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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500)

83화

“잠시만 기다리렴.”

할아버지가 마루에서 일어나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나와 시하는 눈을 껌뻑껌뻑 떴다.

정말로 우유가 나오는 건가?

너무나 진지한 할아버지의 표정에 속아 넘어갈 거 같다.

아무리 그래도 우유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형아.”

“응. 할아버지가 우유를 나오게 할지도 모르겠네.”

“아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금방 돌아오셨다.

품에 짐을 한가득 가지고.

“자! 이제 우유가 나오게 해 보지. 잘 보렴.”

할아버지가 꺼낸 것은 유리컵이었다.

다이아몬드 무늬가 새겨진 컵이라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액체의 색깔은 볼 수 있다고나 할까?

“여기 이렇게 뜨거운 물을 부으면 우유가 생긴단다.”

조르르.

주전자로 컵에 물을 부으니 정말로 유리컵 표면에 하얀 액체가 증가하고 있었다.

시하가 신기한지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어린이집 애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와!”

“신기해!”

“우유가 나온다!”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우유를 가득 채웠다.

살살 컵을 흔들더니 다른 컵을 꺼냈다.

“이런 조수가 필요한데. 나 좀 도와주겠나?”

“네!”

나는 할아버지 곁으로 갔다.

도와주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담는 일이었다.

“그럼 여기에 우유를 붓겠습니다.”

조르르.

얼음이 담긴 컵에 우유가 들어갔다.

나는 그런 우유를 살며시 저어서 빨대를 꽂았다.

할아버지가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컵을 애들에게 보였다.

“자 우유의 반이 없어졌지요? 하지만 이렇게.”

검은 천을 덥더니 살며시 흔들었다.

휘익.

치워진 검은 천.

어느새 컵에 우유가 가득 채워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유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아! 짱이다!”

“신기해!”

“할아버지 대다내!”

할아버지가 유감없이 실력 발휘를 했다.

아무래도 마술의 일종인 것 같다.

저 컵에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이들의 눈에는 할아버지가 거의 마법을 부리는 수준일 것이다.

냄새를 맡았는데 자판기 우유랑 같은 냄새였다.

아마 뜨거운 물을 부은 것은 우유 가루를 이용한 것 같았다.

‘오호. 신기하네.’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다른 플라스틱 컵에 우유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다시 유리컵에 우유가 반이 없어졌고, 플라스틱 컵을 거꾸로 들었다.

“어때요? 우유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시하의 눈이 커졌다.

한 3mm 정도?

“아아! 우유!”

애들이 어찌나 신기해하는지 플라스틱 컵 하나를 두고 그 안을 바라보았다.

우유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아이들의 시선이 뺏기는 동안 할아버지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상자 안에는 감추어둔 우유 가루가 가득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애들 몰래 주전자에 우유가루를 많이 넣었다.

‘이래서 조수가 필요했구만.’

내가 우유를 타는 동안 다시 한번 할아버지가 시선을 모았다.

“그럼 여기 검은 천을 덮으면 다시 우유가 생성돼요. 자 다 같이 숫자를 외쳐볼까요?”

“하나! 둘! 셋!”

다시 우유가 채워진 컵이 애들 눈에 보였다.

나도 대충 컵을 슬쩍 봤는데 알 것 같았다.

컵 안에는 또 다른 컵이 있는 거지.

계속해서 우유를 반만 따르는 건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안쪽 컵에 들어간 우유가 다시 나올 수 있게 장치가 되어있는 건가?’

처음에 우유를 진짜로 따른 것은 안쪽에 있는 컵도 우유로 채웠기 때문일 것이다.

‘저 컵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 뭐, 애들이 재밌어하면 됐지.’

나는 이제 편하게 앉아서 할아버지가 하는 마술을 구경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여기 주전자에 있는 물을 전부 우유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이 컵의 도움이 필요하죠. 자! 두 개를 검은 천에 씌우고.”

할아버지가 시하의 손을 잡았다.

“손에 숨겨져 있는 마법의 힘 좀 빌려 갈게.”

“아아!”

그러자 아이들도 저마다 손을 내밀었다.

승준이 흥분해서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두 배로 숨겨져 있어! 원한다면 줄 수 있는데!”

“하나도 하나도! 알리사 언니랑 친해서 마법이랑 친해! 몸에 이써!”

아마도 하나는 알리사가 아직도 마법사인 줄 아나 보다.

물리 마법사 아니었나?

신데렐라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알리사 역시도 그런 종류의 마법사이기는 하지.

“하하. 그럼 모두의 힘을 받아볼까?”

“네!”

다들 할아버지의 손 위로 손을 모았다.

마치 파이팅을 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럼 힘을 모았으니까 여기에 마법을 넣으면!”

검은 천이 치워졌다.

할아버지가 주전자를 들고 갖고 온 컵에 전부 우유를 따랐다.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했다.

가득 채워진 얼음과 뜨거운 우유가 서로의 체온을 같게 만들었다.

표면에 동동 띄워지는 얼음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표출했다.

“자. 그럼 다 같이 시원한 우유를 마셔 볼까요?”

“네!”

다들 빨대로 우유를 맛있게 마셨다.

승준이 말했다.

“이거 내가 먹던 우유랑 달라.”

“마자. 달라!”

할아버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서 그렇단다.”

저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시다니.

다행히도 아이들이 이런 우유를 먹어본 적이 없나 보다.

자판기 우유를 마셔 봤으면 단번에 알았을 텐데.

시하가 윗입술에 흰 우유를 묻히며 말했다.

“형아. 마시써.”

“응. 시하야. 맛있지?”

나는 묻은 우유를 엄지로 스윽 닦아 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힐끗 보았다.

“그런데 마술은 어디서 배우신 거예요?”

“응? 아! 스승님께 배우거나 연구도 많이 했지.”

“네?”

“내가 왕년에 마술사였거든.”

실제로 마술사셨어?

다른 것보다 저게 더 놀랍다.

어쩐지 손놀림이 장난 아니시더니.

생각해 보면 이런 집에 마술 도구가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물론 취미로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릴 때 아들이 내 마술을 참 좋아했는데. 이제 여기 애들이 대신 봐서 좋아해 주니 기쁘지.”

“그러시구나.”

가끔 원장 선생님이 애들을 데리고 오는 이유를 알겠다.

공기가 좋은 것도 있지만 할아버지 마술도 볼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도 가끔 애들과 정답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그럼 아직도 연구하세요?”

“그럼. 애들 올 때마다 똑같은 마술을 보여줄 수 없으니까.”

“하하. 그렇겠네요.”

마술사. 뭔가 멋진 직업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재밌게 하는 직업이니까.

나도 마술이나 배울까?

그때 시하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시하도. 우유.”

“응? 시하도 우유 나오게 해 보고 싶어?”

“아냐.”

“응? 아! 우유 더 먹고 싶다고?”

“아아.”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신기한 건 한순간인가 보다.

역시 먹을 게 최고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우유를 따라주었다.

***

우유를 다 먹은 시하는 친구들이랑 다시 강아지를 보기 시작했다.

뒤에 슬쩍 형아가 잘 있나 보았다.

형아는 할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심하고 다시 강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아. 멍멍이.”

시하는 오랜만에 본 멍멍이가 좋았다.

차차라는 이름도 좋았다.

세상에 제일 복슬복슬한 감촉이 있는 차차였다.

“차차!”

시하가 부르자 차차가 고개를 들었다.

멍! 멍!

시하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자 강아지들도 시하 주위를 둘러쌌다.

“아?”

시하는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벌렸다.

뒤에 있던 승준이 신기하다는 듯이 시하를 보았다.

“강아지가 시하 엄청 좋아하네!”

“아아!”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강아지는 시하의 부하야.”

“아?”

“같이 히어로 놀이를 하는 거야.”

“아아!”

하나가 손을 들었다.

“하나는 마술도 쓰고 싶어!”

“시하도!”

히어로 보다 마술에 관심이 지대하게 갔다.

그리고 형아도 마술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번에 통장에 돈이 생기게 만드는 걸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커다란 늑대도 물리친 형아였다.

“형아. 마술사!”

시하의 말에 승준과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자. 시혀기 형아 엄청 세!”

“마자. 마자. 시혀기 오빠 엄청 강해!”

승준이 생각하기에 시혁도 마술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와 달리 시혁은 뭔가 뭐든지 척척 해내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설명도 쉽게 해 준다.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시혀기 형아는 얼마나 강한 걸까?”

“아?”

“시하야. 시혀기 형아는 얼마나 강해?”

시하는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형아가 대체 얼마나 강할까?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난제에 시하가 끙끙 앓았다.

그 답은 시하의 입이 아니라 하나의 입에서 나왔다.

“아마 시혀기 오빠는 공룡도 이길 거야.”

“응? 시혀기 형아가 공룡이랑 싸워본 적이 없잖아.”

“그래도 하나는 아라! 시혀기 오빠는 이겨!”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이 어이가 없이 쳐다보았다.

하나야. 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아니, 그리고 그걸 왜 네가 대답해?

하지만 선생님의 속마음은 하나에게 닿지 않았다.

승준이 말했다.

“그럼 확인해 보자.”

“어떻게?”

“아?”

시하와 하나가 승준을 의문 어린 눈으로 보았다.

승준이 ‘히힛.’ 하고 웃더니 하나와 시하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선생님이 멀리 가는 건 아닐까 싶어 따라갔지만 겨우 앞마당 끝에 있는 곳이었다.

“내가 공룡을 발견했어!”

승준이 배를 쭈욱 내밀었다.

이거면 시혁이 이길 수 있을지 판단이 되었다.

“자, 봐! 지금은 아기 공룡이지만 나중에 클 거야.”

승준이 가리킨 손끝에 있는 것은 도마뱀이었다.

하나가 ‘히익.’ 하며 승준의 뒤에 숨었다.

“오빠. 공룡이야?”

“응! 공룡이야.”

시하는 도마뱀을 보았다.

꼬리도 있고 혀도 날름날름 내밀었다.

아주 조그마해서 시하도 아기 공룡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아기 공룡을 따라가면 큰 공룡이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 있던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논리적인 말이었다.

물론 공룡이 아니라 도마뱀이었지만.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어서 시혀기 형아 불러줘.”

“아아!”

시하와 하나가 마루에 앉아 있는 시혁에게 달려갔다.

시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야. 왜?”

“형아. 공료옹!”

“시혀기 오빠! 저기 공룡이 이써! 엄마 공룡이랑 아빠 공룡이랑 싸워서 누가 이기는지 보여줘.”

시혁이 그 말에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애들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이미 애들 사이에서는 히어로로 통하는 이시혁은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럼 내가 공룡을 물리치는 걸 보여줄게. 시하야. 하나야. 잘 봐.”

“아아.”

“와! 시혀기 오빠 체고!”

시하는 기대하는 얼굴로 형아를 보았다.

형아가 정말 공룡을 이길 수 있을까?

정말이면 좋겠다.

“그럼 가볼까?”

시혁이 승준이 있는 곳으로 가자 승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시혀기 형아. 이거 봐! 공룡이야.”

“와! 공룡이네.”

“이제 아빠 공룡을 찾아서 싸우면 돼!”

“그러네. 찾아서 싸우면 되네. 어디 보자.”

시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소란을 피워서인지 모든 아이가 시혁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시혁의 등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선생님도 다들 시혁을 쳐다보았다.

과연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아! 저기 있다! 저 멀리 있다!”

다들 시혁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멀리 있어서 안 보이겠지. 하지만 소리는 들릴 거야.”

시혁이 공룡 울음소리를 폰으로 켰다.

크아아악!

아이들이 놀란 눈으로 시혁을 보았다.

시혁이 엄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내가 엄지로 공룡을 조용히 시켜볼게.”

시혁이 두 손으로 엄지가 떨어지는 마술을 부렸다.

어릴 때 누구나 했던 손가락 떨어지는 마술.

“보이지? 이렇게 떨어지는 거?”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간다! 피융!”

시혁이 엄지손가락을 빠르게 날렸다.

아이들이 날아간 곳을 쳐다볼 때 시혁이 재빨리 폰으로 공룡 울음소리를 껐다.

“와! 공룡이 도망갔네?!”

아이들이 멍하니 시혁을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승준이었다.

“시혀기 형아. 로봇이었어?”

“어?! 시혀기 오빠 로봇이야?”

졸지에 로봇이 되어 버린 시혁이었다.

시하가 달려와 시혀의 다리를 잡았다.

“형아.”

“응.”

“손.”

“응?”

“손이 업써…….”

시하는 날아간 손가락이 너무나 걱정되었다.

“어? 어어. 아니야.”

시혁은 당황하며 손가락을 회수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시하가 충격을 받아서 다음에는 손가락 마술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를 즐겁게 하지 못하는 건 마술이 아니다.

시혁은 마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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