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흔히 과대라고 하면 각 학년 중에 대표다.
보통 단체 톡방에 공지를 많이 올리며 그에 따라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밝은 분위기를 위해서 이모티콘을 많이 쓰는 건 당연했다.
물론 전부 그런 것은 아니고.
3학년 과대인 서수현은 임티 부자로 유명했다.
그녀가 쓰면 꼭 따라 쓰는 사람이 발생할 정도.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
최소 셋이서 계속 쓰게 되면 다른 사람도 감화가 되어 ‘나도 한번 사볼까?’라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미 3학년 톡방에는 두 명이 쓰고 있었다.
나와 서수현이.
-서수현 : 여름에 현장실습 신청한 사람은 모두 305호실로 3시까지 모여 주세요.
현장실습은 여름과 겨울로 나뉘어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굳이 선택을 안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걸 선택하면 무려 전공필수 한두 과목 정도는 안 들어도 되는 대체 학점이 따라온다.
‘어떤 기업들이 강제로 참여했을까?’
사실 일하느라 귀찮은데 학생까지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건 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그냥 부려 먹는 맛이 있긴 하겠지만.’
실제로 막상 가면 잡일을 많이 한다.
과제를 주는 경우도 있고.
다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그에 대해서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혹시 시하를 데려가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방학 기간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하랑 함께 갈 수 있는 곳.
미리 나를 선점하고 제안한 곳.
바로 KI 미디어였다.
‘일단 답장은 해야지.’
나는 ‘ㅇㅇ’를 보냈다.
다들 본 모양인지 하나둘씩 대답은 잘했다.
-서수현 : (고마어~ 페페 이모티콘)
-이시혁 : (끄덕끄덕 페페 이모티콘)
이렇게 자주 쓰면 아닌 척하면서 조금씩 사게 되겠지.
원래 익숙해지면 무서운 법이다.
나는 그렇게 톡을 끝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시가 되었다.
“나만 빼고 벌써 다 와 있네?”
나는 서수현에게 다가갔다.
서수현이 폰을 보다가 황급히 끄고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아, 오빠. 다들 10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기업체를 골라야 하잖아요. 정해진 인원도 있으니.”
“그렇지.”
“과사 언니가 저보고 정해서 넘겨주래요.”
“그래? 그럼 시작하면 되겠네. 그런데 아까 뭔데 그렇게 숨겼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숨기긴 뭘 숨겨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흠흠. 그럼 시작할게요.”
서수현이 칠판 앞으로 나갔다.
보드마카로 기업체명을 쓰기 시작했다.
방송국, KI 미디어, 멜츠, 연구소 등등.
다양한 기업들이 있었다.
내가 선택할 건 한 가지지만.
‘멜츠가 있는 걸 보니 도환이 형이 힘내긴 했네.’
설마 저기에 협력이 통할 줄이야.
혹시 내 덕분인가? 에이. 설마.
그런 것보다 나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KI 미디어랑 이미 이야기를 나눈 상태였으니까.
나를 콕 집어서 넣는 조건이었으니.
“그럼 모두 원하는 곳을 골라주세요. 자리가 넘치면 가위바위보로 정하세요.”
서수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오빠. 오빠는 KI 미디어로 갈 거죠?”
“어. 사실 올 필요 없는데 누구랑 갈 수 있을지 궁금해서 온 거야.”
“그래요? 그럼 나도 KI 미디어로 가야겠다.”
“왜? 너는 방송국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르지만, 나중에 동영상을 찍을 때 방송국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오빠랑 있으면 잡일 같은 거 덜 시킬 거 같아서요. 조금 의미 있는 레포트를 쓸지도 모르고.”
“응. 그럴지도 모르지.”
예측은 틀릴 것이다.
아마 일을 하게 될 거다.
그것도 빡시게.
KI 미디어에 안 가본 지 오래되긴 했는데 그곳 사람들의 다크서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래 영상만 찍을 건 아니라서.”
“다른 영상도 찍게?”
“재밌으면 어떤 것도 도전해 봐야죠. 일단 구독자들을 늘리는 게 중요하니까. 혹시 또 다른 재능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좋은 도전 정신이었다.
나는 기특하다는 듯이 서수현을 보았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조언을 해줘야겠다.
“개구리 잡는 방송은 어때? 황소개구리가 개구리를 잡다!”
“갑자기 개구리는 왜요?”
“네가 황소개구리. 잡는 건 청개구리.”
서수현이 나를 째려보았다.
“농담이야.”
“맨날 나만 놀린다니까.”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그만. 황소는 좀 심했고 미녀 개구리는 어때?”
“개구리에서 좀 벗어나 주시죠?”
“그럼 개구리와 함께 노래 불렀습니다. 이건 어때?”
“이 오빠가 진짜!”
나는 여기까지 하고 뒤로 물러섰다.
서수현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오빠. 나 그래도 댓글에 예쁘다고 난리 나거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서수현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한 번 넘기더니 폰을 보여 주었다.
“사실 몇 번 찍어서 올렸어요.”
“오! 그래? 왜 말 안 해 줬어? 내가 구독할게.”
“그냥 아는 사람에게 소문나는 건 좀 부끄러워서…….”
“잘 아네.”
“아, 오빠!”
나는 [슈] 채널에 구독을 누르고 서수현을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있어도 돼? KI 미디어 갈 거라면서.”
“이미 우리 둘은 미리 채웠어요.”
“누구 마음대로?”
“과대 맘대로요.”
역시 권력이 좋긴 하구나?
근데 딱 보니까 KI 미디어가 인기가 없네.
다들 다크서클의 기운을 느끼나 보다.
어느 정도 다 정해지고 남은 한 사람이 다가왔다.
온 사람은 전에 서수현에게 치근덕거렸던 과 동기.
이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김병수였지? 아마?’
김병수가 다가와서 웃음을 보였다.
“와. 너희랑 같은 곳이야. 이거 팀 운은 좋은데? 사실 여기 가기 싫었는데 너희랑 다니면 좋아질 거 같아.”
이거 참. 뻔뻔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서수현이 얼굴을 구겼다.
응. 현장실습 참 재밌겠네.
***
-어린이집.
시하는 오늘 펭귄 가방에서 태블릿을 들고 왔다.
페페 이모티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승준! 하나! 이거!”
시하가 형아의 톡으로 페페 이모티콘을 마구 보냈다.
승준과 하나도 그걸 보며 눈을 반짝였다.
“와! 대박!”
“와! 펭귄!”
승준이 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시하야. 나도 해 봐도 돼?”
“아아. 이거 시하 그림.”
“어? 진짜!”
“아아.”
승준이 페페티콘을 마구 클릭했다.
점점 올라가는 페페티콘.
귀여운 그림이 쌍둥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빠! 하나도, 하나도 해 볼래!”
“그래.”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모티콘을 톡톡 올렸다.
그걸 발견한 선생님이 태블릿을 잡았다.
“자, 이건 집에서 갖고 놀아요. 알았죠?”
승준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가지고 놀 거야! 그치 시하야?”
“아아!”
“하나도. 하나도!”
하지만 선생님은 고단수였다.
아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돌리는지 눈을 감고 할 수 있는 수준.
“그럼 시하야. 이거 여기서 계속하면 형아가 싫어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
“아냐! 형아. 시하 조아해.”
시무룩.
시하는 형아가 자신을 싫어하는 걸 상상했는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실의에 빠졌다.
“이거 안 하면 형아가 시하를 싫어하지 않아요. 집에서 갖고 놀자. 알았지?”
“아아.”
끄덕끄덕.
시하는 태블릿을 받아서 펭귄 가방에 넣었다.
오늘따라 묵직해진 펭귄 가방이었다.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승준과 하나를 보았다.
“이거 어린이집에서 하면 눈이 나빠져서 안 돼요. 나중에 엄마 얼굴 못 보게 된다?”
“아, 안 돼!”
“하나는 엄마 볼 거야!”
두 사람도 클리어.
완벽한 수행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준이 그런 선생님을 보다가 시하의 손을 잡고 끌고 왔다.
“선생님 못된 말만 해. 악당이야.”
“마자. 악당이야.”
“아아!”
시하도 거기에 동감했다.
그렇게 시작된 히어로 놀이.
“못된 악당을 물리쳐야 해!”
“마자!”
“아아!”
선생님이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도망치기로 했다.
아이들이 도망치는 선생님을 쫓아갔다.
하지만 발 빠른 선생님을 잡을 수 없었다.
“빨라! 너무 빨라!”
“하나 힘들어. 인제 그만할래.”
“아아.”
지친 아이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걸 본 선생님이 웃으며 셋에게 다가갔다.
“그럼 히어로 놀이 말고 같이 이모티콘 만들까?”
승준과 하나도 관심이 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나도 만들고 싶어!”
“시하도!”
이번에 이모티콘 맛을 봐 버린 시하도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이 걸려들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활발한 아이들과 노는 것은 굉장히 체력 소모가 큰일이었다.
가끔 이렇게 그림 그리는 것으로 체력을 쉬어 주는 타이밍도 만들 줄 알아야 했다.
“그럼 생각나는 친구들을 동물로 그려볼까요?”
선생님이 생각하기에도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어린이집 선생님이란 이런 그림에도 친구들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시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누구를 그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누구 그릴 거야?”
“아?”
시하는 고민을 하다가 종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아! 종수!”
“응? 나 안 그려?”
“아아.”
시하는 종수를 그리기로 했다.
종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척을 했다.
“하하. 드디어 내가 잘생겼다는 걸 알았구나?”
“아냐.”
“거짓말하고 있네. 야. 승준. 나는 너 그려줄게.”
승준이 종수의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하나야. 오빠 그려라.”
“응? 시러. 하나는 시혀기 오빠 그릴 거야.”
승준이 살며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럼 나는 시하 그릴래.”
“아아.”
결국, 승준이 택한 건 시하였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씩 선택해서 친구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하나를 딱히 제지하지 않은 건 하나의 고집은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타깝기도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었으니까.
아니, 풋사랑이었다.
아니, 씨앗 사랑일지도.
그렇게 다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하나씩 완성을 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그럼 승준이부터 말해 줄래? 이건 누구를 그린 그림이에요?”
“응! 이건 시하야! 시하 보면 강아지 떠올라서 강아지 그렸어!”
승준 나름대로 귀엽게 그린 강아지 그림이었다.
그런데 강아지의 머리가 바가지 머리였다.
시하의 머리 포인트를 준 것이다.
“다음은 하나가 말해 볼까?”
“응! 하나는 시혀기 오빠 그려써. 하나도 강아지야.”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그림이 똑같다.
바가지 머리인 것까지.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강아지 머리 위에 왕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다음은 종수가 해 볼래?”
“네! 난 승준을 그렸어. 이건 ‘말’이야. 내가 타고 다닐 거야.”
승준이 반응했다.
“야!”
“왜!”
선생님이 둘을 진정시켰다.
이러다가 돈독해지기보다는 싸움이 날지도 모르겠다.
“승준아. 말은 엄청 빠르잖아. 아마 승준이 선생님만큼 컸으면 따라잡혔을 거야.”
승준이 선생님 말씀에 진정이 되는지 자리에 앉았다.
종수가 의기양양하게 턱하고 앉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하 그림을 친구들에게 보여줄래?”
“아아!”
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당하게 그림을 펼쳤다.
아이들이 시하의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와! 시하 그림 잘 그린다!”
“귀여워!”
“어머. 진짜 잘 그리네.”
종수도 귀여운 그림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시하가 자신을 이렇게 잘 그릴지 몰랐으니까.
시하는 그런 종수를 보며 그림을 설명했다.
“아아. 종수! 양!”
“종수가 양이야? 정말 귀엽게 그렸네.”
“아아. 양!”
“그런데 왜 양이야?”
“양아…. 읍. 아냐.”
시하는 입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아가 ‘양아치’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으응?”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수. 나빠.”
종수가 발끈했다.
“내가 뭐!”
그때 승준이 알았다는 듯이 희희낙락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양치기 소년이다! 하하하! 양치기 소년이래요!”
“아아.”
끄덕끄덕.
시하는 양치기 소년을 알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착한 어린이가 아니다.
실제로 장난꾸러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시하가 보기에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오늘도 승준이를 화나게 했으니까.
선생님은 생각했다.
‘사이 돈독은 무슨. 아 망했네…….’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친하지 않은 그룹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