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아침부터 활발하게 싸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쾅! 쾅!
TV에서 나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을 줄여서 그런지 아침은 여전히 피곤했고 귀는 민감했다.
특히 조용한 아침을 맞이하는 게 마음 편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점이었다.
“시하야?”
아무래도 시하가 티비를 켰나 보다.
거실로 나오니 시하가 집중해서 펭귄몬스터를 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채널을 맞춘 거지?
확인해 보니 애니버스라는 채널이었다.
어린이들을 위해 오로지 만화만 방영하는 채널.
“시하야. 아침부터 만화 보면 안 돼.”
“아아. 형아.”
시하가 리모컨을 놓고 내 다리에 찰싹 안겼다.
“형아~”
“그럼 TV 끈다?”
도리도리.
고개를 열심히 흔든다.
나는 살며시 리모컨을 잡았다.
“아아! 형아!”
“만화는 보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형아~”
시하가 내 바지를 팔랑팔랑 흔든다.
애교에 넘어갈 뻔했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TV를 보니 이제 황제펭귄이 변신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변신이다! 황제펭귄!」
「펭펭!」
확실히 중요한 장면이기는 하네.
“형아~ 시하. 하나만.”
“응?”
시하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나에게 들이밀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한 번만.
아마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근데 너무 귀엽네.
오늘만 넘어가 주자.
“형아가 아침밥 하고 있을 동안에만 봐. 밥 먹을 때는 안 돼. 알았지?”
“아아.”
끄덕끄덕.
그런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리모컨을 손에 쥐여 줬다.
시하는 자리에 앉아서 TV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내가 교육한 대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은근 말을 잘 듣는다니까.
「페엥-」
음식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황제펭귄의 두 번째 변신이 신경 쓰인다.
저번에는 세 번째를 보긴 했으니까.
‘일단 같이 볼까?’
애들 만화인데도 은근히 같이 보면 재미있었다.
사실 몰래 다음 편을 보다가 걸려서 시하에게 엉덩이 맴매 맞았다.
-형아. 가치.
-미안해.
그날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아아. 페페.”
시하가 흥분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화면에는 두 번째 변신이 되고 있었다.
뿌연 연기를 흩뿌리며 황제펭귄의 털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짧은 손을 바닥에 살며시 찍었다.
「펭!」
「황제펭귄 기어 투!」
세 번째 변신은 슈퍼황제펭귄 쓰리면서 두 번째 변신은 기어 투인 걸까?
설정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아아. 기어 투!”
시하가 땅바닥에 한 손을 짚었다.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데 엉덩이가 볼록 나와서 귀엽다.
나는 슬며시 엉덩이를 쿡 하고 눌렀다.
그러더니 시하가 앞으로 굴렀다.
데굴데굴.
“아?”
“아하하. 그게 뭐야.”
“아아.”
“보고 있어. 형아 금방 밥할게.”
“아아.”
의문의 변신 장면을 봤으니 만족스러웠다.
어린이집에도 가야 하니 어서 준비해야겠다.
***
-어린이집.
오늘은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을 만들기를 준비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쉽게 만들 수 있게 미리 습자지를 둥글게 잘랐다.
10장을 겹쳐 만든 붉은 습자지는 가운데 스테이플러로 고정되어 있었다.
“자,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이에요. 그래서 카네이션을 만들 거예요. 엄마, 아빠에게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해요. 아셨죠?”
“네!”
“아아.”
다들 씩씩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그럼 카네이션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드리는 거예요. 아셨죠?”
“네!”
원래라면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 수 있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직접 달아드리기에는 애들이 아직 어렸다.
뾰족한 것이 위험하기도 했으니 목걸이로 변형했다.
“자. 그럼 오늘 만들어 보아요.”
“네.”
선생님이 미리 준비한 것을 애들 손에 쥐여 주었다.
엄마, 아빠 몫인 두 개.
그러다 선생님은 시하에게 줄 몫을 고민했다.
다른 애들과 다르게 하나만 줄지.
아니면 두 개를 줄지.
“아?”
“하하. 시하야. 몇 개 필요해?”
시하는 선생을 보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세 개!”
“응? 세 개?”
“아아.”
“왜 세 개야?”
“엄마. 아빠. 형아.”
“아…. 응. 그래. 시하는 세 개 만들자.”
선생님이 시하에게 세 개를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승준과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나도 세 개.”
“하나도 하나도 세 개.”
선생님이 어이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왜?”
“나는 내 꺼 가질 거야.”
“하나는 시혀기 오빠 줄 거야.”
승준이 배를 내밀며 소유욕을 보였고, 하나는 시혁에게 주는 깜찍한 발상을 하고 있었다.
이 쌍둥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각자 한 개를 주었다.
“한 개 아니야.”
“하나도 하나 아니야.”
“미안하지만 엄마, 아빠에게 하나씩 주는 거로 되어 있어요.”
승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는 두 개!”
“하나도 두 개!”
“똑같이!”
“똑가티!”
선생님이 두 사람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이 각자에게 두 개씩 주었다.
“알겠어요. 두 개씩 줄게요. 세 개는 안 돼요.”
“응!”
“응!”
이미 둘의 머리에서는 세 개를 요구했다는 건 날아가고 없었다.
“그럼 이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요. 자 이렇게 위에 있는 종이 한 장을 가운데로 몰아서 접으세요.”
다들 열심히 접었다.
구기는 애들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구겨도 예쁘게 만들어지는 법이었다.
“그걸 두 장, 세 장, 열 장까지 반복해서 접는 거예요.”
다들 작은 손으로 열심히 한 장씩 습자지를 위로 올려 접었다.
한 개씩 접어서 그런지 공간이 생기며 꽃이 풍성해졌다.
보이는 그대로 카네이션이 완성된 것이다.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예뻐.”
“아아!”
시하는 자신이 만든 붉은 카네이션을 바라보았다.
너무 쉬워서 금방 만들어진 카네이션 세 개.
엄마 꺼. 아빠 꺼. 형아 꺼.
이걸 줄 생각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선생님이 그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간 경험으로 미리 카메라를 준비했으니까.
찰칵. 찰칵. 찰칵.
시하의 웃음이 담긴 레어 사진이 손에 들어왔다.
“그럼 여기에 명찰 목걸이 줄을 달면 완성이에요.”
선생님은 명찰 목걸이에 달린 집게를 카네이션에 집어 주었다.
간단한 목걸이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미 자기 목에 걸며 웃고 있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 다들 자기 목에 거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에게 줘야 하는 거 잊지 마세요.”
“네!”
“아아.”
“그리고 오늘은 이게 끝이 아니에요. 예쁜 하트 포토존도 만들 거랍니다.”
선생님이 어딘가에서 넓은 하드보드지를 꺼내왔다.
프린터로 뽑아서 적은 글자는 [부모님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그 밑에는 붉은 유성펜으로 예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 붉은 습자지를 찢어서 하트를 만들어보아요.”
“네!”
다들 물풀을 가지고 습자지를 찢어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하트에 붙였다.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어린이날 이벤트를 길게 끌고 나가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목표였다.
그걸 위해 선생님은 노래도 준비해 왔다.
“이거 끝나면 어버이날 노래도 배워요!”
프로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날을 유용하게 쓰며 애들을 교육하는 거다.
꽉 찬 스케줄에 만족하는 선생님이었다.
잠시 후.
포토존을 다 만들고 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아이들도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
[어머님 은혜]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거 같애.]
“자. 그럼 다시 한번 불러볼까요?”
하지만 가르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잘 따라 부르기는 했다.
문제가 있다면 개사를 하는 애들이 꼭 있다는 것뿐.
그건 바로 승준이었다.
“나는 나는 노픈 게 또 하나 있지!”
옆에 있던 하나도 승준의 개사에 감화됐는지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목이 길고 다아리 긴! 길죽한 기린!”
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 있는. 나무보다. 높은 거. 같애!”
어느새 물감이 물에 번지듯 다들 개사한 버전을 부르고 있었다.
선생님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거 아니야!”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대환장 파티가 되기 전까지.
다시 한번 실전을 배우는 선생님이었다.
***
애들을 데리러 부모님들이 도착했다.
어버이날 행사를 특별히 하지 않지만, 그날 아이들이 만든 포토존 위로 사진도 찍고 추억을 쌓았다.
시하는 오늘 늦게 온다는 형아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보았다.
부모님 목에 카네이션을 걸어주는 아이들.
얼싸안으며 포토존에서 사진 찍는 아이들.
시하는 손에 있는 세 개의 카네이션을 보았다.
“아아.”
시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자신은 엄마, 아빠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지 못하는 거.
“형아…….”
시무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따라 형아는 빨리 오지 않았고, 이상하게 우울한 감정이 가슴에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형아가 들었다.
“헉. 헉. 시하야.”
헐떡이며 들어오는 형아를 보며 시하의 눈이 커졌다.
반짝. 반짝.
분홍 빛무리와 파란 빛무리가 형아의 어깨를 감싸며 둥둥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아!”
“시하야.”
시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형아에게 달렸다.
손에 꼭 쥔 세 개의 카네이션에 달린 목걸이가 살며시 흔들렸다.
“형아!”
“응. 시하야. 너무 오래 기다렸지.”
“아아.”
끄덕끄덕.
“미안해. 미안해.”
“아아. 형아. 이거.”
시하는 세 개의 카네이션을 내밀었다.
“응? 세 개나 형아 주는 거야?”
“아냐.”
“그럼?”
“형아. 엄마. 아빠.”
“아…….”
시하는 형아에게 카네이션을 목에 걸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각각 형아의 두 어깨에 걸어주었다.
파란 빛무리와 분홍 빛무리가 꿈틀대며 하트를 그렸다.
“헤헤.”
“어? 시하 웃네?”
“아아.”
“그래. 형아가 이렇게 걸고 있으니까 웃기지?”
“아아.”
시혁이 시하를 안고 포토존에 섰다.
“선생님 저희 이렇게 찍어 주세요.”
“어머. 시혁 씨. 어깨에도 카네이션 뭐예요. 호호. 시하도 가끔 엉뚱하다니까요.”
“그러게요.”
“시하가 이렇게 웃을 때 빨리 찍어야겠어요.”
“네. 빨리요. 빨리.”
선생님이 시하를 위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웃음이 지워질까 봐 얼른 찍었는데 시하의 입가에는 계속 미소가 지어졌다.
“어떻게. 너무 귀여워.”
“그러게요. 오늘 왜 이렇게 웃지?”
“형아~”
“응. 응. 시하 기분 좋아?”
“아아.”
“아주 좋은가 보네.”
시혁은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는 여러모로 자신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혁이의 육아일기. 6세.
-5월 8일 어버이날.
오늘 시혁이 카네이션 두 개를 주었다.
왜 두 개를 주냐고 하니 아빠는 자신에게 엄마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하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주변 친구들이 딸이 최고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아들이 최고다.
나는 시혁에게 고맙다며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시혁이 고민하더니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자기 친구들이 다 맛있게 먹어 봤다는데 자신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나는 괜히 미안해져 아들의 손을 잡고 햄버거집으로 갔다.
무슨 햄버거를 먹고 싶냐고 물으니 불고기 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바보. 그게 제일 싼 건데.
이왕이면 더 비싼 걸 먹자고 하니까 시혁이에게 “돈 많이 쓰면 안 돼.”라고 혼났다.
이번에 돈을 많이 벌어서 비싼 버거 사도 된다고 했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돈 많이 들어왔다고 많이 쓰면 언제 빚 갚아?”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듣는 건지.
할아버지의 빚을 갚고 있는 걸 애가 아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설마 싶었다.
나는 괜찮다며 이 정도 사줄 수 있다며 세트까지 시켰다.
시혁은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감자튀김을 다람쥐같이 볼 빵빵하게 먹는 게 역시 애는 애다 싶었다.
계속 시혁을 보고 있는데 아빠는 왜 안 먹냐고 묻길래 아빠는 카네이션 받아서 배부르다고 하니.
“어휴. 거짓말.”
아빠는 햄버거 싫어한다고 하니 시혁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햄버거가 싫다고 하셨어도 아니고. 그냥 아빠도 같이 먹어.”
그 노래를 네가 어떻게…….
응용력이 좋은 아들이다.
진짜 햄버거 먹으면 속이 안 좋아 싫어하는 건데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