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승준 엄마가 태워주는 차를 탔다.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쪼르르 자고 있었다.
“오늘 차도 태워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같이 가는 거 한 번에 가면 좋잖아요.”
“감사합니다.”
차를 타고 있으니 한 대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시하와 함께 여행도 다니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차로 데려다주는 경우가 많으니까.
언제까지 손잡고 움직일 수는 없었다.
‘보자. 내 통장에 돈이…. 생활비랑.’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승준 엄마가 말했다.
“시혁 씨는 차 구매 안 하세요?”
“아! 저도 하긴 해야죠.”
“중고로 잘하는 데가 있는데 제가 가르쳐 드려요?”
“그럼 돈 좀 모이면 생각해 볼게요.”
“차 한 대 있으면 애들 데리고 다니기 편해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긴 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번역을 하면서 일정하게 버는 벌이와 단기간에 통역으로 버는 벌이.
그 계산을 두들겨봤을 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왕 사는 거 좋은 거로 사요.”
“안 그래도 그러는 게 좋겠다 싶네요. 아무래도 교통사고 나도 안전할 수 있는 거로.”
나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아마 어떤 차든 아버지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좋은 차였다면 새어머니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비싸게 주더라도 안전하고 튼튼한 차를 사고 싶었다.
나는 주먹을 살며시 쥐며 앞을 보았다.
“열심히 돈 벌어야겠네요.”
“시혁 씨 하시는 일이 있어요?”
“번역이랑 통역이요.”
“아! 통역도 하세요? 와. 신기하네요. 전 통역 일 하시는 분 처음 봐요.”
“그냥 한 번 해 봤어요.”
“그래도 그 한 번이 어디예요. 그게 다 경력이 되는 거죠.”
“하하.”
하비니스 기업에 통역을 한 건 엄청난 경력 중 하나가 아닐까?
어쩌면 이 하나가 더 많은 일거리를 물을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폰이 울렸다.
웅웅.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네.”
화면을 보니 국제전화로 걸려왔다.
하비니스 기업의 니콜드.
왜 전화가 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전화를 받았다.
「네. 니콜드. 어쩐 일이세요.」
「시혁. 오랜만입니다. 별거 아니고 안부나 물어보려고요.」
「네? 하하. 전 잘 지내죠.」
「사실 용건이 있어서 물어봤습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서 친구에게 꽤 자랑을 늘어놓았거든요. 제 실적에 과장을 보태서.」
「오?! 그래요? 하비니스 기업에서 많이 받으셨나 보네요.」
「오우. 엄청나죠. 하여간 제 친구가 독일에 근무하는데 이번에 한국 갈 일이 생겼나 봐요. 그래서 통역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데 제가 시혁을 추천해 줬죠.」
「이거 영광이네요. 그런데 저는 대학교도 다녀야 해서 오래 못 있는데요?」
「금요일 정도에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때 금요일은 수업이 없다고…….」
「크흠. 그래도…….」
「하하. 너무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제 친구가 멜츠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멜츠요?!」
멜츠라면 나도 알고 있다.
한국에서 꽤 잘나가는 수입차 브랜드 중 하나였다.
국내에서 요즘 성장률이 높고 흑자도 꽤 된다고 했다.
인기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의 뉴스 때문이었다.
「사람 목숨 여러 살리는 그 멜츠 맞죠?」
「그 멜츠 맞습니다. 하하.」
「그런데 전 독일어 못하는데요?」
「괜찮습니다. 영어-한국어로 동시통역만 해주시면 됩니다.」
「흐음. 그거라면 뭐.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이번에 감사와 함께 모터쇼에 대한 일도 함께 처리할 생각입니다.」
「한국 모터쇼에 참가한다고요?」
「네. 그렇죠. 이번에 이미지 굳히기로 들어갈 생각인가 봅니다.」
한국 모터쇼라면 외국계 기업이 몇 참가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다.
이번에 멜츠가 거기에 참가한다면 또 좋은 뉴스거리가 될 거 같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메일 주소 알려주시고 자료는 미리 받아야겠네요.」
「네. 하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그 친구랑 해 두세요.」
「이렇게 소개받았는데 대충 하면 안 되죠.」
「아마 일반 통역사 비용을 줄 겁니다. 이번에는 인센티브 같은 거 없습니다. 뭐 마음에 들면 모터쇼에서 또 통역사로 고용할지도 모르겠네요.」
보통 통역비로는 일당 60~80만 원을 받는다.
그래도 멜츠니까 좀 더 쳐줘서 80만 원은 주지 않을까?
「그럼 열심히 해 봐야겠네요? 하하.」
열심히 해서 계약 성사에 도움이 되면 조금 더 얹어줄 거다.
나중에 이런 것도 계약서에 명시하자고 해야지.
계약 없이 넉넉한 인심에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러다가 크게 뒤통수를 맞을 테니까.
「그 친구에게 열심히 돈 뺏길 준비하라고 해야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준비하라고 해 두세요. 정말 좋은 계약 건 물어다가 돌아갈 거라고.」
서로 그렇게 농담을 건넨 후에 통화를 종료했다.
다시 차 안에서 침묵이 찾아왔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서 차가 멈췄다.
승준 엄마가 옆으로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일하는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는 말은 왠지 거짓말 같네요. 외국어 잘하는 남자가 정말 멋진 거 같은데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하나가 시혁 씨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그냥 동경 같은 거죠.”
“그 나이 때 애들이 그렇죠. 뭐.”
승준 엄마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그렇게 신기한가?
“저기. 파란불인데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승준 어머니. 이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다시 자동차가 널따란 도로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전운행 부탁드립니다.’
***
-다음 날.
나와 시하는 오랜만에 산책했다.
이유는 별거 없다.
시하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으니까.
시하가 원한다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뭐든지 들어주고 싶다.
범죄만 아니면 된다.
“응? 시하야. 뭐 봐?”
“아아. 저기.”
“응? 아! 놀이터?”
시하가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지 빤히 보았다.
어제도 실컷 놀았는데 오늘도 실컷 놀고 싶은가 보다.
어린이집 앞에 놀이터가 있어서 매일 거기서 놀 텐데 질리지 않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형아~”
“그래. 놀이터에서 놀자. 그런데 여기는 전부 모래로 되어 있네.”
옛날에는 전부 모래로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곳만 찾아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시하야. 형아가 또 모래로 놀 방법을 가르쳐야 줘야겠네.”
“아?”
“이건 준비물이 필요해. 잠시만.”
나는 시하를 데리고 편의점에 들러서 페트병과 나무젓가락을 샀다.
“짜잔!”
시하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제일 먼저 쉽게 할 수 있는 놀이를 가르쳐 줄게.”
“아아.”
나는 일단 시하를 데리고 모래 위에 앉았다.
모래를 모아 산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젓가락 하나를 꼽았다.
“자. 이걸 이렇게 퍼오는 게임이야.”
나는 모래를 살며시 퍼왔다.
모래 산이 내 손에 의해 조금 부서졌다.
스르륵.
“이 나무젓가락이 무너지면 지는 거지.”
“아아.”
“알겠어? 이제 시하 차례!”
“아아.”
시하가 작은 손으로 모래를 파냈다.
스르륵.
과감하게 나무젓가락이 있는 내부를 파고들어 모래를 가져갔다.
“생각보다 좀 하는데?”
“아아. 형아.”
“그래. 형아 차례네.”
이게 뭐라고 신중해지는 걸까?
나는 살며시 한 손으로 모래를 한 줌 잡아 옆에 놓았다.
“아? 형아. 두 손~”
“크흠. 이것도 기술이야.”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오늘 시하에게 멋진 테크닉을 보여줘야겠다.
그런데 시하도 한 손 쓰기를 했다.
역시 금방 배우는 것 같다.
그렇다면 좀 더 굉장한 기술을 쓰는 수밖에.
나는 검지를 모래 산에 갖다 댔다.
살살살 긁으면서 모래를 떨어뜨리는 고도의 기술.
그렇게 조그마한 모래를 슬쩍 훔쳤다.
“아? 형아. 손.”
“시하야. 이것도 기술이야.”
어린 동생을 상대로 조금 치사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크흠. 져줄 생각이니 나를 비난하지 말아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주변에 열심히 속으로 변명했다.
“아아.”
시하 역시도 손가락으로 모래를 살살 긁었다.
나무젓가락이 살며시 흔들리자 시하의 손이 멈췄다.
다른 사람은 몰라보겠지만 지금 시하는 아주 긴장한 표정이었다.
눈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하야. 파이팅!”
“아아.”
시하가 살며시 주변을 파내면서 모래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아니, 벌써 그런 스킬을 쓰다니.
“어허. 그건 인정 안 돼. 요기 정도는 건드려줘야지.”
“아냐.”
“아니야. 요기야.”
“아냐.”
모른 척 시치미를 떼다니.
형아가 봐줬다.
“알겠어. 이번만 모른 척해 주겠어. 그럼 형아 차례지?”
“아아.”
나는 과감하게 손을 놀렸다.
하지만 결과는 나무젓가락이 쓰러지는 거로 끝났다.
“아, 졌다!”
“아아!”
시하가 자기가 이기자 좋아했다.
역시 시하는 귀엽다.
내가 진 게 아깝지는 않았다.
오히려 졌지만 이긴 느낌이랄까?
시하가 좋아하면 나도 좋다.
“그럼 다른 거 할까?”
“아?”
“짜잔. 이 물을 갖고 공을 만들 거야.”
“공?”
“응. 이렇게 작은 알을 만들 거야.”
“알?”
초등학교 1학년 때 여자친구와 늘 같이 만들었던 흙공 만들기.
지금 그녀는 잘 지내고 있을까?
맨날 만드는데도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매력이 있다.
“자. 여기에 모래에 물을 뿌리는 거야.”
물에 적셔진 모래가 찐득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손으로 꼭꼭 뭉치는 거야.”
“아아.”
조그마한 손으로 모래를 뭉쳤다.
그때 옆에 어떤 아이가 다가왔다.
“응?”
“아?”
살며시 우리 눈치를 보더니 앉아서 모래를 손으로 뭉쳤다.
‘뭐지? 같이 놀고 싶은 건가?’
주변에 부모님이 있나 둘러보니 몇몇 어른이 보이기는 했다.
“꼬마야. 엄마는 어디 있어?”
아이가 힐끗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아빠는 어디 있냐고 물으니 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름이 어떻게 돼?”
“지호.”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
뭔가 소심한 아이인가 보다 싶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아?”
“이 시간에는 혼자야.”
혼자 이렇게 노는 아이일까?
대체 부모님은 뭐 하고 있길래 이렇게 애를 내버려 두는 거지?
보아하니 대충 6~7살로 보인다.
그래도 아직 많이 어린 건 사실이다.
“그럼 같이 놀래?”
“응.”
“시하도 그래도 괜찮지?”
“아아. 형아. 이거.”
시하는 빨리 흙공을 만들고 싶나 보다.
“자. 그럼 이렇게 공을 만들어봐.”
“응.”
“아아.”
그렇게 셋이서 열심히 모래를 주물럭거렸다.
손에 다 들어오게 공의 크기를 만든 뒤에 위에 물이 뿌려지지 않은 모래를 묻혔다.
마치 튀김가루를 묻히듯이.
“자. 그럼 다시 꼭꼭 눌러.”
“아아.”
“응.”
내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만드는 모습이 참 재밌었다.
“그럼 저기 나무 밑에 있는 흙이 있는 곳으로 가자.”
놀이터에서 조금 벗어나 흙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 흙을 또 섞어 넣는 거야.”
그렇게 한 뒤에 큰 돌을 주워서 바닥을 팠다.
“마지막으로 여기 이렇게 흙으로 덮어 넣고 나중에 찾으면 공이 만들어져 있어.”
지호가 나에게 물었다.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신기하다.”
사실 어릴 때 했던 놀이를 그대로 따라 한 것뿐이다.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굳이 하루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냥 그때는 그렇게 하루를 기다려 다시 파보는 게 너무 기대되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이 놀이에는 돈도 안 들고 말이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손이 많이 더러워졌네.”
“아아. 형아.”
시하가 자신의 펭귄 가방을 흔들었다.
아마 안에 있는 각티슈랑 물티슈를 쓰라는 말이겠지.
“시하 똑똑하네.”
나는 시하의 가방을 열어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자. 쓰레기는 여기 검은 봉지에 버리세요.”
“아아.”
“네.”
시하가 열심히 손을 닦고 검은 봉지에 버렸다.
이제 날이 따뜻해서 땀이 나오는지 물티슈로 얼굴도 닦았다.
그걸 본 지호도 시하를 따라 얼굴을 닦았다.
이렇게 보니 둘이 어린 형제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이 둘을 형제로 보겠지?
시하와 나를 볼 때면 다들 젊은 아빠와 아기인 줄 아니까.
“형아.”
“응? 아하하. 배는 왜 닦아.”
시하가 티셔츠를 올리며 자기 배를 닦았다.
그걸 본 지호도 살짝 올려 자기 배를 닦는다.
나는 그걸 보고 얼굴을 굳혔다.
지호의 배에 살며시 푸른색이 보였던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