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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93/500)

93화

오랜만에 거구인 백동환이 집에 왔다.

여전히 몸이 아주 좋다.

요즘 한창 바쁜 건지 얼굴을 영 못 봤는데 이렇게라도 봐서 좋았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어, 그래.”

시하도 오랜만에 보는 백동환이 좋은지 손을 척 하고 올렸다.

“아아! 백동!”

“오! 시하야. 요즘 잘나간다면서?”

“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나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되묻는 게 틀림없다.

“뭐가 잘나가?”

“시하티콘 말입니다.”

“페페티콘이겠지.”

“전 시하티콘이 입에 착착 감기던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단어가 들어가서 그렇지.”

“역시 그렇죠?”

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건 좋네. 일은 잘돼 가?”

“요즘 정말 일할 맛 납니다. 진짜 성우의 삶이란 이런 건가 싶어요.”

“편해?”

“아니요. 일이 엄청 많아요. 그래도 재밌습니다. 보통 10시 이후부터 일정이 잡혀 있더라고요.”

“직장인보다 늦게 출근하네?”

“그래도 그 이전에 일어나 있어야 해요. 아침에 목을 풀어주는 시간을 주는 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잠겨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이 저렇게 잡힌 거였구나.

의외로 체계적이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세 번이나 일하죠.”

“와! 진짜 많이 일하네?”

“단타로 끝나는 일도 있어요. 아, 맞다. 저 방송국에서 실제로 만났어요.”

“누굴?”

“형님도 아는 목소리일걸요? 지하철에서 늘 목소리가 나오시니.”

“아! 그것도 성우가 해?”

“네.”

그런 일도 성우가 하는구나.

전혀 몰랐다.

생각을 안 해 봤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때 시하가 열심히 기타를 끌고 왔다.

“아아. 백동!”

“오! 시하야. 그거 뭐야?”

“기타.”

“기타? 시하 기타도 칠 줄 알아?”

나는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요즘 기타에 빠져 있다고.

시하가 기타를 꺼내더니 열심히 손으로 쳤다.

띵. 띵.

백동환이 잘한다고 손뼉을 쳤다.

과장된 리액션은 성우 일을 효과일까?

요즘 자연스럽게 하는 게 트렌드라던데.

아니면 만화적 과장일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 역할은 어느 정도 과장이 필요하니까.

“그런데 어쩐 일로 놀러 왔어?”

“아!”

백동환이 깜빡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크로스백에서 USB를 꺼냈다.

“이번에 제가 좀비 만화의 성우가 되었거든요.”

“좀비 만화?”

“네. 애들이 보는 건데 재밌어요.”

“그거 무서운 거 아니야?”

“에이. 아니에요. 뭐라고 할까? 유쾌한 좀비라고 할까? 뭐 보는 관점에서 무서울 수도 있겠네요.”

세상에 유쾌한 좀비도 다 있었나?

그런 좀비는 본 적이 없다.

찾아보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걸 시하 보여주려고 가지고 온 거야?”

“네. 애들이 진짜 좋아한다니까요. 요즘 이게 여름 대세예요. 어른만 여름에 귀신 영화 즐기는 건 아니잖아요.”

“애들 여름용 시원함이다?”

“그렇죠.”

저렇게 말하니 흥미가 돋기는 한다.

“정말 무서운 거 아니지?”

“형님. 무서운 거 싫어하십니까?”

“아니. 시하가 놀랄까 봐 그러지.”

“아닌 거 같으신데…….”

“크흠. 아니라니까.”

사실 좀비는 좀 꺼려지는 게 있는 것뿐이다.

보통 결말은 베드 엔딩이니까.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이 별로다.

물론 그런 세계관에서 살아남는 것이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냥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럼 일단 봐 볼까?”

“치킨도 시키죠.”

시하가 기타를 만지작거리다가 치킨이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역시 치느님이다.

***

[좀비는 못 말려!]

영상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5살 아기 좀비.

피부색은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하얗다.

핏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엄마 좀비에게 느릿느릿하게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좀비는 느릿느릿하게 걸어야 해. 엄마가 미국에 살 때는 그랬단다.”

“엄마. 엉덩이로 걸으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무섭잖니.”

아기 좀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그러면 이렇게 느리게 걸으면 돼요?”

“맞아! 정말 잘하네!”

어기적어기적 걷는 아기 좀비.

하지만 재미가 없는지 곧장 그만둔다.

“엄마. 빨리 걸으면 안 돼요?”

“엄마도 그걸 가르쳐주고 싶은데 엄마는 빨리 걷는 법을 모른단다.”

“왜요?”

“그렇게 태어나서 말이지.”

느릿느릿 걷는 엄마 좀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부엌으로 간다.

“그럼 엄마는 요리할 테니까 연습하고 있어!”

“네!”

엄마가 떠난 뒤에 아기 좀비는 열심히 혼자 연습을 했다.

그때 아빠 좀비가 왔다.

아빠 좀비가 무지막지하게 빨리 뛰며 들어왔다.

“아니. 아들아. 뭐 하고 있니?”

“느릿느릿 걷기 연습하고 있어요.”

“그래? 그럼 빨리빨리 뛰는 연습도 하렴.”

“네!”

아기 좀비가 빨리 뛰다가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아빠를 보았다.

“아빠. 그런데 왜 아빠는 느리게 걷지 못해요?”

“아빠가 국적이 한국이라서 그래.”

“그럼 저는요?”

“너는 이중국적이라 둘 다 할 수 있단다.”

“그렇구나. 나는 미국 좀비도 되고 한국 좀비도 되니까.”

“요즘 미국 좀비도 빨리 달리긴 하더구나.”

“그래요? 신기하네요.”

아버지가 힘에 부치는지 다리를 멈추고 자리에서 털썩 앉았다.

“아빠. 힘들어요? 다크서클이 엄청나요.”

아기 좀비가 길게 늘어선 아빠의 다크서클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빠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일하고 있어서 그래. 그래서 아빠는 빨리 달린단다.”

“와! 신기하다!”

여기까지 본 시혁에게 백동환이 숨겨진 설정을 말해 주었다.

“아빠가 블랙기업에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빨리빨리가 몸에 배어 있죠. 집도 은행 꺼라 갚아야 해요.”

“뭐야. 그거. 애들 만화에 무슨 그런 무시무시한 설정이 있는 거야?”

“그래서 빨리빨리 달리는 건 어떤 의미로 상징적인 거죠.”

“그럼 엄마가 느린 이유도 있는 거야?”

“엄마는 육아에 지쳐 있어서 행동이 느려졌다는 설정이…….”

“유쾌한 좀비 만화라고 하지 않았어? 설정이 하나도 안 유쾌한데?”

“귀여운 캐릭터가 유쾌하잖아요. 숨겨진 설정이 그렇다는 거고 보면 유쾌해요.”

“어…….”

시혁은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냥 계속 보기로 했다.

시하는 귀여운 아기 좀비에 푹 빠져 있었다.

아빠 좀비는 다크서클이 내려와 우스꽝스러웠고, 엄마 좀비는 느릿느릿해서 재밌었다.

걷는 것과 뛰는 것을 배운 아기 좀비는 밖을 나섰다.

그때 다른 좀비가 나타났다.

“야! 너! 거기서 봐!”

종수를 닮은 좀비가 껄렁껄렁한 모습으로 아기 좀비에게 다가갔다.

아기 좀비가 말했다.

“왜?”

“사탕 줄 테니까 나랑 어디 좀 가자.”

아기 좀비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엄마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어.”

“아니야. 사탕 주는 사람은 따라가도 돼.”

“싫어!”

“쳇! 따라오면 나쁜 좀비로 만들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역시 나쁜 좀비였다.

나쁜 좀비가 아기 좀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아기 좀비가 아빠에게 배운 달리기로 도망쳤다.

“소용없어. 난 빨리 달리기 배웠으니까!”

“거기서!”

하지만 나쁜 좀비도 빨랐다.

곧 아기 좀비를 따라잡을 것 같았다.

아기 좀비가 엄마에게 배운 느릿느릿 걸음으로 전환했다.

갑자기 속도가 변하자 나쁜 좀비가 아기 좀비에게 걸려 넘어졌다.

아기 좀비가 이때다 싶어 주머니 속에 약물을 꺼냈다.

“이젠 넌 착해지는 거야.”

“아, 안 돼.”

아기 좀비가 해독제를 뿌리자 나쁜 좀비가 착하게 변했다.

“착해졌어?”

“어. 고마워. 엄마 말 안 듣고 사탕 준다는 아저씨 따라갔다가 나쁜 좀비가 되었는데 네 덕분에 살았어.”

“이제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알았지?”

“응!”

그렇게 교훈을 하나 남기며 영상이 끝이 났다.

시혁이 백동환을 보았다.

“뭔가 황당하기도 하고 교훈적이기도 하네?”

“그렇죠?”

“그런데 아빠 좀비가 네 목소리지?”

“오! 알아들으시네요?”

“딱 너던데 뭐. 그런데 내용은 괜찮네. 세계관이 독특하긴 하지만. 저기 좀비밖에 없는 거지?”

“네. 모든 사람이 좀비예요.”

“모두 좀비가 된 이후의 세계라니.”

그때였다.

뒤에 광고가 나왔다.

[원작 게임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좀비는 못 말려! 이벤트!]

[본 게임 이벤트에 참가하셔서 영상으로 인증하시면 심사를 통해 상품을 드립니다.]

[아이들이 나만의 좀비 그림을 그려 보아요!]

[당선된 대상은 실제 게임 스킨으로 제작됩니다.]

[장려상 : 좀비 인형(100명), 우수상 : 문화상품권(10명), 대상 : 500만 원(1명)]

그 뒤로 재밌는 여러 아기 좀비 캐릭터가 움직이는 장면들이 나왔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시혁이 눈을 끔뻑 뜨며 그 광고를 바라보았다.

백동환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시하야. 시하만의 좀비 그리고 싶지?”

“아아! 점비!”

“좀비를 그리면 저 좀비 인형도 준대!”

“아아!”

시혁이 황당해하며 백동환을 보았다.

“이거 설마? 이래서 보자고 한 거야?”

“형님. 저 원작 게임 팬입니다. 어떻게든 저 인형 가지고 싶습니다.”

“상품 받으면 시하가 가질 건데?”

“시하가 언제까지 좀비 인형을 가지고 노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사겠습니다.”

“정말 찐팬이구나?”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혁이 백동환의 노력을 봐서 참가하기로 했다.

어차피 시하가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 참가를 안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려상 받을 수 있겠어?”

“시하면 충분하죠. 초등학생들 실력도 대단하지만, 시하면 비벼볼 만합니다.”

시하는 그런 대화를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다.

느릿느릿.

몸을 느리게 움직이면서 좀비 흉내를 냈다.

“형아~”

“응. 좀비 흉내 내는 거야?”

“아아.”

“이야. 진짜 똑같네.”

“아아.”

시하는 느리게 움직이다 재빨리 움직였다.

도도도.

달리다가 형아를 쳐다보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형아!”

“응?”

“시하. 아기 좀비.”

“아! 좀비 놀이하자고?”

“아아.”

시혁이 일어나서 좀비 흉내를 내주었다.

시하는 즐겁게 형아랑 같이 놀았다.

실컷 논 뒤에 태블릿을 꺼냈다.

“시하야. 이제 그림 그릴 거야?”

“아아.”

백동환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더니 폰을 꺼냈다.

“자, 형님! 어서 시하랑 같이!”

“어휴. 이게 뭐 하는지 모르겠네.”

시하가 펜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

얼굴, 눈, 코, 입, 머리카락 순으로 차근차근 그렸다.

“시하야. 지금 좀비 그려?”

“아냐.”

“응? 좀비 아니야?”

“점비. 이거 하고.”

“이거 하고 그릴 거야?”

“아아.”

“그런데 이거 뭐 그리고 있는 거야?”

“형아.”

“응?”

“형아!”

시하는 형아를 그렸다.

저번에 서수현의 그림과 다르게 몸도 그리고 있었다.

전신 SD 캐릭터를 거침없이 펜으로 그려나갔다.

“형아. 형아.”

“와! 형아 그려주는 거야?”

“아아.”

시혁이 감동한 표정으로 시하를 보았다.

백동환이 뒤에서 멍하니 말했다.

“좀비는?”

“시하가 다음에 그린다잖아.”

“그러네요…….”

두 사람의 마음을 각자 다르게 들어다 놨다 하는 시하였다.

***

-시하를 어린이집으로 데리고 가는 길.

시하의 좀비 그림은 조금 뒤에 그려질 것 같다.

내 그림이 우선으로 그려지고 있었으니까.

운전하는 데 기분이 좋다.

핸들을 쥐고 있는 손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고개를 까딱까딱하게 된다.

아무래도 서수현의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공들여서 내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으니까.

색칠에 힘을 준다고 할까?

완성되면 곧바로 프로필 사진에 등록할 생각이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프로필 사진이 바뀌지 않겠지.

“형아.”

“응?”

살며시 시하를 쳐다보니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창밖을 쳐다보고 나를 부른 것 같다.

“형아! 점비! 점비!”

“좀비?”

“아아.”

나는 대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옆을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었다.

국문과 선배님 중에 한 사람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계신 분.

퀭한 얼굴로 느릿느릿 걷고 계셨다.

눈 밑은 검은색으로 짙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 죽어 있었다.

‘시하야. 그 사람 좀비 아니야…….’

나는 마음속으로 고생하시는 선배님에게 사과를 보내며 어린이집으로 차를 몰았다.

시하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들어가자 선생님이 먼저 반겨 주었다.

그런데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심히 고민스러운 표정이었다.

“저기 시혁 씨.”

“네. 선생님.”

“여기 시하에게 택배가 왔는데요…….”

“네?”

시하에게 택배가 올 게 있나?

그리고 와도 왜 어린이집에 보낸 거지?

“발신인이 익명이에요.”

“익명이라고요? 그럴 수 없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택배 상자를 받았다.

그 안을 열어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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