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시하가 지호와 쯔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시하야. 잘 가!”
“시하. 바이바이.”
셋이서 인사하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나도 애들 어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시하가 매끈한 빨간색 차에 올라타며 다리를 흔들었다.
“시하야. 안전벨트 매자.”
“아아.”
“수현이도 안전벨트 매.”
“네!”
서수현을 집까지 데려다주면 오늘 할 일은 끝이다.
정말 굉장히 다이나믹한 하루였다.
이상하게 알게 된 것도 많았고.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 작가님들과 대화하는 것을 듣지 못한 거라고 할까?
대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해박한 지식에 맞게 다양한 주제들이 오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식사 때 혼령귀환 작가님도 나한테 흥미를 가진 거 같은데.’
홍진수 과장의 부탁만 아니었으면 바로 작가 쪽으로 통역을 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띠링.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홍진수 과장에게 톡이 왔다.
-홍진수 : 시혁 씨! 오늘 최고! 분위기도 완전 굿!
-홍진수 : 내가 분위기를 잡으려 했는데 시혁 씨가 다 잡았네.
-홍진수 : 오늘 하루 수고했어!
-홍진수 : 답이 없는 걸 보니 바쁜가 봐?
-홍진수 : 그럼 수고해~
뭔가 다다다 올라와서 답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이제 운전도 해야 해서 폰은 시하에게 맡겼다.
“시하야. 형 걸로 대신 답장 좀 해줘. 알았지?”
“아아!”
임무를 받은 시하가 키패드를 노려보았다.
아직 한글도 모르면서 맡겨 달라는 표정이 너무 웃겼다.
“수현아. 집에 데려다줄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힘들었지?”
“오빠. 시하가 얼마나 얌전한데요. 천사예요. 천사.”
“그래?”
“네. 나중에 시하 같은 애를 낳으면 좋겠네요.”
“너 닮은 예쁜 개구리가 태어날 거야.”
“네. 저 닮은 예쁜 개구…. 이 오빠가 진짜!”
“아하하.”
나는 그렇게 농담을 하며 차를 운전했다.
백미러로 서수현의 뾰로통한 표정이 보인다.
반응이 좋아서 은근 놀리기 재밌다.
“라이브 카페라고 했나? 거기 어디라고?”
“아! 제가 나중에 장소랑 시간 보내 놓을게요.”
“응. 시간 맞춰서 시하랑 갈게. 노래는 몇 곡 정도 불러?”
“으음. 곡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데 한 시간 정도 불러 달라는데요?”
“한 시간이나?”
“쉴 새 없이 부르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도 하루 정도만 뛰어 달라고 했으니.”
“그러다가 거기 계속 알바 뛰게 되는 거 아니야? 지인이라며?”
“사실 그렇게 부탁하면 거절하기 좀 그렇죠. 은근 꿀알바예요. 이게.”
“부탁할 정도면 노래 실력이 상당한가 봐?”
“오빠는 들어봐서 알잖아요?”
“나야 들어보긴 했는데 알바로 쓸 정도까지인지는 모르지.”
“왜요? 목소리가 개굴개굴거려서?”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알아서 자신이 개구리라고 하네.
전혀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뽑는 실력 기준치를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목소리는 듣기 좋아.”
“정말요?”
“어.”
“이 오빠. 또 무슨 수작이지?”
“사람이 어떻게 대형마트만 가. 가끔 문방구에서 사 먹는 불량식품도 맛있는 거지.”
“그럴 줄 알았어! 뭐예요? 제가 지금 문방구 불량식품이라는 거예요?”
“아니. 절대 아니지.”
“그럼 대형마트?”
서수현이 은근히 기대하는 느낌으로 물었다.
나는 핸들을 옆으로 꺾으며 말했다.
“아니. 인터넷 쇼핑몰. 대용량에 값싼 거로.”
“네? 이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당연히 칭찬이지. 사람들이 괜히 인터넷에서 주문하겠어? 많이 사잖아. 그치?”
“그렇죠.”
“그렇게 네 노래가 많은 사람에게 듣기 좋다는 뜻이지.”
“뭐지? 속는 느낌인데?”
“아이스크림 40개 한 번에 사두는 사람도 있더라.”
“네? 그러면 언제 다 먹어요? 질릴 텐데.”
“매일 먹는 건 아니지. 너도 라이브 카페 알바 계속해도 매일 나오는 거 아니잖아.”
“뭐지? 또 속는 느낌인데? 이거 돌려 까는 거 아니죠?”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어느새 서수현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 맞아?”
“네. 저기 길가에 내려 주시면 알아서 갈게요.”
“그래. 잘 가.”
“네! 시하야.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시하가 서수현을 보더니 두 손에 들고 있는 폰을 흔들었다.
‘바이바이.’ 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다시 집으로 운전했다.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그런데 시하야. 아직도 그렇게 열심히 보내고 있어?”
“아아.”
나는 뭘 그렇게 열심히 보내나 싶어서 궁금했지만, 운전에 집중하기로 했다.
딴 데를 보다가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다 왔다!”
“아아!”
나는 이제 시하가 보낸 톡을 볼 수 있었다.
대화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이시혁 : (고마어~ 페페티콘)
-홍진수 : ㅋㅋㅋ 임티가 귀엽네요
-이시혁 : ㅇㅅㅎ
-홍진수 : 그건 무슨 뜻이죠?
-이시혁 : (절레절레 페페티콘)
-홍진수 : ???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이시혁 : (끄덕끄덕 페페티콘)
-홍진수 : ‘열심히’라는 뜻이었군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뭔가 오해로 점철된 답장들이었다.
나는 살며시 폰을 들고 톡을 나왔다.
“이제 집에 갈까?”
“아아.”
나는 시하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
어릴 때 노래 하나에 빠지면 그 노래만 계속 불렀던 경험이 있다.
몇십 번, 몇백 번을 부르고 나서야 다른 노래를 찾기도 하고.
잊을 만하면 다시 부르기도 한다.
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아?”
시하는 끔뻑끔뻑 눈을 비비며 형아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일어나서 가슴에 얼굴을 갖다 댔다.
두근두근.
심장도 잘 뛰고 있는 거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에서 내려왔다.
내려갈 때 형아의 손을 밟았다.
“윽!”
시혁이 신음만 낼 뿐 깨어나지는 않았다.
형아에게 미안해 시하가 손을 토닥토닥 쓸어 주었다.
그런 뒤에 방을 나섰다.
조용한 아침 햇살이 거실을 비췄다.
베란다에 있는 강낭콩 줄기가 천장까지 닿아 휙휙 감겨 있었다.
이제 주렁주렁 콩이 나와 있었는데 꽤 풍성했다.
“아아.”
강낭콩이 잘 있는 걸 확인한 뒤에 리모컨을 찾았다.
티비의 전원을 켰다.
지잉.
드라마가 나오며 밑에 여러 개의 또 다른 창이 나왔다.
시하는 저거를 어떻게 하면 클릭되는지 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너튜브로 들어가지는 것도 알았다.
띡!
버튼 하나를 누르자 최대 동영상 사이트인 너튜브에 접속되었다.
그중에 자주 보는 노래 영상이 있었다.
[숫자송]
시하는 이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최근에 어린이집에서 승준과 하나와 함께 들었던 노래인데 정말 마음에 들었다.
리모컨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노래가 재생되었다.
무려 3시간짜리 무한 반복 숫자송!
둠칫 둠둠칫.
신나는 숫자송 비트가 시작되었다.
시하는 신나게 몸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아!”
아주 신이 났다.
앞에 있는 숫자송 캐릭터인 사자도 마음에 들었다.
“아아! 일!”
[일! 일어나서 놀올고오~]
“이!”
[이! 이 닦고 놀올고오~]
“서이!”
[삼! 삼촌도 같이 놀고오~
이야이야이야이야.]
시하는 손가락 네 개를 펼쳤다.
“너이!”
[사! 사랑해 놀기 사랑해!]
둠칫 둠둠칫.
시하는 캐릭터의 손가락을 따라 하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물론 제대로 부르지는 못했지만.
[오! 오늘도 놀올 거야!
육! 육십억 사람 중에 놀고 있는 건.
칠! 럭키야~
신이 나! 눈누난나
뛰어 뛰어 놀자. 다 함께!
즐거워! 나와 함께 장난치고
매일매일 놀아줘!]
“팔!”
[팔! 팔짝팔짝 뛰기 놀이~]
시하는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구!”
[구! 구르기! 오 재미써!]
“십!”
[십! 십 년이 가도 나는 놀 거야!
언제나 이 맘 변치 않을게~]
참으로 굉장한 가사였다.
사실 이 숫자송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백수송]
이건 뭐 가사가 거의 오로지 놀기를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잘 들어보면 백수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백수의 왕 사자였다.
또 재밌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이 노래가 나오자 아이들이 엄청 좋아했었다.
문제가 있다면 엄마들이 엄청 항의 메일을 보냈다는 거.
무슨 노래가 온통 노는 것밖에 없냐면서.
심지어 마지막 가사 두 줄이 굉장했다.
10년이 가도 놀 거라는 현재진행형.
이 마음이 변치 않을 거라는 단호함.
유쾌한 이 가사는 의외로 20, 30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곡이었다.
“서이!”
시하가 또 부를 때쯤에 시혁이 잠에서 깼다.
시혁이 끼익 문을 완전히 열고 나오며 춤추고 있는 시하를 보았다.
“아침부터 너무 기운 넘치잖아…….”
털썩.
시혁은 그대로 거실에 쓰러져 누웠다.
시하가 도도도 달려와 배 위에 올라탔다.
“형아! 노래!”
“응. 숫자송이 재밌어?”
“아아!”
“무슨 말인 줄은 알고?”
“아아. 놀자!”
“너무 잘 아는데?”
역시 키포인트를 아는 시하였다.
그렇게 시혁과 시하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
-어린이집.
숫자에 관한 동요를 좋아하는 아이들도 많지만, K-POP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바로 오하나!
TV에 나오는 아이돌 언니들의 예쁜 모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하나도 저런 언니들처럼 아주 예쁜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나가 승준과 시하를 보며 말했다.
“하나는 가수가 하고 시퍼!”
“응. 해!”
“아아.”
승준은 심드렁하게 반응했고, 시하는 좋다는 듯이 박수를 보냈다.
하나가 승준의 반응에 뾰로통해졌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가방을 가져왔다.
“하나가 마이크 가져 와써!”
하나는 가방에서 마이크를 꺼냈다.
장난감인 플라스틱 마이크.
가수가 가져야 할 필수품이었다.
시하가 신기한지 마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분홍색 마이크가 아주 예쁘게 생겼으니까.
하나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이걸로 하나는 가수야. 오빠는 매니저야.”
“그거 안 멋있는데!”
승준에게는 멋짐이 중요했다.
하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 가지 사실을 말했다.
“아니야. 매니저 잘생겨써. 시혀기 오빠만큼!”
“그래?”
“응!”
저 말에 승준이 홀라당 넘어갔다.
요즘 애들 사이에 시혁의 인기가 장난 아니었다.
하나가 말했다.
“시하는 웅-”
하나는 고민했다.
시하는 뭘 하면 좋을까?
어떤 게 어울릴까?
매니저는 잘생겼다. 시혀기 오빠만큼.
시하는 시혀기 오빠의 동생이다.
그렇다면…….
“시하도 매니저야!”
“매니저?”
“응.”
승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매니저인데?”
“오빠도 매니저고 시하도 매니저야. 하나는 예뿐 가수라서 매니저 두 명!”
“아하!”
실제로 매니저 두 명이 가수를 전담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는 그걸 알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종수가 슬쩍 다가왔다.
종수가 세 사람 사이에 같이 놀고 싶어 했다.
“나는 뭐 없어?”
슬쩍 던지는 질문.
하나는 살짝 경계하다가 고민을 해 주었다.
종수는 시혀기 오빠보다 못생겼다.
그러면 매니저를 할 수 없다.
물론 가수도 할 수 없다.
‘어려워.’
하나는 희대의 난제를 만난 것처럼 끙끙거렸다.
그때 시하가 말했다.
“종수. 멍멍이!”
하나가 거기에 맞장구쳤다.
“그래. 종수는 강아지야.”
종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구겼다.
“강아지를 해서 뭐하게!”
“아니야. 가수를 지키는 강아지야. 그래도 기엽자나!”
“뭐래. 그러면 차라리 경호원을 하겠어!”
“그럼 그거 해.”
하나는 이제 조금 귀찮아졌다.
그래서 재빨리 정해 주었다.
솔직히 빨리 가수를 하고 싶었다.
종수는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지만 찝찝함을 참은 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가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 출발!”
자동차가 출발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움직였다.
의외로 종수가 자신의 역할에 잘 몰입하며 여기저기 살피며 하나를 지켰다.
하나는 콧대가 높아지며 분홍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분위기만 보면 대스타의 등장이었다.
“어?”
“아?”
“머야?!”
“먼데?”
잘 가고 있던 아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