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그러니까 시하의 그림을 다른 곳에 쓰고 싶어서 계약하고 싶다고요?”
「네. 좀비에 쓰기에는 너무너무 귀여워서. 이번에 새로 만드는 앱 게임에 넣었으면 하거든요.」
“흐음.”
「괜찮으시면 미팅 진행해 보죠. 제가 여기 응모한 곳에 적힌 주소 근처로 찾아가겠습니다.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도 듣고 있을 텐데 어떤 일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시하가 그렸다는 걸 알 텐데. 게임이면 일러 몇 개 더 그려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지. 그걸 고려 못 했을 리는 없고. 캐릭터를 가져오고 싶은 걸까?’
일단 말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만약 시하에게 불이익이 갈 거 같으면 계약을 안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럼 내일이나 모레 보죠. 저도 시간 괜찮습니다.”
「내일 3시에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렇게 약속을 잡고 통화를 종료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백동환이 감탄을 내뱉었다.
“와! 형님. 대박입니다!”
“뭐가?”
“아니. 대상작도 아닌 우수상 작품이 일러 계약이라뇨. 이런 일은 없었잖아요.”
“음. 난 잘 모르겠는데?”
“이건 대단한 거라고요. 돈 벌 수 있으면 좋잖아요. 그런데 앱 게임이라…. 하긴 이런 단순한 캐릭터를 이용하는 거라면 일러가 많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럴까?”
“그럼요. 설마 애기한테 일 시키겠어요? 그림값만 주고 사들일 생각일 텐데.”
“흐음.”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시하의 통장에 돈이 쌓이는 거니 좋기는 할 것 같았다.
그 통장의 돈은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야지.
“시하야. 너 게임 회사랑 계약도 하겠네?”
“아?”
“그러니까 음…. 이런 폰에 있는 게임에 시하가 그린 그림이 나오는 거야.”
“시하 그림?”
“응. 어때? 엄청나지?”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알아들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형아! 이거!”
“으응?”
시하가 젠가를 가리켰다.
계약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은 없고 앞에 있는 게임이 중요한가 보다.
하긴 지금 노는 게 중요하겠지.
“동환아. 네 차례 아니었어?”
“네. 그런데 좀비 인형도 얻고 계약도 하고 좋네요!”
“그러게.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좋은 건 맞네. 시간 낭비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에이. 설마요.”
백동환이 툭툭 젠가를 밀어서 젠가를 뽑았다.
거기에 적혀있는 것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
백동환이 그걸 보고 시무룩해졌다.
“겨우 취직했는데 지금 돌아가면…….”
아무래도 이 젠가는 백동환에게 안 맞는 것 같다.
시하가 그런 백동환에게 토닥토닥해 줬다.
“백동.”
“나 위로해 주는 거야?”
“빨리~ 해~”
“아, 아니었구나.”
토닥토닥이 아니라 빨리빨리 재촉이었나 보다.
역시 게임은 빠르게 진행해야지. 암.
시하는 잘못 없다. 잘못한 건 백동환이다.
우리는 그렇게 젠가를 하고 놀았다.
***
계약 문제로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시하는 잠시 백동환에게 맡겨두려고 했다.
전에 이모티콘 계약을 했을 때 시하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못한 걸 생각하면 나 혼자 나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시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같이 가고 싶다고 두 손을 꼬옥 쥐고 바라보는데 이건 너무 귀여워서 버틸 수 없었다.
하여간 형아 가는 곳은 무조건 따라가려고 한다니까.
어쩔 수 없이 시하를 데리고 카페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정훈이라고 합니다.”
정문에서 반겨주는 직원.
정장 차림에 말끔한 댄디컷을 하고 있었다.
“저는 이시혁입니다. 이쪽은 시하예요. 영상에서 보셨죠?”
“네. 정말 귀엽던데요?”
“하하. 그렇죠?”
“그럼 뭐 좀 시킬까요?”
“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요. 시하는 바나나 주스로.”
이정훈이 주문을 하다가 나를 보았다.
“아기가 먹을 수 있는 디저트로 시킬까요?”
“시하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아.”
시하가 전시된 베이글을 가리켰다.
여기 카페에서 제일 인기 있는 메뉴였다.
역시 보는 눈이 있었다.
베이글 하나까지 시킨 뒤에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음료가 나오기 전에 이정훈이 계약서를 꺼냈다.
“잘 읽어보시고 사인해 주세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고요.”
“어떤 게임에 시하의 캐릭터가 들어가는 거죠? 혹시 시하가 또 그림 그려야 하나요?”
“아니요. 굳이 그리실 필요까지는 없어요. 저희가 그 부분은 내부 원화가에게 맡길 거니까요.”
“그래요?”
“네. 그리고 어떤 게임이냐면 음…. 약간 고전 게임이라고 해야 하나요?”
“고전 게임이요?”
“네. 퍼즐 게임인데 약간 농장같이 직접 꾸미는 것도 추가했죠.”
“뭔가 두 장르 게임이 합쳐진 느낌이네요?”
“바로 그거예요. 처음에는 컨셉에 맞춰서 하나만 나왔다면 지금은 다른 게임 요소를 적용해 더 풍부하게 했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시하의 일러는 그렇게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아닌 것 같았다.
뭔가 도트게 임처럼 딱 캐릭터만 필요한 느낌이라고 할까?
한 번 만들어두면 그대로 갈 것 같았다.
하긴 이번에 그린 시하의 캐릭터만 봐도 어느 때보다 단순화된 그림이었으니까.
“음료가 나왔네요.”
“제가 가지러 갈게요.”
“아니에요. 앉아 있으세요. 계약서도 봐야 하잖아요.”
이정훈이 일어나서 음료를 받아왔다.
시하가 베이글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베이글을 먹는 건 처음이었지?’
나는 살며시 시하의 손에 쥐여주며 바나나 주스의 빨대를 바쳤다.
현재 시하는 상전 모드였다.
손에 다 쥘 수 없으니까.
“자. 마셔.”
“아아.”
쪼옥.
잘도 마시고 베이글을 한입 가득 물었다.
빵빵한 볼이 튀어나올 것 같다.
이정훈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나는 그사이에 계약서를 빠르게 훑었다.
“대충 보니까 공동저작권 형태로 가져오네요?”
“네. 저작권을 살 수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공동저작권 형태로 가져오려고 합니다. 잘되면 굿즈 같은 것도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2차 저작물에 관한 비율도 있네요.”
“네. 그 부분은 업계 표준으로 맞췄습니다.”
보통 외주 같은 경우 두 가지 형태로 그림을 가져간다.
저작권을 포함한 가격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공동저작권으로 가격을 제시하거나.
소설을 계약하는 형태와 유사한 내용이 많아서 계약서를 한눈에 파악하기 쉬웠다.
그리고 이렇게 저작권을 챙겨주는 건 한국의 좋은 점이었다.
일본에서는 회사 귀속으로 하려는 것도 많고, 중국 쪽은 소설에서만 보다시피 저작권 개념이 많이 희박했다.
아마 일러스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은데?’
이 정도면 만족스럽게 계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네요. 100만 원도 많이 쳐주신 거 아니에요? 의외로 간단한 그림인데요?”
“하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주세요. 이번에 앱 게임은 처음으로 들어가는 거라. K사를 통해서 발표할 생각이거든요.”
“아…….”
확실히 거길 통하면 꽤 입성하기 쉬울 것이다.
NM 게임사는 온라인 게임으로 잘 먹고 살고 있긴 하니까.
이정훈이 아메리카노를 쪽 빨아먹고 말했다.
“잘되든 못되든 중국과 일본에도 서버를 만들어보려고요.”
“앱 게임은 보통 흥하든 망하든 1년간은 서비스해야 하잖아요?”
“그렇죠. 계약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럼 망하면 적자 아니에요?”
“그 정도는 투자하면 되는 거니까. 너무 적자면 그냥 1년 안 채우고 서비스 종료하는 경우도 많아요.”
“아…. 망겜을 해 본 적 있죠. 7개월 만에 섭종하던데…….”
“아하하. 7개월이면 어지간하게 사람들이 없는 경운데…….”
말하고 나니 괜히 작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말하면 안 되는 단어였던 거 아니죠?”
“네?”
“그런 거 있잖아요. 업계에서 말하면 안 되는 말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한가한 느낌이다. 말하면 꼭 사람들이 몰려온다던가.”
“하하. 그런 말들이 있죠. 오늘 조용하네 하면 갑자기 새벽에 버그 생겨서 앱에 긴급 점검을 한다던가…….”
“프로그래머들이 고생이네요. 아, 그래서 망겜은 말하면 안 되는 단언가 싶어서.”
“뭐 상관없어요. 하하.”
그때 시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아. 망겜?”
“응?”
“모야?”
“어….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게임이라는 뜻이야.”
“아아. 주스.”
“그래. 여기.”
나는 얼른 빨대를 대령해 주었다.
목을 축였으니 다시 베이글을 입에 물었다.
참 잘 먹는단 말이야.
“아무튼, 조건이 좋네요. 사인할게요.”
나는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필명 쓰는 곳이 있네요?”
“아…. 이거 일러레들 계약할 때 가져오는 거라서…. 저 부분 빼는 걸 깜빡했네요.”
“아니에요. 필명 있어요.”
“네? 있으세요?”
“네. 시하페페라고…. 아실지 모르겠네요. 하하.”
이정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분위기가 이상해서 눈을 굴렸다.
뭐지? 뭔가 이상한데?
혹시 시하페페를 아는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었다.
픽시브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우와! 시하페페!”
“아세요?”
“당연하죠. 저희 게임회사 직원이라면 이모티콘을 다 들고 있을걸요? 선물 받았거든요.”
“네?”
뭔데 게임회사에서 페페티콘을 선물 받지?
“이번에 투자 좀 받았는데 그쪽에서 이모티콘도 함께 선물하더라고요.”
“그, 그래요?”
거참 희한한 투자회사네.
무슨 이모티콘을 선물하는…….
아니, 잠깐만. 잠깐만.
이 제안 어디서 들었던 건데?
아니지. 아니겠지?
“혹시 사모펀드 운영사에?”
“네. 맞아요. 아시네요? 어떻게 아시지?”
“아…. 어디 기사로 본 것도 같고…. 보통 그런 쪽에서 투자받고 그러지 않나요?”
“그렇긴 하죠. 아무튼, 영광입니다. 설마 시하페페 작가님을 보다니.”
“하하…….”
“K사에 이모티콘도 내시고 이번에 K사에 출시할 게임도 작가님과 관련되시고. 하하.”
“하하…….”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이 산 이모티콘은 모두 시하의 통장에 들어갈 겁니다.
“그냥 초보인데요. 뭐.”
“에이. 원래 그렇게 다 시작하는 거죠. 나중에 엄청 빵 터지면 돈을 쓸어모으는 거고요. 이번 게임도 잘되면 또 돈이 들어오는 거고.”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
“응.”
시하는 다른 것에 관심 없고 오직 먹을 것에만 집중했다.
시하야. 너 점심 먹은 지 2시간밖에 안 지났어…….
역시 성장기라서 그런지 잘 먹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카페가 소란스러워졌다.
웅성웅성.
“야. 사장님과 싸우나 본데?”
“저 사람 중국 사람 아니야?”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어설픈 한국어로 한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은…….’
중국인이 사장에게 말했다.
“이건 차별입니다!”
“하아. 뭐가 차별이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저 정말 심들어요.”
“뭐라는 거야. 한국 들어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제대로도 못하고…. 어휴.”
“이건 차별입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거 봐. 아니, 사정이 안 좋아서 자른 거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중국인이 정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이정훈이 말했다.
“말이 안 통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닐 거예요. 가 봐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아는 사람이에요?”
“네. 대학교에서 한국어도 가르쳐준 적이 많아서.”
“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장에게 갔다.
“저기 사장님.”
“응? 당신은 또 뭡니까?”
사장이 나를 보며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 친구가 힘들다를 심들다고 하는 건 한국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 북방 중국어의 영향이 커서 그렇고요.”
북방 중국어는 ‘ㅎ’ 발음이 ‘ㅣ’모음과 만나면 ‘시’로 말하게 된다.
또 이 지식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네.
이제는 익숙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전 당신이 아니라 카페 손님이고요. 아무래도 쳐다보는 눈도 있는데 이쯤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기 아기도 있는데. 그럼 이분은 제가 데려갈게요.”
이제야 사장이 주변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카페에 사람이 별로 없어도 한두 사람은 있었다.
사장이 헛기침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난 잘못 없어. 인원 감축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네. 알겠습니다. 이제 가죠. 이휘.”
이휘가 나를 보았다.
“시혁…. 억울해. 차별이야.”
분명 사장이 인원 감축이라고 하지만 이휘가 차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야 그렇잖아.
잘렸다고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정도 상식 없이 어떻게 다른 나라에 사냐.
그리고 여기 한국에서 공부할 정도면 자국에서 꽤 사는 집안이라는 거다.
나는 웃으며 이휘에게 말했다.
“일단 저랑 이야기해요. 알았죠?”
“응.”
“형아!”
어느새 시하가 나를 따라왔다.
“응? 시하야 언제 여기까지 왔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사장을 봤다.
사장이 헛기침하며 민망해했다.
“아아. 형아. 망겜!”
“으응?”
“사람. 업써. 요기 망겜?”
“어…….”
뒤에서 사장의 헛기침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
“커허험!”
나는 살포시 웃으며 시하의 손을 잡고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