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KI 미디어.
홍진수는 송택수의 무협 웹툰이 만들어지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주로 성우를 섭외하면서 해외에 나갈 E북 원고 교정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로 향했다.
“대표님.”
“응? 왜 그래?”
“이번에 해외에 E-book 런칭을 하면서 웹툰 트레일러 영상도 함께 포함하면 어떻겠습니까?”
“흐음.”
“요즘에 소설에도 트레일러 영상을 넣는 추세지 않습니까.”
“그럼 영어를 하는 성우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마추어로 해결하면 됩니다. 대사도 많이 없으니까요.”
“음. 하긴. 1분 조금 안 되는 영상에 대사가 별로 없긴 하지.”
지문이 많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조금 들어간다.
웹툰은 1차, 2차 트레일러로 나뉘어 있지만, E-book에 넣을 것은 1차뿐이라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장이 홍진수를 힐끗 보았다.
“좋아. 그러자. 그런데 이렇게 제안을 하는 걸 보니 실력 좋은 언더라도 있나 봐?”
언더그라운드 성우.
성우협회에 가입되지 않고 명함을 파서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실제로 그런 성우들이 있지만 페이는 그렇게 많이 받지 못한다.
심지어 성우협회에 등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크다.
홍진수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번에 두 사람이 필요했는데 시혁 씨가 좋은 성우지망생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시혁 씨도 참여할 생각입니다. 발음 하나는 엄청 좋잖아요.”
“응? 그랬나?”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하기로는 시혁의 영어 발음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아는 걸까?
홍진수가 눈을 흘겼다.
“우리 편집부에서 일할 인재에 이렇게 관심이 없다니 실망입니다.”
“야.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뭐가?”
“떡이야 저희가 먹이면 되겠죠.”
“그만 놓아줘. 질척거리면 여친도 학을 떼.”
“제 아내는 집착 좋아하던데요? 짜릿하다면서.”
“그거야 네가 잘 만나서 그렇고. 아무튼, 영어 발음 좋다는 건 또 뭔데?”
“이번에 패션 페어&국제박람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통역사를 했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제 친구도 거기 부스로 참가했는데 막 톡으로 사진을 날리더라고요. 근데 딱 시혁 씨가 찍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물었더니 통역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와. 그 친구 인재네.”
“그것도 하비니스 기업에서 고용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한국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잘나가는 곳입니다.”
홍진수가 가슴을 폈다.
네가 왜 자랑스러워하냐?
사장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대단하네. 거기 바이어들에게 전문용어도 이야기했다는 거 아니야?”
“그렇죠. 저희도 해외 사업부에 인재가 없지 않습니까? 올라운더에 최적화된 인재입니다.”
“네 일이나 잘해. 네 일이나. 어이구. 그래서 시혁 씨는 한데?”
“하하. 당연하죠. 그게 조건인데. 이렇게 저희랑 같이 엮이면 마음이 기울지 않겠습니까? 원래 정이 무서운 법이죠.”
“무서운 놈.”
“집착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닙니다? 스킬이 있어야죠. 부담스럽지 않게. 살살 조련하듯이 생활에 스며들어야죠.”
“넌 충분히 부담스러우니까 나가!”
“옙! 그럼 승인 떨어진 거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홍진수가 넉살을 떨며 경례를 했다.
어찌 된 게 요즘 따라 더 활발하다.
평소에도 기운찼지만, 특히 오늘이 유독 심했다.
이시혁 효과인가?
사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떠나가는 홍진수를 바라봤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 입사하면 좋기는 하겠네.’
안 그래도 해외 계약에 따라갈 직원이 적어서 문제다.
아니, 있어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시원치 않다.
난다긴다해도 해외에서 영 힘을 못 쓰니.
‘쯧. 뭐 이런 걱정할 때가 아니지.’
사장은 모니터를 다시 바라보며 특약을 작성했다.
제일 윗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중국 웹소설 상호 계약]
***
-AH 녹음실.
처음으로 온 녹음실은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았다.
그냥 장비가 좋아 보인다. 녹음하는 마이크가 있다.
그저 그런 감상만 들었다.
하지만 같이 온 시하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아아. 형아.”
“응? 저거 만지고 싶다고?”
“아아.”
“저거 세팅되어 있어서 만지면 안 될 텐데…….”
여러 가지 볼륨이라든가 싱크라든가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장비들을 보니 손대기 너무 껄끄러웠다.
그때 앞에 있는 엔지니어가 권유했다.
“만져도 돼요. 여기다 기본적으로 세팅이 저장되어 있어서요. 디지털이거든요.”
“디지털이요?”
대부분 기계가 디지털이지 않나?
뭐가 다른 걸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만져나 보자.
“시하야. 만져도 된대.”
“아아.”
시하가 열심히 볼륨을 올렸나 내렸다 한다.
녹음실에 전달할 수 있는 버튼도 누른다.
이게 그렇게 재밌을까?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엔지니어가 말했다.
“자. 그럼 신기한 거 보여줄게요. 이 버튼만 누르면.”
달칵.
시하가 만진 볼륨들이 자동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이게 바로 디지털 세팅의 장점이죠. 기본세팅이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와. 이건 신기하네요.”
“하하. 녹음하고 편집하는 것 보면 더 신기할걸요? 아, 쉬고 돌아온 성우님들이 오시네요. 이제 마지막 녹음만 하면 되네요. 잠깐만 여기서 구경하고 계세요.”
폰을 잠시 본 엔지니어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는 얌전히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옆에 있던 백동환은 이런 녹음실이 익숙하겠지?
학원도 다니고 있으니까.
“녹음은 경험해 봤어?”
“형님. 저 언더로 녹음 경험 좀 해봤습니다.”
“오. 그래? 그럼 내가 했던 제안에 그다지 흥미는 없었겠네.”
“하하. 그렇지도 않아요. 보통 프리랜서 성우들이 수당으로 받는데 언더에 있는 사람들은 수당을 무척 적게 받거든요. 아주 적게요.”
“으음.”
“그래도 형님이 소개해 주신 덕분에 페이는 세게 받잖아요. 영어로 한 트레일러 더빙을 몇 대사만 하는데 5만 원이면 땡큐죠.”
“그렇게 생각하면 고맙고.”
“그리고 저렇게 프로들이 하는 걸 볼 수도 있으니 이득입니다.”
“오. 그래?”
“네. 제가 지원한 방송국 소속 성우시네요.”
“아, 진짜?”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도 알아봤네?”
“당연하죠. 보통 프리랜서가 가장 많고 처음 채용되면 전속 계약은 의무적으로 2년밖에 되지 않거든요. 최근까지만 해도 3년이었고 그전에는 4, 5년도 있었던 듯해요.”
“전속이라.”
“그래도 전속이 나쁜 건 아니에요. 관점에 따라 다르죠.”
“지금은 능력만 있다면 프리랜서가 더 받을 거 같은데?”
“오.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그렇지. 통역사나 번역가나 다 프리랜서니까. 능력에 따라 수입이 천차만별인 건 마찬가지고.”
“맞아요. 듣기로는 꾸준히 일한다고 가정했을 때 연봉이 5천에서 1억 5천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와. 1억 넘으면 진짜 할 만한데?”
“그 이상도 있을지도요? 저도 자세히는 몰라서.”
속물 같지만 왜 이렇게 돈 얘기에 솔깃하지?
“시하야. 성우 해 볼 생각 없어?”
“아아.”
도리도리.
알고 고개를 젓는 걸까?
“정말 없어? 전에 녹음했던 거 재밌었잖아.”
“시하. 형아. 가치.”
“응? 형아랑 같이하면 좋다고?”
“아아.”
“벌써 이렇게 물귀신 작전을 쓸 줄 알다니 제법인데?”
“아아.”
그때 백동환이 풋 하고 웃었다.
“하하. 형님은 시하랑 이야기할 때 제일 재밌습니다. 근데 시하는 지금 어린이 성우도 못 해요.”
“왜?”
“일단 성우는 빠르게 초독을 해야 하는 거라서.”
“초독이 뭐야?”
“저렇게 대본을 보는 순간 연기할 수 있게 읽는 거요.”
녹음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통 배우와는 다른 것 같다.
배우는 리딩하고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하지만 성우는 저렇게 대사를 빠르게 보면서 연기하는구나.
전에 집에서 할 때는 못 느꼈는데 여러 효과음의 타이밍도 사인해 주고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굉장히 흥미가 생긴다.
백동환이 이어 말했다.
“아이는 혀 짧은 발음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거든요.”
“아. 대사 전달력이 중요하구나?”
“그렇죠.”
이렇게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다.
그때 시하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형아.”
“응?”
“시하. 잘해.”
“응. 시하 잘하지.”
“시하. 저거.”
“응?”
시하가 앞에 재생하고 있는 성우들의 대사를 따라 했다.
“나눈…….”
그다음에 올 말은 ‘고금제일이다’지만 시하가 기억이 안 나는지 이렇게 말했다.
“시하~”
“큭큭. 잘했어. 잘했어. 시하는 시하지. 아직 ‘으’ 발음이 힘드네? 좀 더 연습해야겠다.”
“아아.”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녹음이 끝나자 우리도 녹음실로 들어갔다.
저쪽 성우 팀이 찍은 게 트레일러 영상 한국어판 1, 2라면 우리가 찍을 건 트레일러 영상 영어판 1이었다.
“그런데 밖에 있는 성우분은 안 가시네?”
“구경하시려나 봐요.”
“구경할 게 있었나?”
실제로 지문을 읽는 역할을 하는 건 백동환이고 주인공의 대사를 하는 것도 백동환이었다.
나는 악역 한 명의 역할을 맡았을 뿐.
서로 주고받는 대사는 그래도 목소리가 달라야 하니까.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네.”
녹음이 시작되었다.
Na(내레이션).
「석양을 보며 무진은 땅에 검을 꽂았다. 저무는 모습이 자신의 모습 같았다.」
(독백)
「나는 고금제일이다. 이대로 덧없이 죽을 수 없다.」
화면에는 고금제일 무진을 죽이기 위한 초고수들이 즐비해 있었다.
앞으로 나오는 한 사람.
무림 맹주 천군악.
나는 여기서 대사를 쳐야 했지만 다른 말을 했다.
“잠시만요.”
백동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입 모양과 함께 연기하기 힘들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그리고 백동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멈춘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그저 백동환의 발음과 억양이 미묘하게 거슬렸다.
그런데 이걸 지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말하는 게 낫겠지?’
이건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독자들에게 쓸데없이 넣었다고 악플이 달리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지가 않아. 네가 여기 오면서 나에게 말했지? 요즘 성우는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고.”
목소리는 변하되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해라.
굉장히 모순적인 것 같기도 한 어려운 요구였다.
그걸 할 수 있는 게 성우다.
“네.”
“발음 교정 좀 할게. 솔직히 통역사 일을 한 사람으로서 편하게 말하듯이 영어 하는 것에는 조금 문제가 있어. 애니메이션에 감정이 들어 있는 말투라고 해도 튀어.”
“아, 그래요?”
“어. 잘 봐. 지문은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좋았는데 흉성과 억양을 내리는 부분이 부족해. 아, 그냥 내가 다 해볼 테니까 네가 성우 버전으로 바꿔. 알았지?”
“네. 좋아요. 저도 형님께 영어 부분은 많이 배우겠습니다.”
나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녹음 시간은 2시간으로 잡았으니까 잠시 대사 좀 주고받는 교정 시간을 가질게요. 30분도 안 걸릴 거예요.”
나는 다시 백동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한국어로 목소리 연기를 하려면 힘들지만, 영어로 하려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외국어 스피킹을 공부할 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는 게 드라마고 영어였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하면 뉴스 발음을 따라 한다.
제일 거슬리지 않고 또박또박한 올바른 발음.
아나운서와 성우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부분으로만 보면 배우와 성우 역시도 관계가 많은 것 같다.
“그럼 시작할게.”
나는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