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잡았다!”
우리를 잡으러 다가온 사람은 승준과 하나의 아버지인 오상환이었다.
오상환이 하나의 튜브를 잡으며 말했다.
“하나야. 아빠랑 놀자!”
“꺄아! 괴물이다! 시혀기 오빠 구해줘.”
“흠흠. 아빠가 괴물이야?”
“응. 시혀기 오빠는 왕자야. 하나를 구해.”
오상환이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슬쩍 튜브를 끌었다.
“같이 놀까요?”
나는 승준의 튜브에 달린 줄을 건넸다.
하나의 줄은 줄 수 없었다.
하나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복잡한 심경의 오상환을 보면서 나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그 뒤로 튜브는 질렸는지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오빠! 벌써 끝났어요?”
서수현이 나에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응. 그런데 넌 바다 안 들어가?”
“들어가야죠. 근데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안 보여서요.”
“그래? 난 이제 물총 갖고 놀건대?”
“그럼 저도 같이 놀래요. 준비해 왔거든요. 근데 뭐 할 말 없어요?”
“뭐가?”
“제 수영복 예쁘지 않아요?”
“예쁘네.”
서수현이 눈을 치켜떴다.
“오빠. 너무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시하 수영복 어때? 상어 캐릭터 귀엽지?”
“네. 그렇네요. 시하는 귀여운데 오빠는 안 어울리네요. 상어 캐릭터라니.”
“크흠.”
나도 멋지지 않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시하랑 커플 수영복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그때 알리사가 나를 불렀다.
“시혁! 뭐 해요? 어서 물총에 물 채워요.”
알리사가 엄청나게 큰 물총을 들고 있었다.
얼굴에 놀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았다.
설마 저 물총을 준비할 줄이야.
물 세기 하나는 엄청날 거 같았다.
“알리사. 그거 애들에게 쏘면 안 돼요.”
“알아요. 전 수현에게만 쏠 거니까.”
서수현이 놀라며 기겁했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였다.
“시하야. 그럼 물 채우러 갈까?”
“아아.”
“얘들아. 물 채우러 가자.”
애들을 데리고 물통을 들고 바닷물을 채웠다.
놀이의 재미를 위해 한 명의 악당을 만들기로 했다.
그 역할은 백동환.
거구에 맞는 괴물 역이었다.
“잘 봐. 이 물총으로 바다의 괴물인 백동환을 쏘는 거야.”
“아아. 백똥!”
“나 잘 쏠 수 있는데!”
“하나도. 하나도.”
아이들이 백동환을 괴물로 쉽게 받아들였다.
괴물 역도 빼앗긴 승준 아빠가 시무룩했지만 나는 외면했다.
“지금부터 많이 맞춘 사람에게 선물도 줄 거야. 아주아주 맛있는 걸 줄 거니까 다들 열심히 해.”
그렇게 물총 싸움이 시작됐다.
백동환이 피하고 애들이 따라가며 물총을 쏘았다.
거구에 맞지 않게 굉장히 민첩하게 피했다.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그렇게 노는 애들을 지켜보다가 잠시 파라솔에 앉았다.
파라솔 의자에는 문도환이 의자에 몸을 뉘며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형. 고마워요. 시하가 불렀는데 이렇게 와줘서.”
“괜찮아. 어차피 할 일도 없었어.”
“그래도요. 차라리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다행이다.”
“아. 너도 시하 데리고 저 이벤트 참가해 보지그래?”
“네? 무슨 이벤트요?”
문도환이 폰을 들어서 내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재미난 이벤트가 있었다.
모래로 만드는 캐릭터.
모래사장에 캐릭터를 만들어 사진을 찍고 참가하는 이벤트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캐릭터 만드는 구역이 정해져 있어서 꽤 볼거리도 되었다.
“이런 이벤트는 굉장히 신선하네요.”
“그치? 그리고 이거는 시범으로 만든 건데 어린왕자 캐릭터를 만든 거야.”
“진짜 똑같네요.”
시하가 딱 좋아할 이벤트가 아닐까?
오히려 저렇게 바다에서 노는 것보다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려서 바다에 깊게 들어가거나 튜브를 타고 갈 수 없으니까.
이거면 애들도 참가하고 좋을 것 같았다.
“이 빈 페트병으로 모래를 적시면 되겠네.”
“이건 또 언제 준비했어요?”
“아니, 뭐. 그냥.”
“고마워요.”
나는 살며시 웃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이걸 준비한 모양이었다.
문도환 나름의 배려인 것 같았다.
“아니. 우연히 발견해서 이런 페트병도 준비하면 좋겠다 싶었어. 진짜 오늘 와서 발견한 거야.”
“그래도 고마워요.”
거짓말일 것이다.
아마 미리 준비했겠지.
그야 그렇잖아. 여기 오는 데 가방에 빈 페트병을 꺼냈으니까.
심지어 SNS도 찾아서 말하고.
내가 문도환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형도 참가해 보는 건 어때요?”
“난 안 해. 여기서 너희들 하는 거나 볼래.”
“그럼 쉬세요. 아니면 헌팅을 하시던가.”
“하하. 그건 대학생 때 이미 해 봤지.”
“그래요?”
“그렇지. 7전 8기! 도전한 끝에 안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엄청난 교훈을 얻었어.”
“음…….”
뭐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려 시하를 보았다.
물총으로 노는 게 재밌는지 한참 백동환을 쏘고 있었다.
어느새 알리사와 서수현도 참전해 백동환을 노리고 있었다.
그렇게 보고 있는데 시하랑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물총을 들고 나에게 도도도 달려왔다.
“형아!”
“응? 왜 그래? 가서 같이 놀아야지.”
“형아도 가치!”
“응…….”
방심했다.
시하는 나랑 같이 놀고 싶어 한다는 걸 간과했다.
아무래도 선수 교체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예감은 틀리지 않지…….’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만 한 물총을 들었다.
그래. 오늘 실컷 놀자.
***
게임의 승리는 모두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상품을 모두와 나누기로 했다.
“짜잔!”
나는 애들을 위해 팥빙수를 사 왔다.
애들이 눈을 빛냈다.
승준이 말했다.
“우와! 맛있겠다!”
“하나는 빨리 먹고 시퍼!”
“시하도!”
내가 시하에게 숟가락을 쥐여 주자 곧바로 푹 떠서 입안에 넣었다.
“아! 시하야. 그렇게 많이 떠먹으면…….”
“으~”
시하가 눈을 찡그렸다.
그럴 줄 알았다.
“머리가 찡하니 울리지?”
“아아.”
내가 이마를 꾹꾹 눌러주자 아픈지 고개를 돌린다.
“차가운 거 한 번에 먹으면 그렇게 돼. 조금씩 먹자. 알았지?”
“아아.”
시하가 다시 한번 푹 떠서 팥빙수를 먹었다.
달콤한 빙수가 맛난지 푹푹 잘도 떠서 먹는다.
또 머리가 찡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맛있어?”
“마시써! 형아!”
시하가 내게 팥빙수를 떠서 내밀었다.
나는 넙죽 받아먹었다.
“마시써?”
“응. 시하가 주니까 더 맛있네!”
그렇게 먹는데 주변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흐뭇한 미소로 보고 있었다.
괜히 머쓱해진다.
“크흠. 이거 다 먹고 저기 의자 없는 파라솔만 꽂혀 있는 쪽에 가요. 거기에서 이벤트를 하더라고요. 어때요?”
다들 좋은지 참가하기로 했다.
팥빙수를 다 먹고 우리는 이벤트가 벌어지는 곳으로 갔다.
참가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다들 한 자리를 차지하며 모래로 캐릭터를 만들고 있었다.
아는 캐릭터도 많았다.
펭귄몬스터도 있었고, 커다랗게 성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다 만들어진 작품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여기서 추첨을 통해 상품을 준다고 했지?’
상품은 꽤 상당했다.
바로 백화점 상품권 20만 원치.
이런 간단한 이벤트치고는 엄마들이 불타오를 만한 거 같다.
참가가 많은 이유가 다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애들이랑 재밌게 놀 수도 있고.
일석이조라는 거지.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누가 더 잘 만드는지 시합하자!”
“아아.”
“하나는 아이돌 만들래!”
다들 각자 원하는 걸 만들기 위해 흩어졌다.
팀을 나누면 이렇다.
형제팀 : 이시혁, 이시하.
아이돌팀 : 오하나, 서수현, 알리사.
운동계팀 : 오승준, 백동환.
승준 엄마와 아빠에게는 두 사람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그것도 잠깐의 휴식이겠지만.
“시하야. 이제 할까?”
“아아.”
나는 물을 부어서 모래를 적셨다.
지호랑 놀았던 이후로 오랜만에 모래를 가지고 노는 것 같다.
“뭘 만들까?”
시하가 고민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답을 내놓았다.
“페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번 기회에 시하에게 양각을 보여 주기로 했다.
아마 이런 건 처음이겠지.
사실 나도 잘 모르지만, 얼추 외곽선을 그리고 바깥 부분을 파내면 되지 않을까?
“시하야. 일단 페페를 그려보자.”
“아아.”
시하가 손가락으로 펭귄 캐릭터를 그렸다.
이모티콘에서 보인 간단한 그림이 시하의 손에서 피어났다.
물 먹은 모래 산에 조그마한 손으로 파낸 그림.
모래라서 그런지 디테일을 챙길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그리는 시간이 빨랐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적으니까.
“형아!”
“응. 다 그렸네? 그럼 여기 몸체 바깥 부분을 살살 긁어내자.”
“아아.”
나는 시하와 함께 페페 그림이 튀어나올 수 있게 작업을 했다.
눈은 파여 있는 게 아니라 다시 모래로 덮어서 튀어나오게 했고, 배도 마찬가지로 작업을 거쳤다.
“짜잔! 다 됐다!”
“아아!”
시하가 신기한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았다.
벌떡 일어나더니 페페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지켜보았다.
그림이 아니라 이렇게 만드는 건 처음이겠지.
오늘 시하에게 양각의 느낌을 보여줘서 만족했다.
“형아.”
“응?”
“시하도.”
“으응?”
시하가 다시 모래를 잡고 내가 한 것을 보완했다.
“와…. 대단한데?”
“아아.”
다듬는 수준이었지만 시하의 손에서 어설픈 곳을 덜어내었다.
선은 더 완만하게.
눈은 조금 더 크게.
이제 느낌을 아는지 척척 알아서 잘했다.
“다 댓다!”
“정말이네! 시하는 천재야!”
“아아!”
완성한 작품을 보니 뿌듯했다.
나는 시하를 작품 옆에 앉히고 폰을 위로 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카메라 렌즈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시하야. 고개 들어봐.”
“아아.”
셀카 모드로 사진을 몇 번 찰칵 찍고는 이벤트 참여를 마무리했다.
그때 다른 참가자들이 우리 형제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다.
“와! 저기 봐. 정말 예쁘다.”
“진짜 귀엽다.”
“정말 잘했는데?”
뭔가 시하의 작품을 전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여긴 누구나 만들고 전시되는 거긴 하지만.
‘시하의 첫 전시라고 봐도 되나?’
비공식 전시겠지만 이번 바다에서 특별한 경험이 아닌가 싶었다.
정말 바다에 오기 잘한 것 같다.
“우와! 오빠! 뭐 이렇게 잘했어요?”
“응?”
서수현이 시하와 내 작품을 보며 감탄을 쏟았다.
나는 가슴을 쭉 펴며 자랑을 했다.
“엄청나지? 근데 너희는 어떤 거 했어?”
저기에는 패디과 알리사가 있으니 상당한 솜씨일 것이다.
궁금해서 구경하러 가야겠다.
서수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왜? 이상해?”
“아뇨. 그건 아닌데요. 하하.”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시하야. 하나가 뭐 했는지 보러 가자.”
“잠시만요!”
“응. 안 돼.”
나는 완성된 하나의 작품을 보러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이돌 캐릭터는 없었다.
하나가 나를 봤는지 자신 있게 자랑했다.
“시혀기 오빠! 아이돌이야.”
“응? 아이돌이라고?”
“응!”
“그래. 정말 잘했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아이돌이 아니었다.
분화구처럼 구멍이 파여 있고, 바늘같이 작은 산이 그 안에 삐죽삐죽 솟아나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아이돌은 어디 있어?”
알리사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여기요.”
설마 저 바늘같이 작은 산이 아이돌이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여긴 올림픽경기장이고 거기서 아이돌이 콘서트를 하고 있다고 해요.”
“아…….”
설명을 들으니 왜 이런 모양인지 이해는 갔다.
이게 바로 사물의 단순화라는 거겠지.
근데 너무 단순화한 거 아니야?
일단 무조건 칭찬하자.
“하나야. 정말 잘했어.”
“헤헤.”
하나가 칭찬에 아주 좋아하는 건 알겠다.
그때였다.
어떤 아이가 하나의 작품을 보더니 피식 비웃었다.
“헐! 여기 변기가 있네!”
“아냐! 아이돌이야!”
“변기네. 변기! 저건 똥이야?”
“아냐!”
하나가 울상을 지었다.
이런.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초등학생 1학년쯤 되어 보이는 장난꾸러기 아이가 하나를 놀리며 웃고 있다.
아주 못된 녀석이다.
그런데 애가 한 거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하나를 잘 달래는 수밖에.
그때 시하는 난입한 아이가 만든 작품을 바라보았다.
개구리가 그려져 있었다.
시하가 아이에게 말했다.
“개. 콜록. 구리다!”
아이의 표정이 싹 굳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시하야. ‘개구리다’를 말한 거지?
하필 거기서 기침을 해서 이상한 뜻이 되었잖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저기. 얘야. 오해야.”
“아, 아닌데. 분명 구리다고…….”
“아니야. 아, 맞다. 우리가 한 작품 볼래?”
나는 시하가 한 작품을 보여 주었다.
잘 만들어진 펭귄 그림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응. 봤지?
네 작품 구린 건 맞아.
저 정도 퀄은 나와야 안 구린 거지.
때로는 말보다 아득한 실력이 더 아픈 법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거지. 뭐.
“시하야. 하나야. 뭐 해? 빨리 내 꺼 봐.”
승준이 등장해서 시하와 하나의 손을 잡고 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승준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아이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엄마’를 부르며 떠나갔다.
“시하야. 이것 봐라!”
운동계팀의 작품은 공을 잡고 있는 월드컵 트로피였다.
그것도 눕혀진 게 아니라 세워진 것으로.
“???”
도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