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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500)

86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총 네 사람.

아이 둘에 여자 둘.

그중에 아이 하나는 시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흙공을 같이 만들었던 박지호.

그 아이가 시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옆에 털썩 앉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밝아진 모습이었다.

물론 시하를 봐서 더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있었다.

박지호가 말했다.

“여기서 널 볼 줄 몰랐어.”

“아아. 지호 형아.”

“응. 잘 지냈어?”

“아아. 시하. 고기!”

시하가 포크로 집은 고기를 보여주며 입에 쏙 넣었다.

지호가 입에 묻은 기름을 휴지로 닦아주었다.

“고기 먹으며 잘 지냈단 말이지? 우리 밥 먹고 같이 놀까?”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자애 한 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호가 그 애를 소개해 주었다.

“이 애는 쯔한이야.”

“주한?”

앞에서 듣고 있던 김병수가 말했다.

“주한미군.”

그 말에 서수현이 타박했다.

“어우. 아재개그.”

김병수가 찔끔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빙구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시하가 다시 발음을 몇 번이나 고친 뒤에 ‘쯔한’이라고 제대로 발음했다.

그 말에 김병수가 왜 ‘나만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지 않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시하는 김병수를 빙구라고 불렀다.

서수현이 재밌다고 계속 반응했으니까.

이름은 빙구 확정이었다.

박지호가 말했다.

“엄마. 얘가 그때 말한 시하야.”

“그래? 안녕. 시하야. 이야기 많이 들었어. 우리 지호 많이 도와줬다면서?”

“아아. 지호 형아. 조아.”

“좋아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형아는 안 왔니?”

지호 엄마가 두리번거리자 시하가 옆방을 가리켰다.

“옆방에 있어?”

“아아.”

“그렇구나. 나중에 인사라도 해야겠네.”

지호 엄마는 옆방에 누가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친한 중국 친구도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지호 엄마는 친구의 관광과 통역을 위해서 한국에 같이 온 것이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 안 오려고 했는데 딸은 다른 아이랑 놀고 있을 거고, 자신은 심심할 거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다.

뭔가 민폐일 거 같아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친구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KI 미디어에서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숟가락 두 개만 놓으면 되는 거라면서.

지호 엄마가 시하를 보며 말했다.

“시하야. 여기 쯔한이랑도 같이 잘 놀아줘. 알았지?”

“아아.”

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쯔한을 보았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넝!”

쯔한이 부끄러운지 지호의 뒤로 숨었다.

한국어도 잘 모를뿐더러 시하가 조금 마음에 들어서 말을 잘 걸 수 없었다.

“아?”

시하는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호는 그런 시하 옆에서 때마침 구워진 고기를 야무지게 먹었다.

“시하야. 고기 맛있네.”

“아아. 쯔한. 고기!”

시하가 내민 고기에 쯔한이 화들짝 놀랐다가 입을 살며시 열었다.

그렇게 먹여 주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흐뭇하게 보았다.

***

조용해지는 타이밍에 맞춰서 나는 화장실에 들렸다.

식사에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질 거 같다.

이제 어느 정도 배를 채웠을 때 이야기를 나누겠지.

식사가 치워지고 안주가 들어오며 술도 한잔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많이는 안 할 거 같지만.

‘흐음. 잠시 시하를 보러 갈까?’

나는 손을 씻고 탈탈 턴 다음 시하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을 살며시 열자 안에 테이블이 보였다.

‘응? 지호네?’

설마 여기서 지호를 볼 줄 몰랐다.

중국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설마 다시 돌아온 건가?

아니면 잠시 돌아온 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봐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예전보다 훨씬 밝은 모습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역시 애들은 저렇게 웃어야지.

저 웃음을 지켜줄 수 있는 엄마여서 다행인 거 같다.

자신과는 다르게.

“형아!”

이런 잘 있나 잠깐 보려고 했는데 시하랑 눈이 마주쳤다.

어쩔 수 없지.

“시하야. 잘 먹고 있어?”

“아냐.”

“응? 왜? 맛이 없어?”

“형아. 업써.”

“헉!”

설마 나 없다고 잘 먹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야?

이런 건 어디서 배웠대?

그런데 시하야. 볼에 빵빵하게 고기가 들어가 있는 건 다 넘기고 말해 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여간 시하는 귀여웠다.

“다음에 형아랑 여기보다 더 맛있는 데 먹자. 알겠지?”

“아아.”

나는 고개를 돌려 지호에게도 인사했다.

지호가 밝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곤 엄마에게 나를 소개해 줬다.

지호 엄마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미셨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요. 제가 더 감사하죠.”

“그 사건 있고 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좀 그런 사건이었죠?”

“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해야죠. 아. 맞다. 여기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대충 예상은 가지만.”

“하하. 뭐 운 좋게 통역사로 일하게 되어서요. 조금 있으면 가 봐야 해서.”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지호 엄마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 계약 잘되면 좋은 거죠? 시혁 씨에게 중요한가요?”

“네, 뭐. 잘되면 좋죠. 빚진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러시구나. 혹시 이상하게 되어도 시혁 씨에게 피해가거나 그런 거는 없죠?”

뭐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뭔가 이상한 정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불쑥 들었다.

“왜요? 문제 있어요?”

“잠시 따로 이야기 좀 해요.”

“음.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하네요. 아마 지금쯤 한참 식사에 집중하고 있을 테니까요.”

나는 시하에게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기 한 바퀴 돌죠.”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먼저 준 것은 명함이었다.

“저는 미국 헤지펀드 블레어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블레어?”

“네. 증권가에서 유명하죠. 저는 정확히 블레어 리서치 소속이에요.”

“중국 주재원으로 가 있는 게 조사를 위해서예요?”

“네. 저희는 투자를 특이하게 하거든요. 오로지 숫자를 신용해요. 그래서 이번 기업에 관해서 조사차 나온 거고요.”

“그런 정보를 저에게 알려주셔도 됩니까?”

이거 하나는 안다.

이런 정보는 함부로 알려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안 되죠. 그런데 제가 시혁 씨에게 빚이 있잖아요. 전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라서.”

“아하하. 그런가요?”

“네. 쉽게 말할게요. 사실 저희 쪽에서 UX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사실 판매 수를 속이거나 하지는 않아요. 전자 금융이라 다 계산이 나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매를 속이기 쉽지 않다.

솔직히 할 필요도 없었다.

팔리는 작품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럼 뭐가 문제일까?

“뭔가 망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아니요. 오히려 기업은 계속 성장할 거예요. 어느 정도 한계가 오지 않는 이상은요.”

“그럼 문제가 뭡니까?”

“지금 UX를 경영하는 장웨이 대표를 어떻게 보시나요?”

나는 장웨이를 떠올렸다.

일단 말을 잘하고 말끔하게 생겼다.

옷과 분위기를 볼 때 딱 단정하고 정갈한 느낌.

뭔가 신뢰가 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 느낌의 장사꾼이죠.”

“네?”

“말했죠? 저희는 숫자만 본다고. 그게 주식 그래프만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요?”

“사람이 장사꾼인지 아닌지도 보죠. 정확히 세일즈 포인트. 지금 장웨이에 대한 제 평가는 전형적인 장사꾼이죠.”

“그럼 UX를 팔려고 하는 겁니까?”

“물론이죠. 팔아넘기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을걸요? 문제는 누구에게 경영을 넘기느냐인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대표인데 굳이 팔아넘겨야 하나?

다른 사람이 경영하게 두게 하나?

그녀가 내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네요.”

“뭐, 그렇죠.”

“세일즈를 잘하는 경영자는 다른 꿈을 꾸기도 해요. 이건 그냥 물건이니 애착이 없는 거죠. 그리고 UX 대표는 두 명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웨이에게 UX는 그저 물건일 뿐이구나.

“그럼 KI 미디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KI 미디어에게는 굳이 득이 없죠. 제가 예상한 정책이 맞다 면요.”

“뭘 예상했는데요?”

“아마 경영자가 바뀌면 지금보다 작가들을 더 착취하는 식으로 가겠죠. 저작권을 UX가 가질 겁니다.”

“네? 그게 될 수 있는 소리예요?”

“이래서 독점이 무서운 거죠.”

나는 대략 알 수 있었다.

아마 UX는 웹소설 시장의 반 이상을 먹어치웠을 것이다.

적어도 70%.

그렇다면 이런 횡포가 말이 되는 소리였다.

익숙한 사람들은 UX를 찾을 거고 사람이 많으니 작가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가져오냐는 거다.

“방법은요?”

“아마 광고 수익으로. 작품은 무료로 풀겠죠.”

“전부를요?”

“네. 지금 하는 갑질을 연장선이죠. 사이트의 배너와 프로모션을 주느냐 마느냐로.”

“작가들은 가만히 있을까요?”

“당연히 가만히 안 있겠죠? 어느 정도 타협할 거예요.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문제가 있다면.”

“나아지게 되는 데 오래 걸리겠네요.”

이 거래 손해다.

아니, 손해까지는 아니더라도 플랫폼에서 저렇게 나오면 한국 소설의 배너나 프로모션까지 불투명해진다.

‘굳이 KI 미디어가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지금 KI 미디어는 아머존이라는 루트를 뚫어놓은 상태.

정말 굳이 그렇게 아득바득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판단은 내 몫이 아니야.’

나는 KI 미디어 직원도 아니다.

다만 빚을 조금 지고 있을 뿐이지.

‘그러고 보니 장웨이는 나에게 관심을 가졌지? 투자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살며시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용할 생각이야. 거래처를 뺏길지도 몰라.’

지금 아머존과 계약이 이루어진 이유는 사람 대 사람의 신뢰 관계로 맺어진 거다.

그렇다면 작정하고 UX에서 사람을 회유하면?

그것도 총알이 많은 UX에서 작정하고 나오면 버틸 수 있는 편집자가 있을까?

기업과 다르게 출판사 편집자가 올라갈 수 있는 위치적 한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장웨이는 공생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잘 포장해서 팔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대표님에게 말하는 게 좋겠어.’

어디까지나 일어나지 않는 일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판단은 KI 대표가 할 것이다.

대표님과 홍진수 과장에게 빚이 있으니 이걸로 갚는 셈 쳐야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준 지호 엄마를 보았다.

“고마워요. 도움이 되었네요.”

“뭘요. 어쩌면 장웨이가 시혁 씨에게 좋은 제안을 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프리랜서시잖아요.”

“아…….”

혹시 모르겠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머니를 제안할지도.

나는 그저 웃었다.

어느새 우리는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럼 들어갈까요? 다들 저 찾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벌써 다 왔네요.”

“식사 끝나면 시하는 키즈 카페에 갈 거거든요. 혹시 괜찮으면 지호랑 같이 온 아기도 데려가 보세요. 재밌을지도 몰라요.”

“그럴까요?”

“네. 가실 마음 있으시면 시하 옆에 있던 아가씨가 갈 때 한번 물어보세요.”

그녀가 손가락 총을 만들더니 나를 향해 쏘았다.

“아. 혹시 여자 친구?”

“아니요. 후배예요.”

“원래 친한 선후배 사이에 썸씽이 생기는 거 아닌가요?”

“글쎄요? 시하보다 귀여우면 생각해 봐야죠.”

그녀가 재미없다는 듯이 입을 삐죽였다.

“절대 썸씽 안 생기겠네.”

아무래도 그녀도 시하의 귀여움을 인정했나 보다.

역시 시하는 귀엽다.

***

-1시간 후.

-식당 흡연실.

장웨이가 담배를 태우며 나에게 말했다.

「UX에 들어오시면 연봉 1200 드리겠습니다.」

이건 무슨 말일까?

연봉 1200만 원?

장웨이가 제안은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계속 말했다.

「매년 떨어지는 보너스로 1억 2천 드리겠습니다. 통번역 일을 하시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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