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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500)

53화

-시혁이의 육아일기

-5월 4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에 택배가 찾아왔다.

발신인은 내 전 아내이자 시혁이의 엄마였다.

살며시 시혁에게 선물을 건네주자 시혁이 가만히 상자를 바라본다.

그대로 들고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어떻게 할 줄 몰랐다.

한참을 고민하다 시혁이를 혼냈다.

이건 예의에 어긋난 짓이라고. 엄마가 기껏 생각해서 선물을 보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결국, 시혁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선물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자기에게 왜 이러냐고. 아빠 싫다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겐 시혁이 너무 어려웠다.

엄마가 보고 싶을 나이일 텐데…….

나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평범하지 않은 이 반응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시혁에게는 상처가 된 게 아닐까?

마치 시한폭탄을 건드린 느낌이다.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아직도 너무 어설프다. 그래도 시혁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

많이 부족한 아빠지만 네가 좀 이해해 주렴.

내가 더 노력할게.

-5월 5일.

오늘은 시혁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케이크를 사러 갔다.

손잡고 가게에 들어갔는데 초코케이크가 보였다.

그래서 먹고 싶냐고 물으니 먹고 싶단다.

오랜만에 솔직한 시혁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함께 케이크를 먹으며 티비를 보았다.

앙증맞은 손으로 퍽퍽 퍼먹는데 입가가 초콜릿 범벅이었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닦아주었다.

오늘 하루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으니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주면 좋겠다고 해서 실컷 읽어주었다.

시혁이가 만족한 것 같아서 나도 만족스러웠다.

어느새 시혁이의 기분이 많이 풀렸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끔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 나중에 안 사실인데 시혁이는 초코케이크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 위에 꽂힌 장난감이 갖고 싶었던 거였다.

정말 깜찍한 아들이 아닐 수 없다.

누굴 닮아 이리 영리할까?

당연히 날 닮은 것 같다.

***

나는 눈을 떴다.

오늘 오랜만에 옛날 꿈을 꿨다.

아버지와 함께한 어린이날의 꿈을.

어제 시하와 함께 어린이날을 보내서 그런 걸까?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나빴다.

괜히 그리움이 올라와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좋았던 추억이 아릿해진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조각조각 부분 난 곳에 오롯한 감정만이 가슴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슴이 이렇게 묵직한 건가?

“으악.”

나는 이불을 들췄다.

가슴이 묵직한 이유는 시하가 내 위에 있어서였나 보다.

“시하야.”

“아아.”

시하가 작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이제 내려오자.”

“아아. 형아~”

시하가 내 위에서 흐물흐물해졌다.

품에서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떠는데 도저히 내릴 수 없었다.

팔을 들어 시하를 안고 옆으로 굴렀다.

데굴데굴.

“시하야. 이제 일어나야지.”

“코오.”

“자는 척해도 일어난 거 다 들켰거든?”

시하가 힐끗 눈을 뜨더니 다시 잠든 척을 했다.

“코오~”

“더 자면 안 돼~”

“코오. 시하. 자.”

“자는 사람은 말 못 하는걸?”

시하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마 입을 막으면 말 안 하게 되는 건 줄 아나 보다.

시하가 너무 귀여웠다.

이게 아니지.

“나중에 백동환 삼촌이 케이크 먹으러 오는데 깨끗한 모습을 보여야지. 그치?”

“케이쿠?”

시하가 케이크라는 말에 반응해 벌떡 일어났다.

역시 백동환보다는 케이크인가 보다.

“케이쿠!”

“그래. 그래. 일단 씻고 밥 먹고. 알겠지?”

“아아!”

시하가 화장실 앞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형아!”

“그래. 간다~”

이제는 시하가 재촉을 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백동환을 기다렸다.

띵동.

“네. 나가요.”

문을 열자 백동환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어서 와. 그런데 이 상자는 뭐야?”

“이게 바로 제가 준비한 성우 체험 학습지죠.”

“그런 것도 있어?”

“시하가 발음 연습할 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들고 왔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에 발음 연습하려고 사용한 거긴 한데. 이게 유아용이거든요.”

“오! 그래? 신기하네.”

“상자에 제가 예전에 쓰던 마이크도 담았어요. 시하가 쓰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거기까지 안 해 줘도 되는데.”

“하하. 뭐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생각하시죠. 저도 이제 필요한 건 아니라서.”

“그럼 고맙게 받을게.”

나는 상자를 받아서 시하에게 보여줬다.

시하도 관심이 가는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시하야. 재밌겠다. 그치?”

“아아.”

“그럼 우리 한번 해볼까?”

“아아.”

나는 집에 있는 노트북을 가져와 설치했다.

USB에 담긴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학습지 대본에 있는 만화가 재생되었다.

교육용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애들이 해야 할 일을 귀여운 강아지들이 척척 말하고 있었다.

백동환이 말했다.

“여기 보시면 ‘으’ 발음이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으’ 발음을 중점적으로 맞춰져 있죠.”

“그러네?”

“일단 영상을 한 번 보고 따라 해보죠.”

“오케이. 재밌겠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제목 : 치카의 치키차카초코초코초.]

강아지인 치카와 엄마가 식탁 위에 있습니다.

「와! 오늘은 간식 먹는 날이야!」

「치카야. 여기 초콜릿이란다. 엄청 달콤해~」

「와! 근데 다 먹어도 돼요?」

「그래.」

치카와 엄마가 초콜릿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냠냠. 냠냠.

다 먹은 치카가 배를 어루만졌어요.

「배부르다.」

「다 먹었으면 양치질을 하렴.」

「싫어요.」

「안 하면 이가 상해요.」

「싫어. 싫어.」

치카는 말을 듣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이가 너무 아파서 엉엉 울었어요.

「엄마. 아파요. 으아아앙.」

「그러니까 양치질하라고 했지?」

「네. 양치질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어. 치과에 가야겠다.」

치카와 엄마는 치과로 갔습니다.

위이이잉.

치과 의사가 기계로 치카의 충치를 제거했습니다.

치카는 아파서 울었어요.

「으아아앙」

「이제 음식 다 먹고 꼭 양치해야 한다.」

「네. 꼭 할게요.」

집으로 돌아온 치카는 초콜릿을 먹고 난 뒤에 양치질했습니다.

치카치카.

꼼꼼히 이를 닦았습니다.

위, 아래. 위, 위, 아래.

치키치키차카차카초코초코초!

이에 있던 초콜릿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치카는 거울을 보며 이빨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이~! 으~!」

치카의 이는 이제 깨끗해져서 세균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끝.

영상이 끝이 났다.

생각보다 짧은 영상이었는데 확실히 ‘으’ 발음이 많은 것은 알겠다.

‘오늘은’이라는 대사만 봐도 ‘으’ 발음이 두 개나 있다.

아마도 치카 역은 아이가 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재밌는 점은 대사에 숨 쉬는 부분도 ‘/’ 표시를 해줘서 손쉽게 따라 할 수 있게 했다.

물론 시하가 글자를 몰라서 이걸 보고 읽을 수는 없지만.

‘한글 공부는 언제 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접어두고 더빙을 시작하기로 했다.

내레이션은 자동으로 나오니 편하게 녹음하면 되었다.

“시하야. 자, 해 보자.”

“아아.”

시하가 첫 대사를 뱉었다.

“와! 간식!”

“음. 시하야. 줄이면 의미 없지 않을까?”

심지어 ‘으’ 발음인 ‘오늘은’이 없어져 버렸다.

“아?”

“그럼 오늘은 해 보자. 오늘은!”

“오느른!”

“좋아. 잘하고 있어. 오늘은.”

“오느른!”

“간식 먹는 날이야. 먹는!”

“간식 먹어~”

“하하. 역시 쉽지 않네. 자, 다음.”

다음 것도 짧음의 미학을 보여주며 녹음이 되었다.

마이크가 좋아서 그런지 소리가 꽤 좋게 녹음되는 것 같았다.

“다 됐다. 우리 한번 들어볼까?”

“아아.”

우리는 녹음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시하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아! 형아! 시하!”

“그래. 시하의 목소리네?”

“와!”

“신기하지?”

“아아. 형아. 형아.”

“응. 형아 목소리도 있어.”

시하가 기분이 좋은지 팔을 번쩍 들었다.

“치카치카초코초코~”

“아하하. 그걸 기억하는 거야?”

“치카치카초코초코~”

내레이션 발음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럼 우리도 초콜릿같이 달콤한 케이크를 먹어볼까?”

“아?”

“오늘 케이크 먹기로 했잖아. 동환아. 지금 내가 꺼내올게. 시하랑 놀고 있어.”

“네! 걱정 마세요!”

나는 백동환에게 시하를 맡기고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얼린 펭귄 모양 크림이 위에 찍혀 있는 케이크.

조심히 위에 있는 천을 떼어냈다.

시하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짜잔~”

나는 시하에게 펭귄 케이크를 공개했다.

시하가 엄청 흥분해서 방방 뛰었다.

“아아!! 페페!!”

점프. 점프.

이렇게 좋아하는 시하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펭귄이 좋을까?

괜히 코를 스윽 문지르게 된다.

“그럼 이걸 이제 자른다?”

“아아. 아냐.”

“응?”

“아냐.”

“케이크는 잘라야 먹지.”

“아니야.”

아무래도 펭귄을 자르는 건 용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쩐다?

그때 백동환이 웃으며 말했다.

“위에는 남겨두고 옆으로 살살 파먹으면 되죠.”

그러면서 백동환이 포크로 옆을 푸욱 찔렀다.

마치 땅따먹기를 하는 것처럼 가져갔는데…….

뽀각.

펭귄의 팔 하나가 부러졌다.

“헉!”

시하의 눈이 1mm 커졌다.

“페페. 아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다.

시하가 지금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시무룩.

무척 침울해진 얼굴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백동환도 당황했는지 고쳐보려고 했지만 이미 부러진 팔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동환이 말했다.

“시하야. 페페는 먹어주길 바랄 거야.”

부러진 펭귄의 팔을 집어서 시하의 입에 넣어줬다.

시하가 2차 충격을 받았다.

“마시써…. 아파…….”

페페의 팔이 맛있다는 충격과 페페의 팔이 부러졌다는 충격.

아기 인생에 아주 복잡미묘한 감정을 시하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봐도 시하의 이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형아…….”

결국, 내 품에 안겨서 얼굴을 비볐다.

“하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리지 못했다.

사실 원래 저 펭귄을 먹으려고 했었기도 하고.

“그래. 그래. 이렇게 된 거 그냥 먹자. 시하야.”

“아아.”

“케이크는 정말 맛있을 거야.”

“아아.”

남은 펭귄은 건드리지 않고 케이크만 조심히 잘라서 입에 넣었다.

“맛있지?”

“마시써.”

“형아가 만든 거야. 다음에 펭귄 또 만들어줄게. 알았지?”

“아아.”

시하가 기분이 풀렸는지 케이크를 열심히 먹었다.

오물오물.

볼이 빵빵하게 먹는 것을 보니 진짜 맛있긴 한가 보다.

처음 만들었는데 대성공이었다.

“형아.”

“응?”

케이크를 다 먹은 시하가 말했다.

“치카치카.”

“오! 양치질하자고?”

“아아.”

저 성우 체험이 효과가 있긴 있구나?

의외로 교육이 된다는 사실에 자주 시하랑 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거 백동환에게 감사해야겠다.

***

양치질이 끝난 시하가 발을 위아래로 흔들며 그림을 그렸다.

나는 그런 시하를 힐끗 보다가 백동환과 이야기를 나눴다.

“성우 되는 건 잘돼 가?”

“으음.”

백동환이 곤란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잘 안 되는구나?”

“이번에 교육 방송사에 지원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아…….”

“거의 다 왔는데 놓쳤다는 느낌?”

“아쉽겠다.”

“사실 T.O가 많지 않았어요. 1명을 뽑는 거라 경쟁률이 엄청났죠.”

“으음.”

나는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1명이면 정말 아쉽기는 했다.

많은 성우 지망생을 보지 못했지만 백동환을 봤을 때 굉장히 잘한다고 느꼈다.

“역시 재능인가 싶기도 합니다.”

“응?”

“제가 인정하는 애 한 명이 거기에서 합격했거든요.”

“아, 한 명…….”

“비교하면 안 되는데 괜히 비교하면 초라해지는 자신이 있습니다. 하하. 제 덩치에 안 맞게 약한 소리였죠?”

“아니야. 그런 게 어딨어.”

백동환이 앞에 있는 커피 잔을 매만졌다.

“쓰네요. 무척.”

나도 살며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너무 쓰면 나중에 단맛도 나와.”

“네?”

“나오긴 하더라. 이게 단맛인지. 아니면 쓴맛인지. 구분이 아주 잘돼. 그러니까 다음에는 꼭 단맛이 날 거야.”

“감사합니다. 역시 형님이네요.”

“역시 형님은 뭐야.”

그때 전화가 왔다.

“아, 잠시만.”

“편하게 받으세요.”

전화가 온 사람은 KI 미디어 홍진수였다.

“여보세요.”

몇 번의 안부 말이 오간 후에 나는 손으로 폰의 스피커를 가리고 백동환을 보았다.

“동환아.”

“네?”

“혹시 영어 더빙도 잘해?”

“예? 아…. 못하지는 않습니다.”

“오. 그래?”

나는 살며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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