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결국은 무대 앞에 서게 됐다.
시하가 원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절하기에는 시하가 너무 귀여웠다.
괜히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좀 그렇고 말이야.
‘그런데 시하가 들고 있는 블루투스 마이크는 어디서 나온 거야?’
어느새 시하가 블루투스 마이크를 나에게 흔들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걸 자랑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형아. 이거. 노래 쿠와! 해.”
“우와! 정말 대단하네!”
“아아.”
노래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는 모른척해 줬다.
이렇게 반응해 줘야 시하가 좋아하는 걸 아니까.
‘그게 문제가 아닌데.’
무대 앞에 서니 괜히 떨렸다.
아이들이야 키가 작아서 뒤에서 잘 안 보인다고 해도 나는 또렷이 보일 것이다.
차라리 여러 사람에게 통역을 하는 게 낫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건 참 부끄러웠다.
앞에 있는 알리사가 웃으며 카메라로 우리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무대에 있는 서수현이 말했다.
“그럼 애들이 잘 아는 노래를 불러볼까요? 다들 한 번은 들어본 노래일 거예요. 숫자송!”
좌앙. 좌앙.
기타 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졌다.
애들도 잘 아는 노래인지 고개를 까딱거렸다.
준비된 마이크를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시하만 블루투스 마이크라 튀기도 했고.
‘이거 많이 부끄러운데?’
막상 노래가 나오니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랐다.
차라리 발표나 그런 거였으면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노래라도 발라드나 팝송이었으면 덜 부끄러웠을지도.
그런데 동요라니.
사람들 앞에서 동요를 부르고 있다니.
과연 이걸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노래를 불렀다.
“일!”
“일어나서 놀올고오~”
듣는 손님들은 신이 나는지 함께 운을 띄워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아래의 시하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시하나 실컷 보면서 부르자.
시하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딱.
부끄러움이 탁 하고 풀린다.
방실방실 웃으며 시하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래. 시하가 즐거우면 이런 쪽팔림마저 견딜 수 있다.
저 웃음을 보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나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합창은 엉망이네.’
서로 맞춰보지 않은 합은 엉망이었지만 그래서 듣기 좋았다.
아니, 보기 좋았다.
애들이 힘차게 부르는 노래가 카페에 울려 퍼진다.
나도 저렇게 고래고래 부를 때가 있었지.
어린 목소리로 신나게 음정 박자도 틀리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다.
‘즐겁다’는 감정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그 상황을 즐기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라서 즐겁다.
노래가 흥겨워서 즐겁다.
그거면 충분하다.
잘 부를 필요가 없다. 즐기려고 부르는 노래인데 잘 부를 필요가 있을까?
저기 사람들도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런 경험도 재밌네.’
시하 덕분에 이런 음악의 즐거움도 알게 되는 것 같다.
시하는 나를 보고.
나는 시하를 보고.
서로가 함께 있는 이 자리가 멜로디가 넓게 퍼지듯이 공간이 확장된다.
“언제나 이 맘 변치 않을게~”
서로가 보고 있는 세상이 두 배로 커지는 것이다.
만약에 시하가 없었다면 볼 수 없는 풍경.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시하의 손을 잡았다.
“재밌었어?”
“아아.”
“형아도 재밌었어. 이제 들어가자.”
“아아.”
이제 들어가려고 할 때 서수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자! 노래를 불러준 아이들에게 박수!”
짝짝짝.
“자! 여러분들도 다 같이 인사하세요!”
그렇게 다 같이 인사를 한 번.
“어머! 어디 가시려고요. 신나는 동요 부를 때 발라드 듀엣처럼 동생을 바라보던 형아 씨!”
나는 몸을 움찔거렸다.
또 뭐? 설마 동요가 너무 일찍 끝나서 그런 건 아니지?
서수현이 씨익 웃었다.
“혹시 동생을 위해 짧게 노래해줄 수 있어요? 동요가 너무 짧아서.”
나는 마이크를 쥔 채 어색하게 웃었다.
“형아. 노래?”
시하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나는 살며시 머리를 굴렸다.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며 잘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나는 별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싶지 않다.
괘씸하게 나를 잡은 서수현에게 반격도 하고 싶다.
시하의 기대도 채워주고 싶다.
그래서 내린 결론.
“노래는 좀 그렇고 성대모사 하나 할게요.”
“오! 성대모사요?! 이거 기대되네요.”
“그 드라마 시그널에 있잖아요.”
“아! 시그널!”
“네. 박해영 경위 역을 잠시 따라 해볼게요.”
“오!”
“약간 좀 어레인지해서 여기 있는 너튜버 [슈]에게 무전을 보내 보겠습니다.”
“네? 아! 네!”
다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서수현은 오히려 불안한 눈이었다.
크흠.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치익. [슈] 너튜버님?”
“치익. 네.”
“치익. 지금 어디시죠?”
“치익. 지금 라이브 카페에서 처음으로 알바하고 있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거기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라이브 카페 살인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다들 ‘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왕이면 다 같이 재밌게 즐겨야지.
나는 서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때를 바꾸면 미래도 바꿀 수 있습니다. [슈] 너튜버님. 어서 앞에 있는 선배님에게 뭐 시키지 마세요. 들어가게 하세요. 그래야 나중에 정신적으로 털리지 않습니다.”
너 이거 끝나면 죽을 준비하라는 메시지였다.
서수현이 놀라며 나를 보았다.
내 눈빛이 진심인 걸 알았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마이크를 들었다.
“치익. 이미 늦은 거 같습니다…….”
그 말에 앞에 있는 사람들이 빵 터졌다.
서수현이 맛깔나는 표정으로 진심을 다해 말했기 때문이었다.
서수현이 이어 말했다.
“사과하면 미래가 바뀔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보시죠.”
서수현이 일어나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원활한 학과 생활 하고 싶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그 말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치익.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럼 좋은 대학 생활 보내세요.”
“아, 안 돼!”
이렇게 마무리하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시하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형아. 대다네. 말이 막막!”
아마 목소리가 막 바뀐다는 말이겠지.
아무튼, 여러 사람을 만족시켜서 좋았다.
이제 얼굴 숙이고 카메라나 찍고 도망쳐야겠다.
하고 나니 부끄럽네.
***
-며칠 후.
노래의 열풍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아침에 시하가 노래를 틀면 움직이는 것도 여전했다.
재밌는 점이 있다면 나와 시하가 나오는 영상이 올라왔다는 것.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조건으로 말이다.
나는 아직도 SNS에 시하의 얼굴을 내보이는 게 꺼려졌다.
무수히 많은 댓글을 볼 자신이 없다.
여러 소리가 나오는 게 싫다.
혹시 누군가 시하를 알아보는 것도 조금 그렇다.
‘어쩌면 시하는 좋아할지도 모르지.’
이게 다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하에게 새로운 기회를 놓치게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회가 지금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시하는 아직 3살이고 판단도 아직 어리다.
어렸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도 나중에 커서 그게 싫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사실 그냥 내가 싫어서 그렇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말하는 걸 듣는 것.
경험해 보지 않으면 스트레스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어렸을 때 어머니가 없는 거로 이것저것 수군거리거나 말이 도는 걸 듣는 나로서는 조금 그랬다.
그나마 영상에 얼굴이 안 나오는 건 나와 동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 ‘선’은 그랬다.
“시하야. 영상이 올라왔대.”
“아아.”
“함께 볼까?”
“아아!”
서수현이 자신의 채널에 먼저 올린 것은 자기 라이브만 담긴 것.
처음에 부른 노래는 아니었다.
일단 그 영상을 뒤로 넘기고 다음 영상을 틀었다.
서수현이 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두 번 들을 마음은 없다.
이미 실제 라이브로 듣기도 했고.
“이 비하인드 영상에 우리가 나온대.”
“비하?”
“비하인드.”
“비하. 인두.”
“응. 비하인드라고 음…. 숨겨놓은 거라고 보면 돼. 이렇게.”
나는 앞에 휴지를 가져와 주머니에 쏙 넣었다.
시하는 여전히 의문을 뱉었다.
“왜?”
“응. 왜냐면 나중에 보여주려고 숨겨놓은 거야. 시하가 저번에 형아에게 블루투스 마이크 나중에 보여줬지?”
“아아.”
“그거랑 똑같아. 깜짝 놀라게 하려고 보여주는 거지. 짠! 하고 말이야.”
“아아. 짠! 영상!”
뭔가 짠한 영상으로 들리긴 하네.
근데 이 비하인드 영상에 나랑 서수현의 개인기가 들어있으니 누가 보면 짠한 영상일지도.
뭔가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시하는 천재인가?
그런 헛생각을 하다가 노트북의 마우스를 클릭했다.
시하는 내 앞에 턱 하니 앉아서 영상을 감상했다.
“오! 시작한다.”
그런데 처음이 묘했다.
서수현의 첫 곡이 나왔다.
‘이거…….’
그런데 영상의 포커스가 내가 아니었다.
시하랑 나였다.
시하 목소리와 내 목소리.
내가 질투가 나서 바나나 우유와 노래 중에 뭘 고를지 선택지를 준 장면.
작게 들리는 소리를 자막까지 큼지막하게 넣어서 대화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관해 달린 댓글들이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ㅋㅋㅋ형이 너무하네.
-바나나 우유 vs 노래 ㅋㅋㅋ
-결국 우유가 승리하는 거냐고ㅋㅋㅋ
-목소리하고 자막만 나오는데 진짜 귀엽네ㅋㅋㅋㅋ
-노래보다 대화 소리에 집중하게 됨ㅋㅋㅋ
이런 수고까지 들이면서 영상을 만들다니.
제법이었다.
대화가 끝나자 영상이 편집되고 다 같이 노래하는 부분이 나왔다.
시하가 같이하자는 말소리에 사람들의 기대가 높아졌나 보다.
아마 얼굴을 보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하며 나온 시하와 내 얼굴은 다른 캐릭터로 가려져 있었다.
-아니. 애기 얼굴 왜 펭귄이야!
-저거 페페티콘 얼굴인데ㅋㅋㅋ 슈님 저작권자 허락은 받으셨어요?
-애기 형아가 생각보다 엄청 큰데?
-근데 형아 얼굴이 왜ㅋㅋㅋ 무전기얔ㅋㅋㅋ
-무전기 무냐고ㅋㅋㅋ
서수현이 내 얼굴을 무전기로 만들었다.
왜 그런지 알지만 뭔가 괘씸했다.
이걸 이런 식으로 복수하다니.
그런데 생각보다 꽤 영상 편집을 잘했다.
뭔가 특별하게 한 건 아니었다.
저런 자막과 얼굴을 가린 그림 선택에서 서수현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전기는 심했지!
나도 귀여운 페페티콘으로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아! 형아! 시하!”
“응. 형아랑 시하가 나오네.”
“페페!”
“페페도 나오네.”
“형아. 이거. 모야?”
시하가 무전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무전기라고 하는 거야. 치익! 소리가 나.”
“치이?”
“응. 이건 음. 여기 폰 같은 거야.”
“왜? 무?”
“응? 아! 왜 폰이 아니라 무전기를 쓰냐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뭐라고 말하면 이해를 해줄까?
그냥 대충 말하고 넘기는 게 좋겠다.
가끔 어려운 설명은 건너뛰어도 된다.
“이거 봐봐. 엄청 굵지? 커다랗고?”
“아아.”
“경찰 아저씨가 이거 나쁜 사람에게 던지면 어떻게 되겠어?”
“아?”
“나쁜 사람이 으악 하며 쓰러지겠지.”
“아아.”
“그리고 모기도 윙윙 날아다니며 천장에 있을 때 던지면 잡을 수 있어.”
“아아.”
“여기 폰보다 더 세서 무전기 쓰는 거야.”
“아아.”
응. 대충 설명으로 넘어갔다.
무전기에 대해서 나중에 자세히 아는 날이 오겠지.
“어? 이제 형아가 목소리 변신한다.”
“아아!”
시하의 관심이 다시 영상으로 향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을 패러디하며 서수현의 절규로 영상이 끝났다.
마지막에 자막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 영상을 선배님에게 바칩니다. 제발 좋은 대학 생활 보내게 해 주세요ㅠㅠ]
마지막까지 센스가 보이네.
댓글도 다들 웃고 난리가 났다.
-앜ㅋㅋㅋ
-원래 저런 드라마 아니잖앜ㅋㅋㅋ
-선배님 어레인지가 아니라 다른 장르로 각색을 하셨는데요?ㅋㅋㅋ
-형아 얼굴이 무전기인 이유가 이거였어?ㅋㅋㅋㅋㅋ
-아 진짜 두 사람 얼굴 너무 궁금하다ㅋㅋㅋ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댓글을 달았다.
[치익. 너튜버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더 안 좋게. 지금이라도 휴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댓글을 달고 시하랑 서수현의 노래 영상을 보았다.
몇 분 후에 내 댓글은 상단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러자 거기에 많은 답글이 달렸다.
-슈 : 선배님. 대체 어떤 미래길래 휴학을 ㅠㅠㅠ
-ㅋㅋㅋㅋ
-치익. 이미 늦은 거 같습니다.
-치익. 어머니가 휴학하면 죽는다고 하십니다.
-치익. 원활한 학과 생활은 날아간 거 같습니다.
-치익. 이제 집콕하며 노래 영상 좀 자주 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치익. 커버곡도 올려 주실 겁니까?
이럴 때마다 댓글이 참 빠르구나.
이런 걸 즐기는 거겠지.
그때 시하가 내 옷깃을 잡았다.
“응? 시하야. 왜?”
“시하도 저거.”
“응? 뭐가?”
시하가 두 손을 들고 어떤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