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수상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백동환이 말끔한 차림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런 백동환을 보며 물었다.
“웬 정장이야?”
“나름 행사인데 멋진 옷을 입고 싶었거든요.”
“그래? 근육 때문에 정장이 터질 것같이 불편해 보이는데…. 안 더워?”
“괜찮습니다. 슬슬 쌀쌀해질 것도 같고 안에는 반팔 와이셔츠거든요.”
“그런데 설마 여기서 알바를 할 줄 몰랐어.”
“지인의 힘이죠. 성우 지망생에게 알맞은 꿀 알바였기도 하고요.”
“진짜 연기 실감 나긴 하더라.”
“하하. 목소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근육 아니라?”
“저보다 더한 사람도 많은데요. 뭘.”
글쎄.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 시하는 그림 잘 그렸습니까?”
“엄청나지.”
“하하. 그래요? 시하야. 그림 잘 그렸어?”
“아아!”
시하가 손을 척 하고 들었다.
그때 어떤 아이가 시하를 보았다.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거슬리는 미소였다.
“쟤는 뭐지?”
“글쎄요.”
“아아. 이배추.”
“뭐? 쟤가 걔라고? 흠흠. 시하야 그 말 하면 안 된다고 했지. 쉿이야. 쉿.”
“아아.”
“형님. 이배추가 뭡니까?”
나는 백동환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뭐 그런!”
“요즘에 초등학생들이 하는 말인가 봐. 뉴스에도 한 번 나왔었고.”
“어휴. 나 때는 안 그랬는데.”
“그치?”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그런 말이 유행하지 않았다.
대체 누구의 잘잘못인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림왕 수상이 시작되었다.
앞에 사회자가 나와서 말했다.
“굉장히 많은 어린이가 나와서 심사하기 어려웠습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들 잘 그렸더라고요.”
일단 입에 발린 말을 해 준다.
앞에 있는 저 아이도 기대가 되는지 이쪽으로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저희는 방송이 아니라 질질 끌지는 않겠습니다. 먼저 동상!”
5명의 아이가 호명되었다.
올라간 아이들이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백동환이 말했다.
“시하는 동상이 아니네요. 혹시 은상인가?”
“아니. 시하 정도면 대상이지.”
“형님은 너무 주관이 많이 섞여 있는 거 아닙니까? 요즘 어릴 때부터 배워서 그림 실력이 엄청나요.”
“시하는 3살의 실력이 아니니까 괜찮아.”
나는 가슴을 쭈욱 폈다.
옆에 있는 시하가 날 따라서 배를 내밀었다.
빼꼼.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배를 간질였다.
“형아~”
“그래. 그래. 아, 이제 은상 발표하네.”
은상 두 명이 받고 금상을 발표했다.
“금상! 김진국, 이시하! 축하드립니다!”
아쉽게 대상은 아니었다.
옆에 있던 백동환이 입을 벌렸다.
“와. 대박!”
“아. 심사위원이 눈이 없네.”
“금상도 대박이라고요!”
“쯧. 이건 견해의 차이야.”
“아니. 초딩도 많은데 3살 애가 금상이라니까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시하야. 가자.”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어린애가 금상이라고?”
“말도 안 돼!”
“대박! 천재야?”
“혹시 지금 손잡은 아빠가 대신 그려준 거 아니야?”
그런 소리가 들렸다.
부정행위 안 했어요.
뻔히 지켜보고 있는 감시원이 있었는데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앞에 있는 사회자도 말문이 막혀 바라보았다.
“어…. 와. 대단하네요. 이 그림을 여기 아기가 그렸다고 합니다.”
사회자가 그림을 보여주었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너무 창의적이고 기발한 그림.
나였어도 의심할 거 같았다.
그렇다고 높은 퀄리티의 그림은 아니었다.
선만 봤을 때 이해가 될 정도.
‘나이는 말 안 해야겠다.’
세 살이라는 걸 말하면 더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혹시 이시하 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시하는 몇 살?”
시하가 검지를 들었다.
사회자가 당황했다.
“한 살이라고?”
도리도리.
시하가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쉿.”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배운 걸 그대로 써먹는 모습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이었다.
“아하. 비밀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시하야. 축하해요. 여기 표창이에요. 상품은 아빠에게 드릴게.”
“아아. 형아.”
“응? 형이었구나. 아저씨가 몰랐네. 하하. 축하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상품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마이크를 시하에게 들이밀었다.
“상 받은 소감 한마디 해 주세요. 상 받아서 어때요?”
시하가 표창장을 꼬옥 들고 어딘가를 보며 말했다.
시선을 따라가자 시하에게 이백충이라는 말을 쓴 아이가 보였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 여기에서까지 보였다.
시하가 말했다.
“유 로즈~”
You lose.
이건 또 어디서 들었대?
생각해 보니 내가 게임하고 있을 때 맨날 나왔던 단어였다.
[You lose]라고.
설마 내가 이겨서 혼내 주자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역시 시하는 똑똑했다.
역시 내 동생이다.
“하하하. 누군가하고 경쟁하고 있었나 봅니다. 애가 승부욕이 대단하네요.”
다들 시하의 말에 빵 터졌다.
예상치 못한 소감에 웃고 있는 사람들.
그 속에 한 아이만이 얼굴이 시뻘게져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왔다.
상품을 보니 호텔 디너뷔페 이용권이었다.
‘비싼 거 줬네.’
한 끼 가격이 10만 원이 넘어간다고 생각해볼 때 비싼 거 맞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을 비싼 뷔페에서 먹을 거 같다.
그때 한 아이가 달려왔다.
“야.”
“아아?”
“너 좀 그리더라? 하긴 이런 거라도 잘해야 먹고살지.”
“아아?”
나는 눈을 찌푸렸다.
뒤에 있던 아이의 엄마가 오더니 아이를 나무랐다.
“순태야!”
“엄마.”
“말 섞지 말랬지.”
“네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두 사람의 작태를 보다가 폰을 꺼냈다.
은행 앱에 들어가 들어온 한 달 수입을 펼쳤다.
“저 순태야.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자 봐.”
“어?”
참고로 저번 달에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
번역료+통역사료+바이어 계약료.
했던 일을 한 번에 받아서 어마어마한 수입이 되어 돌아왔다.
물론 5월부터는 이런 돈을 한 달 만에 벌 수 없긴 하지만.
순태의 눈이 커졌다.
“어어?”
“500 넘으면 금수저지? 조건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것 같은데? 참고로 나는 시하 형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옆에 있던 순태 엄마도 돈을 봤는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그런 돈이…….”
그때 백동환이 나를 불렀다.
“형님! 이제 어디 가실 겁니까?”
힘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구의 근육근육한 백동환이 내 옆에서 서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순태가 그 커다란 그림자에 압도당했는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중얼거렸다.
“형님? 많은 벌이…. 저 근육, 정장…. 조, 조폭?”
조그마한 소리였지만 다 들렸다.
백동환이 눈을 찌푸렸다.
험상궂은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순태 엄마는 사색이 되며 순태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
저기요. 아줌마?
이거 합법적으로 번 돈이에요.
내가 생각했던 통쾌한 복수는 이게 아닌데?
수입으로 무시했으니 더 많은 수입으로 내리누르려고 했는데 공포로 눌러버렸다.
“형님. 왜 도망치는 거죠?”
“너 때문이야. 너 때문.”
“네? 하하. 설마요. 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래. 아무것도 안 했겠지…….”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몸이 위협을 해.
괜히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는 밥을 먹어야 했다.
보기 좋게 좋은 식사권을 얻기도 했고.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나는 폰을 들어 승준 엄마에게 전화했다.
지금쯤 승준과 하나가 보러 간 노래대회도 끝났을 시점일 거다.
***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합류했다.
승준과 하나가 백동환을 보더니 경계를 했다.
“으악! 괴물이다!”
“하나는 괴물 시러!”
백동환이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넉살 좋게 애들에게 다가가더니 승준을 번쩍 들었다.
“우와!”
“자. 봐. 비행기가 태워진다!”
“우와! 우와!”
“이렇게 매달려도 돼.”
“와! 힘세다!”
승준이 기분이 좋은지 백동환과 금방 친해졌다.
하나는 여전히 엄마 뒤에 숨은 채 지켜보았다.
“하나는 시혀기 오빠가 더 좋아.”
“형아~ 시하두~”
나는 두 아이의 말에 살포시 웃었다.
가끔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을 해 주면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럼 맛난 거 먹으러 가야겠는데?”
“아아.”
우리는 사람 수대로 받은 호텔 뷔페로 향했다.
맛있는 음식들을 냠냠 먹은 뒤 즐겁게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하가 내 등 뒤에 잠들어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집에 가면 펭귄 케이크도 있는데 그건 아마 다음 날에 보지 않을까 싶었다.
시하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형님. 집에 도착해도 안 일어나겠네요.”
“너도 오늘 고생했어.”
“고생은요. 저야말로 비싼 음식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하하하. 네가 뷔페 음식을 접시에 산으로 쌓을 때 애들 표정 봤어?”
“그럼요. 절 돼지라고 놀렸는걸요.”
“몸이 커서 많이 먹어야 하나 봐?”
“사실 많이 먹기도 하지만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두자는 주의라. 한 끼에 10만 원인데 그런 곳에서 깨작깨작 먹는 건 아깝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이렇게 먹으면 그만큼 운동을 하면 되고요.”
“보통 운동은 뭐 하는데? 아침마다 맨날 보이는 거 같던데.”
“산 타고 오죠. 형님. 그거 아세요. 산에서 쑥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그게 또 캐서 먹으면 맛있거든요.”
“그래?”
“네. 된장찌개에도 넣을 수 있고 쑥떡을 해 먹을 수도 있죠. 운동도 되고 식용도 되고. 일석이조입니다.”
“의외로 생활력이 강하네?”
“의외라뇨. 전 돈을 헤프게 쓰지 않고 아껴 삽니다.”
뭔가 상남자다울 거 같은데 은근 가정적인 거 같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래도 뭔가 새로운 면모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단하네.”
“하하. 다음에 형님도 같이 쑥 캐러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같이 운동해도 좋을 거 같은데.”
“쑥 말고 다른 것도 캐?”
“당연하죠. 민들레도 캐고. 아카시아도 따오고.”
“그거 다 먹으려고?”
“아카시아로 차 끓이면 나름 좋습니다. 비빔밥도 괜찮긴 한데.”
“와…….”
“나름의 풍미가 있습니다.”
뭔가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형님은 뭐 없습니까?”
“나? 나는 시하를 위해 펭귄 케이크를 만들었지. 아. 맞다. 너 나중에 우리랑 케이크 같이 먹자.”
“오! 그거 진짜 기대되는데요? 근데 케이크도 만들 줄 아시고. 시하는 복 받았네요.”
“그렇다니까.”
“전 어린이날 때 선물이라고는 가족끼리 외식하는 시간 정도였던 거 같습니다. 장난감 같은 건 안 사줬죠.”
“오. 외식도 괜찮겠다.”
“그래도 전 장난감 선물이 받고 싶었습니다.”
“하하. 애들은 그렇지.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있어.”
“정말입니까? 애들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텐데요?”
“주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
“그런가요?”
“그래. 아니다. 그냥 잊어.”
“네! 그런데 케이크는 언제 먹습니까?”
“내일?”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저도 뭔가 준비해야겠군요.”
“또 뭘 준비하게?”
“시하가 좋아하는 거로 선물하고 싶네요. 돈 드는 건 아니고요.”
“그럼 케이크값이라고 생각하고 잘 받을게.”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세요.”
“알았다니까. 그만 들어가 봐.”
어느새 집에 도착한 우리는 헤어졌다.
그런데 대체 뭘 준비한다는 걸까?