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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8/500)

68화

최마준은 이시혁을 처음 봤을 때 어리다고 생각했다.

어려도 너무 어려 보였다.

보통 통역사로 시작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20대 중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이었으니까.

‘뭐지? 백으로 들어왔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렵게 면접을 보고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한 자신.

그런데 누군 이렇게 좋은 백을 얻어서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를 순진한 얼굴을 하고 여기 앉아있다.

솔직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아득바득 인맥을 얻으려고 하는데 누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얻어 있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시혁이라는 청년은 금수저인 거 같았다.

‘그래도 대학은 내가 더 나아.’

대한민국에서 강인대학교도 꽤 이름을 알아주는 인서울 대학이지만 한국대 명성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존감을 살리기 위해 살살 돌려서 이시혁에게 말했다.

스스로 만든 스펙, 인맥, 그리고 우위에 있다는 조언까지.

역시 기가 죽었는지 점점 오가는 대화가 적어졌다.

마지막에는.

“그렇네요. 이제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통역해야 해서.”

이렇게 피하기까지 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 좀 해줬다고 이렇게 아파하는 놈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

딱 이런 수준이었다.

최마준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그 말에 답하고는 집중했다.

이번 일을 위해 자신은 노력해 왔다.

남들 다 가는 유학도 갔다 왔고, 기회도 잡았다.

앞으로 이 경력 한 줄이 스펙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도 준비해 볼까?’

헤드셋을 끼고 마이크를 입에 가까이 댔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

순차통역.

한두 문장을 말을 하고 나면 발표자가 일부러 한 번 쉬어준다.

통역에 관한 배려.

회의는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데 발표자에서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통역이라는 것이 그저 그 나라의 언어만 잘해서는 안 된다.

‘그들만이 쓰는 표현도 많고.’

아무리 정식 명칭이 있더라도 막상 현장에 나가 보면 줄이거나 다른 말로 쓰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이런 회의 석상에서는 최대한 자제하겠지만 그래도 튀어나오는 언어는 어쩔 수 없다.

‘이래서 통역은 지식이 많아야 해.’

신입사원처럼 누군가 회사에 들어와서 일하며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다.

경력 사원처럼 현장에 바로 투입되어 통역을 해 줘야 하는 역할.

아무리 공부해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회의에서 무사히 순차통역을 하는 것은 대단히 개인적인 역량이 필요했다.

동시통역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우리 멜츠의 세이프티 기술이 들어가 있습니다. ESP나 ECU를 더욱 발전시켜서…….”

나는 거기 있는 말을 그대로 언어로 전달해 주었다.

간단히 말해서 충돌 위험성이 있을 때 센서에서 판단해 자체적으로 탑승자의 몸을 단단히 고정한다.

미리 충돌에 대비하는 시스템.

과연 안전을 챙기는 멜츠는 이런 센서의 민감한 부분에서 강점이 드러난다.

‘굉장히 쉽네.’

입에서 거침없이 독일어가 나왔다.

또박또박 말하며 정확한 정보를 전달했다.

가끔 분위기를 전환할 겸 말하는 유머 역시 목소리를 살짝 바꿔 그 뉘앙스를 전달시켰다.

저번에 성우로 녹음할 때 썼던 변성.

이런 부분까지 챙기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냥 해 봤다.

저번 경험으로 오디오북에 관해 꽤 관심이 생겨서 비슷하게 해 본 것이다.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하다 보니 여유가 생기네?’

처음이다 보니 살짝 긴장했는데 통역을 해 주면서 주위를 둘러볼 정도가 되었다.

많이 둘러본 건 아니고 최마준이 얼마나 잘하는지 궁금했다.

‘흐음?’

그렇게 자랑한 것치고는 많이 버벅대는 것 같다.

귀로 들리지 않았지만 당황하는 모습과 입술 모양만으로 알 수 있었다.

‘뭐야. 잘하는 거 아니었어?’

독일에서 살다 온 경험이 어디서 발휘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나는 이내 관심을 꺼버리고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저 사람이 맡은 독일인들이 불쌍하네.’

그렇게 약 두 시간.

나는 실력 자랑을 좀 했다.

회의가 끝나자 기지개를 켰다.

그런 뒤 회의실에서 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살짝 굳어 있는 사람들이 반.

만족스러운 얼굴인 사람이 반.

그중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통역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센스가 넘치던데요? 앞에서 웃는데 통역하시는 분이 재빨리 말해 주셔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하.」

「사실 제가 좀 더 익살스럽게 표현했어요.」

「그래서 회의 분위기가 좀 더 괜찮았던 거 같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에게 엄지를 올려주길래 나도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서로 간의 제스처로 커뮤니케이션을 나눴다.

반면에 옆에 있던 최마준은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리고 별로 안 좋은 소리 역시 들렸다.

「통역을 대체 누가 뽑은 거야?!」

「나 참. 피피티가 있었으니까 알아들었지…….」

「전문용어 몇 개 빼먹던데. 난 무슨 소리인가 했다.」

「거참. 통역사도 잘못 걸려서.」

「사람이 많았잖아.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러니까! 저기 다른 사람들은 재밌는 말에 빵빵 터지던데?」

「어떤 유머인지 옆에 사람에게 물어봤잖아. 왜 이렇게 딱딱하게 하는 거야.」

「통역이 그렇지. 뭐.」

「그럼 저 옆에 통역사는 뭔데?」

다들 최마준 통역에 대한 불만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듣던 최마준의 얼굴이 붉게 물들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면접에서는 좋아도 막상 실전에서 힘을 못 쓸 때도 많다.

특히 이런 회의 석상에서는 말이다.

보통 경영 쪽 회의는 조금 수월하겠지만 이런 전문적인 기술이 들어가는 회의는 미리 공부해도 쉽지 않다.

‘다음에 못 보려나?’

통역사는 계약직이자 프리랜서.

그 능력이 못 미치면 잘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대충 들어보니 실수가 좀 잦은 것뿐 대략적인 내용은 다 알아들었나 보다.

이게 바로 피피티의 힘인가?

나는 옆에 있는 최마준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수고했습니다.”

“아, 네.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소개는 못 해 드리겠네요.”

“네?”

“반응 보니까 정말 정말 잘하시지는 못한 거 같아서.”

“아, 네. 그러네요.”

“저도 실력으로 소개받은 거거든요. 그럼 다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나요.”

내가 그렇게 가려고 할 때 최마준이 뒤에서 말했다.

“이쪽 업계에 백이 있어서 이래저래 들은 거 많으시다 보니 잘 통역하셨나 보네요.”

나는 뒤를 돌아서 최마준을 보았다.

“백이 있다고 현장 지식까지 있는 건 아니죠. 그것도 최신 기술인데.”

“그건…….”

“뭔가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 여기는 실력이 다예요. 백이 있건 없건. 전 실력이 있어서 칭찬을 들었고 당신은 실력이 부족해서 비판을 들었고. 오케이?”

최마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 못 하겠다는 모습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뭔가 저를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로 보는 거 같은데. 맞아요. 세상 물정 잘 몰라요. 사회생활도 얼마 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쪽은 저보다 더 모르는 거 같네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문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하가 보고 싶다.

***

형아를 따라온 시하는 의젓하게 그림을 그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따라온 문도환과 말이다.

멜츠 회사의 1층 카페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회사 여직원들이 시하를 보며 귀엽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니까.

“어머. 아기가 너무 귀여워요.”

“정말 너무 귀엽다. 이름이 뭐예요?”

문도환은 이런 경험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시하의 이름을 말해 줬다.

“이름이 시하구나? 시하 몇 살?”

“아아.”

시하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다들 그것마저 귀엽다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애가 너무 귀여워요. 아들이 이렇게 귀여워서 좋으시겠어요.”

문도환이 허허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오해를 사게 하면 기회는 없을 것이다.

“사실 친구 동생을 맡은 거라. 제 애는 아닙니다. 저 아직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거든요.”

여자 쪽에서는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그녀들이 말했다.

“아,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이런 동생이 있으면 좋겠네요.”

“맞아요. 와. 아기가 벌써 그림도 그릴 줄 알아요? 대단하다!”

“이모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보여주면 안 돼?”

두 여성이 그렇게 말하자 시하가 태블릿을 꼭 끌어안았다.

도리도리.

완강한 거절이었다.

두 여성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문도환이 살며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같은 테이블에서 커피나 마실까요? 시하도 누나들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하하. 누나는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데…….”

“에이. 저도 시하에게 형아라고 불립니다.”

그녀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자리를 옮겼다.

옆 테이블로 옮긴 것뿐이지만.

그게 문도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별로였으면 거절했을 테니까.

그렇게 네 사람이 이야기를 꽃피웠다.

물론 그녀들의 시선은 시하에게 꽂혀 있었지만.

“시하야. 그림 잘 그려?”

“아까 이모들이 살짝 봤는데 엄청 귀여운 그림 그리던데? 그거 뭐야?”

시하가 그녀들을 힐끗 보다가 살며시 말해 주었다.

“페페.”

시하가 그리고 있던 것은 펭귄 그림.

카페에 왔으니 커피를 마시는 걸 그리고 있었다.

문도환이 기회라는 듯이 설명했다.

“페페가 사실 시하가 만든 펭귄 애칭이거든요.”

“진짜 귀엽네요. 애칭이라니.”

“그렇죠? 시하가 이런 이름 붙이기를 잘한다니까요.”

그때 시하가 문도환을 봤다.

“문도.”

“보세요. 저에게 문도라고 애칭도 만들어 줬거든요. 혹시 롤 아시나요? 거기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이 문도인데…….”

문도환은 시하의 나이스 어시스트를 날름 받아먹었다.

그녀들도 문도라는 캐릭터를 잘 아는 듯했다.

롤을 해 봤다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더 분위기를 띄울 수밖에 없지.

‘나는 저 여성분이 마음에 드는데.’

정장을 입고 짧게 숏컷을 한 그녀.

시니컬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해 주고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여친을 만들 기회가 아닐까?

남자는 못 먹어도 고다.

그런 자신감을 장착하고 문도환이 입을 열었다.

“롤에 이즈리얼 아세요?”

“네? 이즈리얼이요?”

“노란 머리에 원딜 쓰는 캐릭터요.”

“아! 알아요.”

“이즈리얼이 사는 데가 어딘지 아세요?”

“어딘데요?”

“평택시 ‘비전 2동’.”

“…….”

이즈리얼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스킬 이름인 ‘비전 이동’을 말하자 반응은 싸늘했다.

아까와 같은 순풍이 부는 분위기는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어색하게 빨대만 매만지는 사람뿐.

문도환이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때 시하는 문도를 힐끗 봤다.

문도의 저 표정은 실제로 많이 보았다.

젤리 장난감을 바닥으로 패대기칠 때 나왔던 얼굴.

그때와 닮아 있었다.

형아는 저렇게 얼굴을 찌푸리면 못생긴 얼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하가 말했다.

“문도! 몬생겨!”

그 말에 그녀들이 ‘풋.’ 하고 웃음을 보였다.

진짜 딱딱한 문도환의 표정이 못생겼으니까.

시하는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올렸다.

“아아. 문도. 우서!”

“으응. 웃을게. 이러면 됐지?”

문도가 어색하게 웃었다.

시하의 눈에는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머릿속에 혼란이 왔다.

“아? 몬생겨?”

그 말에 여성들이 한 번 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었는데 왜 못생겼지?’라고 들렸으니까.

물론 시하가 말한 것은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라는 의미였다.

“시하야.”

그때 시혁이 시하를 부르며 등장했다.

“형아!”

시하가 두 팔을 벌리며 시혁을 환영했다.

시혁이 살며시 눈웃음을 치며 시하를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형제간의 포옹이 너무 예뻤으니까.

문도환은 그녀들의 표정을 보며 다른 생각을 했다.

‘역시 답은 얼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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