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500)

80화

-KI 미디어.

드디어 현장실습을 왔다.

기간은 4주.

앞으로 서수현, 김병수와 함께 이곳에서 일해야 했다.

물론 둘에게도 일을 맡길지 의문이지만.

우리를 먼저 반긴 것은 홍진수 과장이었다.

“하하. 다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홍진수라고 합니다. 시혁 씨.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과장님이 오늘 저희를 안내하실 건가요?”

“당연하죠. 이 중요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리 없지 않습니까.”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보통 이런 현장실습은 한 번 스윽 보고 말단에게 맡기는 게 보통이던데…….

일단 우리는 홍진수의 안내에 따라 KI 미디어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부서를 소개해 주었다.

전에 한 번 봤던 공간이었지만 뭔가 새로운 느낌도 있었다.

뭔가 직업 체험 느낌도 나고.

여러 설명이 끝난 뒤에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홍진수가 말했다.

“사실 이번 현장실습 업체로 참가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냥 놀게만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보통 이 출판 업계에 뛰어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많지만. 혹시 제 설명을 듣고 원하시는 부서가 있습니까?”

나는 일단 서수현을 보았다.

그런 질문은 생각 안 했는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힐끗 보았다.

나를 왜 봐?

‘음. 이왕 온 거 기획 쪽 일도 한번 보고 싶은데. 일도 줬으면 좋겠고.’

생각해 보니 재밌을 것 같았다.

“홍 과장님. 저는 기획 쪽으로 가고 싶은데요.”

“하하. 시혁 씨. 시혁 씨는 이미 좋은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제가 시혁 씨 책상도 어제 반짝반짝하게 닦았다니까요.”

저기요? 왜 KI 미디어에 제 책상이 있는 거죠?

혹시 KI 미디어를 선택한 것은 실수였을까?

괜한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럼 저는 기획 쪽으로?”

“맞습니다. 해외영업부로.”

“네? 기, 기획은요?”

“그것도 기획이죠. 하하. 어떠십니까?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도움이 많이 되기보다는 도움을 줄 것 같은데요?

“컴퓨터도 좋은 거로 설치도 해 놨습니다. 모니터도 커브드로!”

“대체 왜?”

아니, 아니.

이렇게 되면 완전 입사한 느낌 아닌가?

“농담입니다. 사실 원래 있던 겁니다. 퇴사한 사람이 있어서 책상이 비거든요.”

“아직도 사람 못 구하셨어요?”

“아니요. 사람은 구했죠. 인원을 좀 늘렸는데 다른 좋은 곳으로 간 사람이 있어서 문제지.”

“아하.”

편집자를 뺏겼나 보다.

하긴 출판 업계에서 직급이 올라가 봤자 한계는 명확했다.

그러니 연봉을 더 좋게 주는 곳으로 갔겠지.

아마 나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차마 잡을 수 없는 연봉을 제시했겠지.’

홍진수도 나의 그런 생각을 느꼈는지 덧붙여 말했다.

“출판사가 플랫폼을 이기기는 좀 힘들어서요. 걱정 마세요. 이번에 미국에서 책도 팔리고 해외영업부에서 고생 좀 하면 저희도 날개를 펼 겁니다.”

아주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때 서수현이 손을 들었다.

“저도 해외영업부로 가보고 싶어요.”

“혹시 외국어 잘하십니까? 영어나 다른 언어요.”

“스피킹은 조금 자신은 없지만, 읽기는 자신 있어요! 여러 아이디어도 잘 말할 수 있고 팝송도 잘 부를 수 있습니다!”

“자신감 좋네요. 사실 시킬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읽기를 잘하신다고요? 그럼 딱 맞는 일이 있습니다.”

홍진수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왠지 그 시킬 일을 알 것 같았다.

‘작품 검토서 쓰겠네.’

한국에 번역할 책을 선정하는 일.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 줄 모르고 서수현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냥 다른 부서 간다고 해!

홍보부 좋네! 그쪽으로 가면 할 일이 별로 없을 거야.

나는 서수현에게 눈짓을 보냈다.

내 신호가 전달되길.

서수현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좌우로 움직이며 이건 아니라는 신호를 주었다.

“푸흡!”

“왜 그러시죠?”

“아니에요. 그냥 재밌는 걸 봐서. 아하하.”

나의 의사 전달은 실패했다.

웃기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

우리를 지켜보던 김병수도 손을 들었다.

“저도 같이하고 싶습니다. 하하하! 역시 친구들이랑 함께하는 게 더 좋죠.”

아마도 서수현이 이쪽으로 붙으니 간다고 하는 모양.

눈을 보건대, 아직 서수현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거절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것 같은데 설마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뻔뻔한 건지 모르겠다.

“병수 씨는 외국어 잘합니까?”

“하하! 물론이죠! 저 워킹 홀리데이도 한 사람입니다. 군에 있을 때 해외 병사랑 같이 전투식량도 먹은 사이입니다. 훈련도 같이하고요. 하하!”

저, 저 자신감의 원천이 군 생활이었다고?

아니지. 설마 워킹 홀리데이도 군인이랑 같이 생활한 거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저기도 불나방처럼 최악의 일터를 선택했다.

쯧쯧.

홍진수가 말했다.

“하하. 병수 씨도 수현 씨랑 같은 일을 하면 되겠네요.”

서수현이 그 소리를 듣고 질색했다.

정말 김병수를 싫어하나 보다.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할 일이 정해지게 되었다.

휴게실에서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하는 회의는 정말 계약에 대해서였다.

그것도 나도 아는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송택수 선생님의 무협.

이번 기획에 중국 진출을 위한 플랫폼과의 계약을 따내는 일이었다.

한국 역시도 웹소설 시장의 작품이 엄청나게 많지만, 중국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작품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만약 프로모션이나 배너를 받지 못한다면 그대로 묻히게 될 것이다.

심지어 작가는 한국인.

온갖 조롱과 비방의 댓글이 달릴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몰상식한 사람들은 일부뿐이다.

‘문제는 그 적은 악플 숫자의 규모가…….’

이게 다 인구가 많아서 그렇다.

아차. 회의에 집중해야지.

이 경험이 나중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런 회의 자리까지 보여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예상하기로는 홍진수가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점밖에.

“이번에 중국 거대 웹소설 플랫폼 UX와 계약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습니다. 원래라면 저희가 중국에 가야겠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그쪽 팀에서 일 때문에 한국으로 오기로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한국에서 만나게 된다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 것 같았다.

“거기서 재밌는 제안을 하더군요. 중국 무협 작가와 한국 무협 작가의 교류의 장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희 매니지에 무협 작가가 꽤 되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럼 담당에게 연락해 두고 한번 작가님들을 모아보는 거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럼 통역사도 구해야겠군요. 동시통역이 그렇게 쉽지 않겠지만.”

그때 홍진수가 나를 보았다.

“시혁 씨. 혹시 중국어 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중국어는 할 줄 모른다.

독일어랑 영어라면 몰라도.

“중국어는 전혀 할 줄 몰…….”

그때 폰을 들고 있는 손이 따끔거렸다.

혀가 이상하게 꼬이더니 말도 이상하게 나왔다.

“르으니러으다아아아? 크흠!”

이상하게 나온 나의 말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할 줄 모릅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명백히 중국어였다.

그 말을 들은 홍진수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시혁 씨군요. 믿고 있었습니다.”

***

-몇 시간 후.

김병수는 뻑뻑한 눈을 비볐다.

처음에는 책을 읽는 거라기에 편하고 좋은 일을 하는구나.

나에게도 도움이 되고 이득이네.

뭐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고 느끼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우! 이게 다 뭐야! 너무 노가다잖아.’

한 책에 관한 평가 검토서.

하루에 한 권 읽기도 벅찬데 다른 사람들 편집과 교열을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속독으로 끝내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수정 작업을 요청하기까지.

족집게처럼 척척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이러려고 지원한 게 아니었는데.’

김병수는 옆에 책상에 앉아 있는 서수현을 보았다.

자신과 같은 굴레에 빠진 사람.

사실 KI 미디어에 지원한 것은 모두 서수현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관심이 있었다.

아니, 좋아한다.

‘잘 안 넘어온단 말이지.’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장점은 한 번 찍은 건 열 번을 찍는 우직함.

소처럼 일하는 노력가.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언제나 잃지 않는 자신감.

이렇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했을 때 어느 남자에게나 꿀리지 않았다.

외모는 최상은 아니더라고 이 정도면 준수하다고 생각한다.

‘아, 이럴 때가 아닌데.’

뭔가 빨리 끝내고 옆에서 서수현을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이게 쉽지 않다.

일단 책이 영어로 되어 있다는 점.

그래서 읽는 속도가 한국어를 읽는 것보다 늦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검토서도 써야 하긴 하는데.’

옆에 있는 서수현이 끙끙거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검토서를 빨리 써서 도와주러 가야겠다.

김병수의 손이 빨라졌다.

이 책의 줄거리, 등장인물, 느낀 점.

마지막으로.

[번역하면 한국에 통할 거 같다.]

이렇게 마무리한 김병수가 파일을 저장하고 메일로 직원에게 보냈다.

띠딩.

메일을 받은 직원은 이번 KI 미디어의 대리.

최근까지 많이 바빴다가 요즘에서야 여유롭게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이미 쌓이고 있는 법.

배출하지 못한 스트레스에 신경은 예민해져 있다.

대리가 이번에 학생이 한 검토서가 어떤 건지 파일을 열어 보았다.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심보였다.

솔직히 이시혁의 일에는 관여치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털릴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김병수는 달랐다.

초보 중의 초보.

달칵.

“흠. 별로네.”

두세 줄 읽다가 빠르게 스윽 훑어보고 그냥 휴지통으로 보내 버렸다.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김병수에게 다가갔다.

“보고서 바로 휴지통에 버렸다. 혹시 왜일 것 같아?”

“네? 아. 너무 이상했나요?”

“어. 많이 이상해. 너, 느낀 점도 하나도 설득이 안 되더라.”

“아, 죄송합니다.”

김병수는 솔직히 이런 말을 듣는 게 쪽팔렸다.

서수현의 앞에서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들은 거니까.

“죄송은 됐고. 검토서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야. 보통 바쁜 편집자가 검토서를 쓰지는 않거든. 사람 시켜서 알바로 맡길 때도 많아. 잘 봐.”

대리가 김병수의 글을 짚어 주었다.

“먼저 줄거리를 적은 건 잘했어. 하지만 등장인물을 적을 때 이 인물은 어떻다고 명확하게 표현했어야지.”

명쾌한 내용이어야 검토서가 의미가 있다.

한눈에 알 수 있는 내용.

하지만 김병수가 적은 것은 검토서라고 불릴 수 없었다.

“이러면 실제 알바를 했을 때도 돈을 못 받아. 보통 10~15만 원 하거든.”

“정말 많이 주네요.”

“근데 이게 쉬운 게 아니지. 선점 안 된 책을 골라야 하니까.”

“아…….”

“너희에게 준 것은 선점이 안 된 책이야. 그리고 책의 장단점은 지적하는 건 좋은데 느낀 점은 필요 없어. 팔릴지 안 팔릴지는 우리가 회의를 통해 판단하는 거고.”

대리가 김병수를 보며 사납게 웃었다.

잘 걸렸다는 얼굴이었다.

대리의 말이 점점 속사포같이 나오고 김병수의 멘탈은 탈탈 털렸다.

옆에서 보고 있는 서수현이 불쌍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때 시혁이 서수현의 뒤에 왔다.

“잘돼 가?”

“네? 아. 검토서 쓰는 게 쉽지 않네요.”

“좀 도와줄게. 어디 보자. 응. 잘 정리된 거 같은데 여기서 좀 추가했으면 하는 게…….”

김병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 역할은 내가 해야 하는데!’

하지만 현실은 능력이 부족하고 대리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어야 했다.

“자! 여기 잘 정리된 보고서. 이런 식으로 하면 감이 잡힐 거야. 하하. 뭘 기죽고 그래. 크흠. 다 너 생각해서 해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란 말이야.”

피는 뺨에 흘렀고, 몸에 있는 살은 바사삭 부서져 버렸다.

‘이시혁…….’

김병수는 질투심을 불태웠다.

이시혁이 김병수를 힐끗 보았다.

“병수야 도와줄까?”

“아니!”

김병수는 갑자기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눈과 다르게 이시혁의 눈은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저게 더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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