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500)

67화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바지가 너무 찝찝했다.

그래도 시하가 너무 귀여워서 즐거운 추억 하나 쌓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려 했다.

사진 찍는다는 말에 서수현이 어이없어했지만 이런 것도 나중에 다 웃고 떠들 수 있는 추억이다.

“자. 다들 젖은 바지 내밀어!”

“아아!”

찰칵.

우리 셋은 젖은 부분이 선명하게 나오도록 하체만 찍었다.

물론 시하는 키가 작아서 전신이 다 나왔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보니 굉장히 웃겼다.

벌써 사진을 보며 떠들고 놀 수 있을 것 같다.

“오빠. 이 사진 나에게도 보내줘요.”

“알겠어.”

“아아. 형아. 시하도.”

“시하는 폰이 없잖아.”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중간에 서수현과도 웃으면서 헤어졌다.

“형아!”

“응?”

시하가 하늘을 가리켰다.

어느새 구름이 물러가고 살며시 푸른색이 보였다.

신기한 건 다른 색도 보였다는 점.

“무지개네? 시하야. 저건 무지개라고 하는 거야.”

“아아!”

빨주노초파남보.

이게 보통 무지개 색깔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색이 보이지는 않았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잘 보이는 색은 저 세 개뿐이었지만 하여튼 예뻤다.

“진짜 예쁘다. 그치?”

“아아. 무지개.”

“응. 무지개.”

오늘 이렇게 무지개도 보고 좋은 하루인 것 같다.

이럴 게 아니라 시하랑 무지개를 같이 찍어야겠다.

“시하야. 무지개랑 같이 찍자!”

“아아.”

나는 카메라를 완전히 내려서 시하와 무지개를 함께 찍었다.

그 와중에 손을 높이 들고 브이 자를 해서 무지개가 시하의 손가락에 ‘쿡’ 하고 찔렸다.

이것도 나중에 보면 재밌을 거 같다.

“시하야. 나중에 사진 뽑아서 앨범에 붙이자. 알았지?”

“애버?”

“응. 앨범. 사진을 보관하는 곳이야.”

요즘 외장 하드에 보관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앨범에 사진을 보관하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도 있는데 아빠와 함께 찍은 것을 보면 옛날 추억이 새록새록 나는 것 같다.

집에서 컴퓨터를 보면서 사진 볼 일은 거의 없으니까.

괜히 청소하다가 한 번씩 보면 그게 또 재밌단 말이지.

“집에 가면 보여줄게. 시하 사진도 있어.”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펭귄 비옷을 입고 들어가려고 하길래 시하를 잡았다.

“일단 비옷은 벗고 들어가자.”

“아아.”

비옷을 벗기고 장화를 벗기니 발도 다 젖어있었다.

“잠깐 여기 있어. 형아가 수건 가져올게.”

“아아.”

대답만 잘하고 화장실까지 내 뒤를 따라오는 시하.

“악! 바닥에 물!”

“형아도!”

사실 내 발도 이미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똑똑한데?

“뭐, 어차피 닦아야 하긴 했는데. 그럼 시하야. 샤워하고 여기 시하가 닦아줄래?”

“아아.”

시하가 열심히 바닥을 닦는 상상을 했는데 너무 귀여울 것 같았다.

피식 웃은 나는 뒷주머니에서 폰을 들었다.

리암에게 톡이 와 있었다.

***

-멜츠 회의실.

모터쇼를 위한 웬만한 준비는 다 갖춰졌다.

하지만 리암은 여기에 대해 조그마한 불만이 있었다.

불만이라기보다는 좀 더 튀는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번 모터쇼에서 확실히 보여줄 어떠한 연출.

오늘은 그걸 위한 회의였다.

“다들 알다시피 요새 모터쇼에 참가하는 회사가 적어졌습니다.”

“맞습니다. 이번에 꽤 참여가 저조하더군요.”

“맞아요. 별로 참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죠. 요즘 광고할 게 굉장히 넘쳐나니까. 방송이 다양해진 건 물론이고 개인방송까지 말이죠.”

실제로 모터쇼에 참여하는 외국계 기업이 적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기업들의 기회일 수도 있지만 리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멜츠 역시도 이번 모터쇼를 끝으로 빠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묘책을 발휘하지 않으면 주최 측은 쫄딱 망하게 되겠지.’

모터쇼에 나갈 수 있는 비용도 장난 아니라서 묘책을 내놓지 않으면 털털 빈 행사 공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보여줄 생각입니다. 피날레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럼 다음번에 참여 안 할 생각입니까?”

“거의 그렇다고 봐야죠. 트렌드를 못 따라가고 계속 같은 것만 고수한다면요.”

리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내년에 생각할 문제고 그럼 이번 모터쇼에 필요한 것은 무언가 크게 각인될 만한 연출입니다.”

“으음.”

다들 신음을 내었다.

평소대로 한다면 분명 욕을 먹을 게 뻔했으니까.

리암 역시도 뾰족하게 더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이 없는지 폰을 매만졌다.

그때 어떤 톡이 와서 잠시 쳐다보았다.

그건 시혁에게 온 톡이었다.

안부 인사 같은 거였는데 거기에 사진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재미난 이야기와 함께.

“프흡!”

잠깐의 웃음소리에 다들 쳐다보았지만 리암은 손을 들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다들 이 사진을 보겠습니까?”

화면에 띄워진 사진은 시혁, 시하, 서수현의 바지가 젖어 있는 모습이었다.

다들 시하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보였다.

딱딱해진 분위기가 다소 따뜻하게 풀렸다.

“제가 고용한 통역사가 재미난 사진을 보내왔네요. 버스의 빗물에 튀어서 저렇게 되었다고요.”

“하하하. 정말 귀엽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재미난 말도 보내왔더라고요.”

“네?”

“그래도 버스가 미끄러져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이렇게 보내왔습니다.”

리암의 말에 다들 뭔가 알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전 저 말로 하나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응급상황일 때 구급차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확히 가야 하죠. 빗길과 눈길에 의해 차가 미끄러지거나 흔들릴 때도 많겠죠.”

“그렇죠.”

“이번에 배터리와 승차감 센서에 집중했으니 거기를 노려서 아이와 부모에 관한 이야기로 연출을 꾸미는 건 어떨까요?.”

“원래 안전성 이미지도 있으니 함께 광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렇죠. 문제는 그걸 이제 구급차가 아니라 일반 차로 어떻게 보이는 게 좋을지…….”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지자 여러 의견이 나왔다.

리암은 이런 힌트를 준 시혁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또 호기심이 생겼다.

시혁이라면 어떤 의견을 낼까?

그런 호기심.

“제가 고용한 통역사의 의견도 들어보죠.”

전화를 걸자마자 곧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시혁 씨?”

「아아. 리암!」

“응? 아! 시하군요.”

시하가 리암의 이름을 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기였으니까.

「음. 거기 시혁 씨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아니지. 음. 한국어가…….」

리암이 살짝 고민하다가 이번에 어떤 친구에게 배운 한국어를 말했다.

이거면 모든 언어를 아우를 수 있는 마법의 언어라고 했다.

「마!」

「아아.」

「마! 시혁! 마! 마!」

「아아!」

그때 시혁의 목소리가 들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리암. 무슨 일이에요?”

“오! 역시. 시혁. 별거 아니고 의견 좀 물어보고 싶어서요.”

참고로 리암이 만난 사람은 부산 사람이라고 했다.

역시 ‘마!’는 통한 게 틀림이 없었다.

시혁이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리암은 지금까지 이런 의견이 나왔는데 시혁이라면 어떤 의견이 있냐고 물었다.

“저라면 영상을 보여주지 않을까요? 임산부가 배가 아픈데 남편이 재빨리 운전하는 그런 모습? 그것도 멜츠차로요.”

아주 좋은 의견에 리암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모터쇼를 위한 마지막 회의.

이번에는 한국, 독일 사람 모두 회의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이번 모터쇼에 관한 리허설도 겸했다.

그걸 위해서 오늘 회의를 통역하려고 한다.

이런 통역은 시간당 수당이라서 그리 비싸지만은 않았다.

가장 알짜배기가 되는 것은 동시통역.

‘그래도 다른 통역사를 볼 수 있어서 좋네.’

오늘 회의에 통역하는 게 기대가 된다.

기다리고 있는 도중에 옆에 사람의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 통역하시나 봐요?”

“네. 순차 통역은 처음이네요. 늘 동시통역만 해서.”

“아, 그러시구나. 젊으신데 경력이 꽤 되시나 봐요? 면접에서도 못 본 분 같은데…….”

뭔가 말에 날이 서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경력이야 좀 많이 짧죠.”

“아, 그래요? 저는 독일에 한 3년 살다 왔어요. 한국에서 통번역대학원도 나왔고.”

“아…. 그러시구나. 독일어 잘하시는구나.”

“좀. 하죠. 그러니 뽑혔고요. 근데 몇 살이세요? 많이 젊으신 거 같은데.”

“아 23살이요.”

“헐? 그럼 아직 대학생 아니에요?”

“네. 맞아요.”

“흐음.”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대충 입 모양만 봤는데 ‘백이 좋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독심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들은 건 아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솔직히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어찌어찌 소개받은 건 맞다.

그가 말했다.

“아무튼, 반가워요. 저는 최마준이라고 해요.”

“아, 네. 이시혁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면접으로 엄청 힘들게 들어왔는데. 저 정말 잘할 생각이에요.”

“그러시구나…. 저도 열심히 하려고요.”

최마준이 준비된 물을 살며시 마시고 입을 축였다.

“그런데 어디 학교 다녀요?”

“아, 저 강인대학교예요.”

“강인대학교 좋죠. 저는 한국대에 있는 통번역대학원 나왔거든요.”

“아하.”

“그래서 그런지 인맥 풀이 아주 넓어요. 아시죠? 요즘 대학원 가려면 저명인사 추천인 10명 사인받아야 하는 거.”

“그, 그래요?”

“네. 우리 인맥 쓰려면 너도 가진 인맥 내놓으라는 거죠.”

“그러시구나.”

왜 나는 이 말이 ‘내 인맥 쩔어.’라고 들릴까?

이 사람은 대체 뭐랑 경쟁하는 걸까?

괜히 이 자리가 불편해진다.

대충 받아주면서 이 회의에 집중해 나중에 모터쇼에서 열심히 활약이나 해야겠다.

오늘 회의는 약 2시간.

아마 신나게 말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순차통역은 동시통역보다 재미없을 거 같은데?’

뭔가 둘이서 마주 보고 해 주는 통역이 현장감 넘치고 더 재밌는 거 같다.

어느덧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마준이 나를 보며 말했다.

“긴장 많이 했어요?”

“아니요. 별로요.”

“와. 공부 많이 하시고 왔나 보다. 저도 많이 하긴 했거든요.”

“긴장 많이 하시는 거 같은데…….”

“제가요? 전혀요.”

최마준이 팔을 쫙 벌리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흐음. 그런가?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실례되는 소리 하겠다는 거니까 듣기 싫은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괜히 분란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네. 물어보세요.”

“혹시 여기에 아는 사람 있어요? 소개받고 들어왔다거나?”

“네. 소개받고 들어왔어요.”

“역시! 그럼 나중에 저도 좀 소개해줄 수 있어요?”

“정말 정말 잘하시면 소개해 드릴게요.”

“하하. 제가 못할 리가 없잖아요. 저 독일에 3년 살다 왔어요. 아, 혹시 유학은 다녀오셨어요? 독일이나 그런 데요.”

“아니요. 아직.”

“그러면 꼭 가보세요. 유학이라도 안 가면 조금 그 나라 문화에 대해 아는 게 굉장히 힘들잖아요. 그래서 괜히 통역하는 데 힘들 수도 있고.”

“아, 그렇죠.”

“아직 대학생이시니까 돈 벌어서 방학 때라도 잠깐 다녀오세요.”

오늘따라 내가 예민한가?

왜 이렇게 말끝마다 거슬리는 거 같지?

“그렇네요. 이제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통역해야 해서.”

“아, 그러세요. 저도 좀 봐야겠네요. 몇 번 해 보기도 했고 배우기도 했는데 이런 큰 회의는 처음이라.”

자랑 엄청나게 하는구나…….

나는 겨우 떼어내고 미리 봐둔 자료들을 다시 봤다.

잠시 후.

리암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회의실에 모였다.

스크린 앞에서 발표가 시작되었고.

그와 동시에 통역도 시작되었다.

‘어디 나도 자랑해 볼까?’

실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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