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500)

61화

시하는 형아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얼굴을 들고 형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무표정.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에 기이한 푸른 빛무리가 일렁거렸다.

부웅!

어떤 소리가 귓가에 때리자마자 푸른 빛무리가 시혁의 머리에서 터져 나왔다.

번쩍.

시하는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시혁의 머릿속에서 거미줄보다 촘촘하고 세세한 별무리가 그려졌다.

뇌 속에 있는 전자신호들이 빛무리에 상응하며 시간에 대한 인식을 아주 느리게 만들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차를 보며 시혁의 몸이 굽혀졌다.

시하를 잡은 오른팔에는 힘이 들어갔으며 그대로 들어 올리며 안았다.

마치 몸이 이렇게 하라는 듯이 오로지 본능적으로만 움직였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며 그대로 옆으로 점프했다.

데굴데굴.

시혁과 시하는 몸을 구르며 습격해오는 차량을 간신히 피했다.

“헉헉. 시하야.”

“형아?”

시하는 눈부신 빛이 사그라들자 눈을 떴다.

시혁은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시하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때 시하의 뒤편에서 비명이 들렸다.

“꺄악!”

갑작스러운 사고에 다들 패닉에 빠져 버렸다.

시혁과 시하는 무사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박중혁이 사고를 당했다.

뒤에 있던 게 벽이 아니라 스티로폼으로 되어 있는 가벽이라 다행일까?

끙끙거리는 박중혁이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걸 본 시혁이 재빨리 폰을 꺼냈다.

“시하야. 형아만 보고 있어. 다른 곳은 보지 말고. 알았지?”

“아아.”

시혁이 시하를 걱정했다.

혹시 뒤에 있는 참상을 볼까 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시하는 아까부터 시혁을 계속 보고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형아의 품에 파고 들어가 꼬옥 안았다.

“형아.”

“응. 그래. 많이 놀랐지?”

실제로 시하는 많이 놀랐다.

사고 때문도 아니고 갑자기 굴러서도 아니었다.

형아에게 있던 푸른 빛무리가 사라졌으니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형아는 누군가와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

“네. 여보세요. 지금 여기 멜츠 KR 지점입니다. 자유 시승을 하다가 누군가 갑자기 액셀을 밟아 사람이 치였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전화를 끊은 시혁이 시하를 안았다.

시혁이 신고한 걸 본 사람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로 달려갔다.

차에 있는 사람은 내리지도 않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화가 나서 차 문을 두드렸다.

“열어요! 빨리 열어요! 지금 사람이 차 밑에 있으니까!”

그제야 차가 열리며 한 명의 여성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왔다.

그 와중에 소중한 명품백을 손에 쥐고 폰을 꺼냈다.

“비켜요. 차 빼게!”

“아, 네.”

딜러가 거칠게 여성을 밀어내고 차를 뒤로 움직였다.

그제야 나오는 박중혁이 신음을 냈다.

“아악. 다리가. 다리가.”

매우 고통스러운지 다리를 잡고 끙끙 앓았다.

시혁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쳐다도 보지 않은 여자의 모습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와서 박중혁을 싣고 갔다.

시혁은 시하가 놀라지 않게 품에 안아서 멜츠 KR 지점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아…….”

시혁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안 좋은 생각이 뒤따랐다.

잘못하다가 시하가 크게 다칠 뻔했다.

자신이 다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하가 다치고 병원에 실려 가 수술을 받을 상황까지 오게 된다면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그 여자의 태도를 보면 사과는커녕 그냥 보험이랑 합의금으로 끝낼 생각이 가득해 보였다.

“후우.”

“형아.”

“응. 시하야. 형아. 괜찮아.”

“아아.”

시혁은 시하를 안았다.

어리디어린 시하를 진정시켜줘야 하지만 자신이 더 놀란 것 같다.

“형아.”

“응. 미안. 답답해도 조금만 이렇게 있자.”

“아아.”

시하가 형아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형아의 주머니를 슬쩍 보았다.

폰에 흘러나오는 푸른 빛무리가 시하의 눈에 띄었다.

[업데이트 중… 1%… 2%….]

시혁의 주머니에 있는 폰에 업데이트가 되고 있었다.

***

멜츠 본사에서 온 리암과의 미팅은 다음 날로 미뤄졌다.

현재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사건을 조사해야 했다.

나는 시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누웠다.

“형아.”

시하가 내 배를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 모르겠다.

“시하야~ 형아 이제 괜찮아.”

“아아. 형아. 놀라.”

“응. 많이 놀랐어.”

교통사고는 나에게 이제 트라우마였다.

한 번에 부모님을 그렇게 잃었는데 기겁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지금은 그저 푹 자고 싶었다.

“우리 씻고 일찍 잘까?”

“아아.”

시하와 나는 씻고 일찍 잠이 들었다.

“이제 자자.”

“아아.”

“아 맞다. 내 폰 어딨지?”

나는 그제야 폰을 한 번도 건드리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

정신이 없어서 그대로 벗은 바지에서 뒤늦게 폰을 꺼냈다.

따끔.

“아!”

이 정전기가 통하는 감각을 나는 알고 있다.

설마?

갑자기 눈이 핑, 하고 돌았다.

저번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뭔가 크게 구겨 넣는 느낌이 강렬했다.

‘이게 왜 이러지?’

비틀대는 몸을 움직이면서 겨우 이부자리까지 도착했다.

“시하야.”

“코오.”

어느새 눈을 감고 있는 시하를 보며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뿌옇게 보이는 눈의 창에서 푸른 빛무리가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머릿속에 무언가 침투하는 감각을 느끼며 의식이 꺼져갔다.

…….

음…….

잠든 건가?

잠들었나? 아니, 생각할 수 있으니 깨어 있는 건가?

몽롱한 느낌인데?

나는 깜깜한 어둠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몸이 푸욱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밝은 빛이 보였다.

이건 빛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왠지 카메라의 한 장면처럼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게 뭔지.

‘꿈이구나?’

어린 시절 나와 누군가가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준 아버지의 친구.

로랭스 의학 번역 대표인 황기준이 가르쳐준 CIA 요원이 그였다.

‘그럼 11살 때인가?’

그 무렵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가끔 오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곤 했던 사람.

가끔은 시답지 않은 걸 가르쳐줘서 아버지께 혼났던 외국인 삼촌이었다.

삼촌이 손을 들었다.

[꼬맹이.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네. 왜? 친구들이랑 싸웠어?]

[아니거든요. 노네임.]

[내가 왜 노네임이야?]

[삼촌이 맨날 이름이 바뀌시니 노네임이죠.]

[어쩔 수 없어. 여러 이름으로 활동하는걸?]

그렇게 말하는 삼촌이 시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영웅은 말이야. 진짜 이름을 들키면 위치를 역추적 당하는 법이거든.]

시혁이 귀를 파며 역정을 냈다.

[또. 또. 거짓말. 맨날 이렇게 놀린다니까.]

[하하. 반응이 아주 좋아. 그러니까 왜 또 뚱해 있냐고. 또 엄마에게 선물 온 거 보고 버렸어?]

[엄마 아니거든요.]

[하하. 그래. 그래. 아 맞다. 내가 재밌는 거 알려줄까?]

[뭔데요? 이번에 이상한 말을 해도 안 속을 거예요. 저 다 컸어요.]

[그래?]

삼촌이 과장되게 눈을 크게 떴다.

[저 이제 나이가 두 자리 숫자예요. 알죠? 두 자리면 거의 어른이에요.]

시혁의 말에 삼촌이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 그래. 세 자리까지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 그러면 다 커서 알아듣겠네. 그치?]

[네. 뭐든지요.]

삼촌이 재밌다는 듯이 웃다가 땅을 파며 아래를 바라봤다.

[일하다 보면 싫은 기억이 있어. 여기 이 캄캄한 어둠처럼 말이야.]

[뭐예요. 갑자기.]

[일단 들어 봐.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거든. 내가 영웅 일을 해도 말이야. 이 일에 관한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거든. 간접적으로 누군가를 매장할 수도 있고 말이야.]

아이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꽤 과격한 말이었다.

삼촌이 계속 땅을 팠다.

[이렇게 계속하여 깊어지지. 메꾸기 힘들 정도로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이 깊은 어둠을 다른 것으로 덮어씌우는 거야.]

[다른 것으로요?]

[그래. 다른 것으로.]

삼촌이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이렇게 단단하게 다른 것으로 경험을 덮어씌우는 거지. 더 굉장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으음. 어려워요.]

[전에 내가 한 왕따 벗어나는 법 기억나지?]

[기억나요!]

이를테면 역으로 따돌려라.

왕따 주변의 친구들을 사이를 찢어놓고 거기에 악감정을 가지게 하라.

자기들끼리 물어뜯게 해서 그 뒤의 관심을 버리게 해라.

굉장히 이상한 것을 가르치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엄청 등짝을 맞은 적이 있는 삼촌이었다.

[으음. 그런데 그거 이상한 거였잖아요.]

[이상한 거라니! 아주 중요한 거라고! 얼마나 원만하게 해결되는데!]

[흐음…….]

[여론전이 최고지. 흠흠. 말이 샜는데 그걸 본 아이의 기억은 어떨까? 그 아이들을 계속 무서워할까? 아니면 멍청하게 생각할까?]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이제 자기 아래로 보기 시작하는 거야. 어떻게 보면 극복을 한 거지.]

[그게요?]

시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촌이 판 구멍을 다 메꾸고 팍팍 두드렸다.

다시는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사실 제일 좋은 방법은 안 보는 거지. 그게 불가능하면 치워버리는 거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말이지.]

[그런가요?]

[너도 그러잖아. 엄마의 선물을 눈에 안 보이게 치워 버리잖아.]

[엄마 아니라니까요.]

[어쨌든!]

[이런 거 가르쳐주면 아빠한테 혼날걸요?]

[뭐?! 설마 아빠에게 이를 건 아니지? 거의 어른이면 아빠에게 이르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

시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세요? 부모님 눈에는 자식이 늘 아이로 보인데요. 아빠!]

[잠깐만! 내가 했던 말 중에 좋은 말도 있을 거야. 그것만 일러바치자!]

시혁이 아빠에게로 뛰어가는 모습과 그걸 쫓아가는 삼촌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잊어버린 기억.

어느새 연락이 없어진 삼촌의 추억이 내 인격 형성에 참 많은 부분을 차지했구나 싶었다.

‘이런 기억도 있었네…….’

아마 이런 꿈을 꾸는 것은 이번 차 사고가 내 트라우마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치우는 거라…….’

그렇다면 어떻게 치우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닐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벌벌 떨고 있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집에 와서도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뻗을 생각을 하고 있다니 말이다.

나는 강해져야 했다.

무너지지 말아야 했다.

시하를 지킬 수 있는 이 울타리에 그 어떤 구멍도 뚫리면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문해 봤다.

‘정말 나는 오늘 시하를 지켰나?’

그 답은 이미 마음속에 내려져 있었다.

반짝.

푸른 빛무리가 생기더니 시야를 덮쳤다.

눈을 감으니 몸이 부웅 떠오르는 느낌이 들면서 잠에서 깼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눈을 때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시하는…….’

옆에서 꼼지락꼼지락 대며 자는 모습이 보였다.

손으로 앞머리를 넘겨주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약한 모습 안 보일 거야. 미안해.’

나는 기지개를 켜며 폰을 들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아침이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암에게 전화가 와 있네.’

혹시 깨어 있을까 싶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띡.

몇 번의 신호음이 간 뒤에 리암이 전화를 받았다.

「오! 시혁 씨. 어제는 잘 들어갔습니까? 사고에 휘말렸다고 들었습니다.」

「네. 리암. 괜찮습니다. 음?」

「음? 아니. 시혁 씨? 독일어를 하실 줄 알았습니까? 전에 듣기로는 못한다고 들었는데요.」

「…못했는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하.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러게요.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아무래도 새로운 능력은 독일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어에 이어 새로운 언어를 하나 습득했나 보다.

「독일어로 직접 대화해 보는 사람은 리암이 처음이네요.」

「오! 그런가요? 공부는 했는데 실전에 써본 적이 없는가 보군요.」

「뭐, 그런 느낌이죠.」

「발음이 상당히 괜찮으시군요. 이거 굳이 제가 영어로 말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더더욱 기대되는군요.」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네요. 아! 기대에 부응하기 전에 부탁 하나 좀 해도 될까요?」

「네. 어려운 게 아니면요.」

나는 살며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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