는 뭔지 모르고 옷 구경을 하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사이트에서 시하가 나와서 모델이 되는 거야. 이렇게 사진도 찍고.”
“차카?”
“응. 찰칵. 그거 맞아. 사진 보고 사람들이 옷 예쁘네 하고 사줄 거야. 시하가 파는 거지.”
“아아.”
시하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아들은 거 맞을까?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자! 모델이 뭐 하는 거랬지?”
“아아. 차카.”
시하가 어디서 배웠는지 두 손으로 가위를 만들고 네모난 모양을 만들었다.
작은 손가락이라서 그런지 사각형이 조그맣다.
시하가 너무 귀엽다.
“그다음은?”
“아?”
시하가 찰칵만 기억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다 못 알아들은 게 맞나 보다.
“그러니까.”
“아냐.”
“응?”
“시하. 아라.”
“안다고?”
“아아.”
“그럼 형아에게 이야기해 줄래?”
시하가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할 때 종소리가 들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알리사가 ‘어서 오세요.’라고 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왔다.
시하가 그 어린아이를 보더니 불쑥 다가갔다.
“시하야. 어디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
다가가는 시하.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
시하가 옆에 걸려 있는 옷을 가리켰다.
“이거. 머시써. 사.”
“응? 어…. 괜찮네?”
옆에 있는 아이의 엄마가 살포시 웃었다.
알리사도 마찬가지다.
시하가 당당하게 어깨를 쭉 펴며 나를 보았다.
“형아. 차카. 시하. 아라.”
응. 시하야. 모델이 옷을 사게 하는 건 맞아.
팔게 하는 것도 맞고.
그런데 그렇게 파는 건 아니야…….
대충 아는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설명이었다.
그래도 시하는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