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500)

55화

원대 방송국 전속 박희열.

그는 송택수 작가의 팬이었다.

이번에 만들어지는 트레일러의 소식에 곧바로 연락을 넣었다.

비록 만나지는 못하지만, 꼭 한번 참여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트레일러는 수당이 별로 안 되지만 참여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기에 여기까지 왔다.

같이 온 성우가 말했다.

“희열 선배가 여기에 참여할 줄 몰랐습니다.”

“너도 나랑 같은 마음으로 참가한 거 같은데?”

“당연하죠. 제 중학교 시절에 애들이랑 책 돌려보다가 답답해서 다들 하나씩 단행본 산 걸 생각하면.”

“너희도 그랬어? 다 똑같구만.”

한창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다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영어 대본은 따로 녹음하는 거지?”

“네. 발음 좋은 언더로 구했다는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스피킹이라도 평소에 배우는 건데.”

“하하. 이미 늦었습니다.”

후배가 웃다가 입꼬리를 내렸다.

“선배. 그런데 말이죠. T.O로 누굴 뽑을 겁니까?”

“하아. 나도 그거 때문에 골치야. 괜히 심사 보는 일을 맡아서. 마지막 면접에서 떨어진 애들로 뽑아야지.”

원대 방송국에서 뽑은 공채는 남녀 각 1명.

하지만 시장이 이번 청년실업률을 줄이고 성과를 내기 위해 T.O를 더 늘려 달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방송국뿐만 아니라 시에 있는 기업에 다 내려간 것이다.

작은 기업들은 필요 없는 신입사원을 뽑을 생각에 골치를 썩이는 모양이었다.

“떨어진 애 중에 누굴 뽑아야 할지 생각하면 머리 아파. 그냥 다시 심사 보게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저희도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사실 누굴 뽑아도 요즘 다 잘하긴 하니까. 인성 된 애들을 뽑아야겠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은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온 언더는 어때요?”

박희열이 피식 웃었다.

“잘하지.”

“네? 어떻게 아세요?”

“걔가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애거든.”

“네?!”

“저 거구는 기억하지 않기 힘드니까.”

“잘하는데 떨어뜨리셨네요.”

박희열이 인상을 구겼다.

“어쩔 수 없었어. 남자 중에 한 놈이 유독 튀었거든. 넘사벽으로 잘하더라.”

“큭큭. 외모만 봤을 때 아까 걔가 제일 튀던데요?”

“그건 인정.”

그렇게 웃으며 녹음실로 돌아왔다.

녹음이 끝나고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우리 구경하고 가자.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고.”

“아까 저 애는 잘한다면서요?”

“그래도 영어로도 잘하는지 봐야지. 어쩌면 여기서 추가 합격이 될 면접이 될 수 있는 거고.”

“그냥 송택수 작가님 팬이라서 작품 망칠지 걱정되시는 거죠?”

박희열이 후배의 눈을 피했다.

“그냥 궁금한 것뿐이야.”

녹음이 시작되었다.

역시 나쁘지 않은 백동환의 실력.

영어 대사로 들어봐도 기본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만요.”

백동환 옆에 있던 시혁이 녹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뭔가 조언을 건넸다.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박희열은 호기심이 샘솟았다.

한 5분이 지났을까?

시혁이 자신 혼자의 녹음을 요구해 왔다.

“임시로 저만 녹음해도 되죠?”

“네. 그러세요.”

박희열은 거기서 황당함을 느꼈다.

대체 뭘 하려고 저러나 싶었으니까.

그런데…….

시혁이 녹음하는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뭐야 저 괴물은?’

일단 발음이 백동환과 달랐다.

귀에 쏙쏙 박힌다고 할까?

백동환도 나쁘지 않았지만, 발음 면에서는 이시혁이 우위였다.

그것뿐만 아니라 더 황당한 것은.

‘변성이 자연스러워?’

보통 성우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변성.

목소리의 변화였다.

실제 방송국들이 공채를 뽑을 때 각기 원하는 방향성은 달라도 공통된 부분이 있다.

어린아이, 청년, 중년, 노인.

각 역할에 맞게 한 사람이 이 모든 나이 때를 목소리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기본인데 저렇게 순식간에 바꿀 수는 없어.’

진중하면서도 무거운 목소리의 내레이션.

주인공의 독백체.

노인 목소리에 걸맞은 느릿한 템포의 속도.

30대 목소리인 주인공.

네 가지의 목소리를 영상이 흘러나오는 대로 순식간에 변화시켰다.

보통 끊어서 녹음하지만 저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한 번에 녹음했다.

‘어처구니가 없네.’

아마 외국 방송국에 공채를 본다면 저 아이는 무조건 합격일 것이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성우에서 제일 중요한 건 노력으로 닦은 호흡과 기술이었다.

재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성우의 세계가 아니다.

어디에 말을 끊어야 할지, 어디에서 호흡을 더 넣어 감정을 살리지.

이건 경험의 문제고 기술의 문제였다.

이런 걸 갈고 닦지 않는 이상 재능이 있어도 뽑아주지 않는다.

“선배. 잘하는데요?”

“그래. 잘하네. 근데 옆에 놈이 더 어이없어.”

“네? 왜요?”

박희열이 가늘게 뜬 눈으로 녹음실을 보았다.

안에는 시혁이 녹음한 음성을 몇 번이나 들려주고 있었다.

백동환이 열심히 입을 굴리며 따라 하는 게 보였다.

“아까 녹음할 때 대사 하나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거든.”

“네? 전 모르겠는데요?”

“아냐. 제대로 들었어.”

그때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두 파형이 겹쳐 있어요.”

후배가 놀랍다는 듯이 박희열을 보았다.

“와. 선배 귀 엄청 좋네요. 그 작은 소리를 들었다고요?”

“그래. 문제는 발음이 순식간에 교정되었다는 거지.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지만.”

“예?”

“보자고. 저기서 연습은 다 끝난 거 같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녹음이 시작되었다.

백동환의 주도로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에 있던 엔지니어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희열은 허탈하게 웃었다.

‘습득력이 미쳤네.’

괴물 옆에 또 다른 괴물이 있었다.

이미 몸은 괴물 이상이었지만.

‘발음뿐만 아니라 영어로 확실히 감정 넣는 포인트까지 먹어버리네. 공채로 박아 넣으면 데리고 다니기 편하겠어.’

실제로 전속계약은 2년.

2년간 선배들과 함께 녹음하며 배우는 게 많은 시간이었다.

거기서 얼마나 잘 따라오느냐가 회사 생활에서 중요했다.

지금 박희열은 뜻하지 않게 그런 편한 일면을 본 것이다.

‘남자 추가 합격자는 정해졌네.’

오늘 녹음을 선택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형아!”

그때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던 시하가 형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박희열이 그런 시하를 보며 인사를 했다.

“안녕. 아기야.”

“아아. 아녕.”

“오. 그림을 그리는 거야?”

시하가 형아를 기다리면서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아.”

“잘 그리네? 이건 아까 영상에 나왔던 새네? 좀 다른 것 같지만.”

“아아.”

“요즘 아기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나?”

박희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물들 사이에 있는 아기 괴물.

아무래도 예술적인 감각은 DNA가 작용하는지 심각한 고찰을 할 때.

“아아. 형아. 시하.”

“으응?”

“형아. 시하.”

박희열이 시하가 가리킨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옆에 있던 후배가 말했다.

“LSH? 이게 뭐지?”

“그것보다 이 그림 전부 글자로 되어 있어…….”

“헐? 그러네?!”

두 성우는 녹음실에 있는 사람보다 앞에 있는 아기가 더한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아?”

시하는 그저 배운 것과 본 것을 써먹을 뿐이다.

LSH는 이시하, 이시혁.

두 사람의 이니셜.

최근에 형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

녹음을 끝내고 나오는데 굉장히 부산스러웠다.

‘뭐지?’

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들 시하가 슥삭슥삭 그리고 있는 태블릿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시하야.”

“아아. 형아!”

“혼자서 심심했지?”

도리도리.

나는 시하의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도 열심히 그렸어?”

“아아.”

“이야. 잘 그렸네.”

“아아. 형아. 시하.”

“응? 어? 그러네. 형아랑 시하네.”

나는 시하를 안아 들었다.

그림은 저장하고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시하랑 실컷 놀아줄 생각이었다.

“저기.”

박희열이 나를 불렀다.

“네?”

“애가 무척 귀엽습니다. 그림도 참 심오하게 잘 그리고.”

“아, 네. 감사합니다. 제 동생이 천재라서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알면 놀랄 정도인 거 같습니다.”

“그럼요. 이건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봤자 아무도 안 믿을 겁니다.”

“그건 그렇긴 하죠.”

“하하. 그리고 녹음도 잘 들었습니다. 정말 잘하시던데요.”

“아, 감사합니다. 처음 해 봤는데 다행이네요.”

“처음이요?”

“네. 문제 있나요?”

박희열이 살짝 당황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 자네 백동환 맞지? 자네도 정말 잘 들었어. 여전한 실력이구만.”

백동환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서로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에게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하긴 이름까지 알고 있었는데…….’

방송국 전속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성우 공채시험에서 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일단 화기애애하네. 나는 시하나 신경 써야지.’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그럼 갈까?”

“아아.”

“오늘 뭐 놀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아. 시하. 페페.”

“응? 페페?”

“몬수터~”

“아~ 만화 보고 싶구나?”

“아아.”

“그래. 그럼. 만화 보러 가자.”

“아아.”

그때 백동환과 이야기를 마무리됐는지 나에게 왔다.

“형님!”

“응?”

“다 형님 덕분입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원대 방송국에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네요.”

“오? 정말?”

“네. 하하. 추가 합격자를 나중에 발표한다고 하더라고요.”

“너 뽑히는 거 아니야?”

“글쎄요? 최종 면접에 간 사람들로 추가합격을 시킨다고 했으니 가능성은 없지 않네요. 그래도 지금 박희열 성우에게 들은 거니까 가산점이 있지 않을까요?”

“저분?”

“네. 사실 최종 면접 심사관이셨거든요.”

“아하. 그럼 잘되면 좋겠다. 너 진짜 열심히 했잖아.”

“하하. 네. 다 형님 덕분이네요.”

“뭘 그런 거 갖고. 그럼 같이 펭귄몬스터 보면서 닭이라도 뜯을래?”

“그거 좋죠.”

우리는 녹음을 무사히 끝내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시하랑 함께 즐겁게 펭귄몬스터를 같이 봤다.

***

-시하의 그림. 픽시브 업로드.

[제목 : Under the sky.]

1. LSH라는 글자로만 그려진 새 그림.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bird #LSH #Typography

오랜만에 업로드한 그림에 하트와 댓글이 무수히 달렸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새 하나가 있는 그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시하가 본 영상의 새를 창의적으로 좀 더 추가해 그렸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시하페페!!

-오래 기다렸어요!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의미지?

-LSH가 무슨 의미야?

-LSH는 바로 황체자극호르몬이라고!

-멍청아. 아무리 약자라고 해도 그건 아니지.

-맞아. 시하페페는 모든 글에 기본적으로 영어로 쓰고 있어. 그건 영어를 쓰는 국가란 소리야.

-그게 무슨 상관인데?

-LSH는 Lake Superior Hall의 약자라고!

-그게 뭔데?

-북아메리카 오대호 중 가장 큰 호수 말이야!

-!!!

전혀 아니고 LSH는 그저 이시하와 이시혁의 약자였다.

-근거가 너무 빈약해. 영어 쓴다고 다 그거라는 법이 없잖아.

-내가 그걸로만 말하겠어? 저 새를 거꾸로 해서 슈피리어호와 겹쳐봐.

정말 우연의 일치로 호수의 모습과 맞아떨어졌다.

-!!!

-와. 미친?!

-진짜 호수라고?!

-아. 새인 줄 알고 속았습니다.

-역시 시하페페!!!

-근데 왜 거꾸로 돌려서 새로 만들었던 거야?

그렇다. 당연히 나와야 할 의문이었다.

-그건 거꾸로 해서 시야의 고정관념을 깬 거겠지.

하지만 거기에 다른 반박이 나왔다.

-아니. 나는 다르게 생각해. 힌트는 바로 제목에 있어! 하늘 아래!

-그게 왜?

-슈피리어호의 모습 사진은 애초에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이잖아. 바로 하늘 아래서!

-!!!

-와. 미쳤어!

-그걸 볼 수 있는 동물이 뭐겠어?

-새네. 와~

-그렇지. 바로 새야! 하늘 아래서 볼 수 있는 새의 눈을 통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거야. 그래서 호수가 거꾸로 된 거지.

-?!?!

-거기까지 생각한 그림이라고?

-역시 시하페페야. 발상이 남다르다고!

제목은 그저 시혁이 있어 보이려고 적은 것뿐이었다.

-이걸로 알았어. 시하페페는 캐나다 사람이야.

-슈피리어호가 캐나다에 있는 거긴 하지.

-와. 시하페페. 캐나다 사람이었구나.

-나 캐나다 방송국 관계자인데 이번 방송 미술대회에 시하페페를 DM으로 초대해 보겠어.

-와! 시하페페 이제 유명해지는 거야?!

-그러면 정말 섭섭할 거 같아. 뭔가 나만 알고 있는 보물을 대중에게 뺏기는 기분?

다음 날.

시하페페 계정으로 방송국에서 DM 요청이 왔다.

그걸 본 시혁은.

“캐나다? 미술 방송? 이건 또 뭐야? 시하가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대로 DM을 무시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