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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3/500)

63화

리암은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라운지에서 비서와 일 얘기를 했다.

“이번 모터쇼에서 통역사를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했잖아.”

“네? 설마 그 시혁이라는 청년이요?”

“이번에 보니까 독일어도 잘하던데? 난 마음에 들었어.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해서 아쉽지만 그건 내일 또 만나기로 했으니까.”

비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인 회사 일이나 통역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모터쇼에서 보여줄 전문적인 이야기는 조금 힘들 수 있습니다.”

“그거야 우리가 건네는 자료를 미리 주면 되는 거고. 다른 통역사들도 다 그러잖아.”

“그래도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건 내일 되어 봐야 아는 거고. 아직 급하지 않으니까.”

“내일 되면 뭐 달라지는 거라도 있습니까?”

리암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대화를 하다 보면 결국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거든. 거기에 말만 번드르르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좋지.”

“좋다고요?”

“그래. 통역가는 사기꾼 기질이 있어야 해. 특히 이런 비즈니스에서 말이야. 유혹하고 또 유혹해야 하지. 그걸 위해 고용하는 거니까.”

“그렇군요.”

비서는 그런 생각은 못 해 봤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생각하는 통역사는 그 의미를 오해 없이 전달해 줄 지식이 있는 실력자를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리암은 거기에 더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긴 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받으려면 몇 번이나 감미롭고 매력적인 말로 꾀어야 한다.

거기에 관한 연출적인 말솜씨가 필수였다.

비서는 그런 리암을 많이 봐왔다.

이번 주재원 대표로 파견된 것도 그런 리암의 영업적 능력을 높이 사서였다.

“그렇군요. 한국에서는 뉘앙스라던가 이런저런 은유의 요구를 전해줄 통역사가 필요하니…….”

“그렇지. 내가 니콜드의 전화를 받자마자 흥미를 느꼈던 게 거기에 있어. 굳이 니콜드가 나서지 않았어도 기회를 따내었잖아.”

“그렇죠.”

“그게 영어로 설득한 거야. 그럼 모국어인 한국어로 하는 설득은 어떻겠냐는 말이지.”

비서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이 중요시하는 건 정확한 전문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미리미리 공부하면 되는 문제니까.

“그럼 내일이 기대되겠습니다?”

“물론. 그런데 오늘 만난 것도 기대 이상이야.”

리암이 재밌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깜찍한 부탁을 해서 안 들어줄 수 없었지.”

“병문안 말입니까?”

“그래. 그게 그냥 나온 부탁이라고 생각해?”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감성에 호소한 설득이었지.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호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내일 대화 좀 해 보며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야겠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와 주면 좋겠는데.”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와서 보면 참 영업력이 상당한 청년인 거 같았다.

그 자리에 없었는데도 꽤 괜찮은 느낌을 받았다.

비서가 말했다.

“영업은 결국 사람 대 사람의 관계다.”

“맞아. 내가 자주 하는 말이지. 만나다 보면 알게 되겠지.”

시혁이 리암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처럼 리암 역시도 시혁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에게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독일인의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취미 하나를 해도 거의 준전문가만큼 하려고 하는 그러한 특성 말이다.

***

-다음 날.

나는 시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강의를 들었다.

그런 다음 남는 시간에 리암을 만나러 갔다.

어제 집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아본 결과 기술이라는 것이 어쩌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의료 번역을 한 아버지.

거기에 관한 최신 기술 자료들은 이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 보면 뒤처진 이론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써 놓은 텍스트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론 기술이 현실에 적용될 시간의 텀은 약 30년. 하지만 현재 과학기술이 빨라지는 것을 보아 그건 20년, 10년으로 단축될 것 같다.]

확실히 장담을 못 하지만 아버지는 준비하고 계셨다.

앞으로 쓰일 모든 것.

앞으로 일할 수 있게 준비해둘 것.

그래서 최신 동향과 기술을 유심히 본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건 번역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다는 점.

‘아버지는 다시 통역 활동을 할 생각이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으면 이런 준비가 말이 되지 않았다.

노트북에 있는 것은 아주 빙산의 일각에 불가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외장 하드가 여러 개인데 거기에 많은 자료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번역일은 돈 벌 수단이자 나중에 통역의 재료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그런 말은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그저 번역만 하려고 한 게 아닌 느낌.

이러한 준비를 꾸준히 하신 것을 보니 내가 다 컸을 무렵 일을 시작하시려고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새어머니와 재혼하고 시하가 태어났어.’

인생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아마 아버지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준비를 열심히 하셨겠지.

‘다른 나라에 가실 생각이셨던 걸까?’

정확히 아버지가 꿈꿨던 미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내가 하고 싶은 게 뭐냐고만 물어봤지, 정작 나는 아버지가 앞으로 뭐 하실 건지 물어보지 못했다.

이러한 자료들과 추측으로 괜히 그게 후회가 된다.

후회는 언제나 늦고, 뒤에는 그 사람이 없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런 후회는 남기지 말자.’

인생을 살아가면서 후회하지 않을 일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시하에게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처 아버지께도 주지 못한 가족애를, 시간을, 마음을.

모두 쏟아내며 살아가자.

그런 결심을 하며 나는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깔끔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찻집이었다.

어디서 이런 곳을 찾았을까?

「안녕하세요. 리암.」

「어서 오시죠.」

「여긴 어떻게 찾으셨어요? 차 좋아하세요?」

「네. 좋아하죠. 좋은 찻집이 있다고 하길래 한번 와봤습니다.」

「그런가요. 하하.」

「요즘 커피를 많이 마셔서 이런 곳이 끌리더라고요.」

「아…. 사람을 많이 만나시니까. 그쵸?」

「나중에 시혁 씨도 이런 곳을 선호할지도 모릅니다.」

「그런가요? 하하.」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맨날 만날 때마다 커피를 마시니 질릴 수도 있겠다.

예전에 취업센터에 손님이 오실 때 커피 말고 냉수를 찾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도 그날 하루 커피가 물린 거겠지.

리암이 미리 시킨 차를 들었다.

「제가 미리 시켜놨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잘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사실 여기에 어떤 차 종류를 시켜야 할지 고민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방금 나왔는지 아직 뜨거웠다.

「어떻습니까? 멜츠에서 보내 준 자료는요.」

「좋던데요.」

「다 이해는 가던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모터쇼에 나갈 자료들도 들어 있던데요?」

「이런. 저희 쪽에서 실수했군요. 그 파일까지 함께 들어 있었습니까?」

「네.」

「그거 죄송합니다.」

나는 눈을 빛냈다.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아마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시험하나?’

그렇다면 아주 재밌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모터쇼에 선보일 생각입니까? 설명도요.」

「왜 그러시죠? 문제 있습니까?」

「뭐 거창한 문제는 아니에요…….」

나는 살며시 말끝을 흐렸다.

리암도 관심이 있는지 내 말을 재촉했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건 아마 전문가를 노리고 만든 것 같더군요.」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택과 집중?」

리암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분명 온 자료에는 선택과 집중이 되어 있었으니까.

차를 팔기 위해 말이다.

하지만.

「리암. 여기에 온 이유가 차만 팔 생각입니까?」

「그건 무슨 말이죠?」

「이왕 판매를 노리는 거면 다른 것도 부각해 노리는 게 좋을 거라는 말입니다.」

나는 패드를 꺼내 자료를 펼쳤다.

그중 한 부분만 가리켜 보였다.

「여기 이 배터리 부분요.」

리암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나 역시도 다른 의미로 눈을 반짝였다.

정확히는 머리에 떠오른 자료들이 나의 뇌를 기분 좋게 자극하고 있었다.

「실리콘 복합 소재로 인한 배터리 부분. 충전되는 과정에서 실리콘이 4배로 부푸는 걸 해결하기 위해 복합 소재로 쓰였죠?」

「거기까지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잘도 알아보셨군요.」

「아마 10년 전에 독일에서 연구했던 걸 가지고 했겠네요. 이것도 섬유 산업이었잖아요.」

전에 의료용품으로 사용했던 나노 코팅 기술의 일부분 역시 들어가 있었다.

즉 이 배터리 부분은 의약 업체에 제공되는 기술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의 향연이 이것을 응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국이 가진 멜츠의 브랜드 이미지는 안전이죠. 현재 배터리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과 전기적으로 mA단위의 센서등을 이용한 부분을 부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래서요?」

「여기 나와 있는 데로라면 차량의 승차감을 높일 서스펜션 부분에 센서가 사용되어 자율적으로 조정되죠.」

「맞습니다.」

「차만 팔 거 아니면 기술도 팔아먹어야죠.」

「하하.」

리암은 살며시 웃었다.

설마 내가 이런 의견을 낼 줄 몰랐다는 듯이.

아마 이 부분 판매 역시도 저기서도 고려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나도 생각했는데 저기서 고려를 안 했을 리가.

리암이 말했다.

「굳이 이 기술만 콕 집은 이유가 있습니까?」

「일단 안전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거기에 맞는 의학 차량 개량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나요? 한국 119 차량은 스타렉스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문제점이 있죠. 한국에서는 차선폭이 좁아서 다른 곳에서 더 큰 차량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흐음.」

「하지만 기술이라면 다르죠. 현직 119 구급차를 끌면서 공통으로 불만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뭡니까?」

「승차감입니다. 어때요? 이러면 이제 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지 않을까요? 배터리에 대한 최신 차량 판매 전략도 먹히고 기술적으로 판매 루트도 어느 정도 들이밀 정도로 확보되고 말이죠.」

나는 자신감 있게 리암을 바라보았다.

리암이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여기서 확신을 얻었다.

이것으로 모터쇼에 관해 통역을 맡길 것이다.

보통 하루 통역 비용 80만 원.

모터쇼 기간 9일.

대략 바이어와 미팅 기간을 가지는 게 3일 정도라고 해도 240만 원이다.

‘어때요? 자격이 있지요?’

***

사실 리암으로서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음. 이렇게 전문 기술 지식이 빠삭할 줄이야.’

이것은 예상 못 했다.

그냥 시혁이 어느 정도 말을 잘하는 능력만 보려고 오늘 대화를 불렀을 뿐이다.

대략적인 성격.

과연 차를 미리 시켰을 때 나오는 태도.

얼굴에 나오는 표정.

거기에 유추할 수 있는 것들.

그러한 것들을 보려고 준비한 것인데…….

‘대단하네…….’

일단 모터쇼 부분은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한국적인 것을 꼬집고 넘어가니 과연 손쉽게 설득이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조와 연출을 어디쯤 둘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냥 통역사로 두기에는 정말 아까운 인재인데?’

솔직히 이런 전문지식은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고, 저런 통찰과 노림수 역시도 기대하지 않았다.

편하게 지식의 밑바닥 정도를 보고 채워주려고 했는데…….

‘끝이 안 보이는데?’

리암은 솔직히 속으로 많이 당황했다.

저렇게 넓은 지식의 향연이라니.

이러다가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때 시혁이 말했다.

「사실 제가 찾아봤는데 여기에 들어갈 이론적인 기술을 라이센스하는 게 어떤가 싶어서…….」

리암은 살며시 웃었다.

‘독일 학자가 연구한 논문 같은데…. 그 기술 몰라…….’

리암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하. 이거 굉장하군요. 그럼 다른 분들 의견을 들어볼까요?」

「네?」

리암은 구원을 부르기로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며 듣고 있었던 개발자들과 직원들을.

「사실 통역사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이 많아서. 지금 저와 한 이야기는 통화가 되어 있었거든요.」

살며시 리암이 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살며시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거기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누군가 주변을 진정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 와서 의견을 나누시죠.」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구원 씨.」

「아, 네. 근데 저는 그냥 통역만 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의견을 말해 놓고요?」

「하하…….」

「공짜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에 말했던 사고의 법적인 처리는 확실히 노력해 드리겠습니다.」

시혁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뭐 가야죠.」

리암은 돈 때문에 가는 건지 아니면 그 딜러를 생각해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시혁을 파악하는 것에는 오늘 실패했다.

좀 더 오래 봐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23살이라는 청년이라는 나이에 자신이 방심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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